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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의 영적 성숙과정 묵상 카테고리 |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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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12-06-09 조회수1,989 추천수0 신고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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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의 영적 성숙과정 묵상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영적 성숙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또한

우리들이 걸어야 하는 여정이라고 생각하기에 묵상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우물가에 여인보다 예수님이 먼저 오셔서

기다리고 계셨다는 사실을 보셔야 할 것입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을 깊이 보셔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내 삶이 지치면 타인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먼저 우물가에 앉아 계셨고 이어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지치고 목마르신 예수님께서 왜 손수 물을 떠서

드실 수도 있으셨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여인에게 "나에게 물을 다오."

하고 청하셨을까요?

 

당신의 목마름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들에게 채워주시고 싶은 그 목마름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은 아닐까요?

구약의 엘리야 예언자도 보면 사렙타 과부에게 기적을 베풀기 전에 그

여인에게 "마실 물 한 그릇 좀 떠다 주시오."(1열왕 17,11)하고 청합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묵상해야 할 것인가요?

결국 예수님의 목마름을 채워드릴 몫이 우리들의 몫이라는 것은 아닐런지요?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들의 목마름을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묵상하지만 복음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목마름을 채워드려야 한다고 말씀

하시고 계시다고 묵상해 봅니다.

 

그렇다면 여인은 예수님의 목마름(인간의 구원)을 어떤 과정을 통하여

돕고 있는지를 묵상해 보는 것이 오늘의 묵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만나시기 위하여 제자들을 먹을 것을 사오라고 하시며

고을로 보내십니다(4,8 참조). 어쩌면 이 모습은 고백성사 보는 광경과도

비슷하다고 느껴집니다. 아무도 없는 상태에서 이제부터 여인은 자신의

살아온 삶을 예수님 앞에서 적나라하게 성찰할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구원의 길에서 먼저 기다리시고 먼저 다가오셔서 말씀을 건네시는

예수님의 자상함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어찌 감히 그 사마리아 여인이 유대인 남자인 예수님과 대화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 사실만 보더라도 불가능을 가능하게 길을 열어 주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천지의 창조주께서 먼저 찾아오셨기에 먼저 말씀을

건네셨기에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있었음을 새삼 감사드립니다.

저같은 죄인이 무슨 수로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와 같은 맥락에서 묵상해 보시면 예수님께서 여인을 이끌고 계심을

아실 것입니다. 가장 적나라하게 예수님의 교육법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인이 알아 듣을 수 있는 수준의 질문을 하시고 여인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씀으로 교육하시고 계십니다. 곧 그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자신의 삶을 가지고 교육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삶을 가지고 훈련하고 교육을 받기를 힘들어 합니다.

왜 그럴까요? 너나 할 것 없이 사라리아 여인의 삶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남편이 여럿이 있었다는 그 고백이 실질적인 남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남편으로 섬기는 세상의 수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배우자는 오직 주님이신데 말입니다.

 

그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기에 어렵지만 주님께서는

이미 다 아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포인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이제 너의 모든 것을 내가 다

안다고 하시며 이제 "내 말을 믿어라" 라고 청하십니다.(4,21 참조)

 

다음은 여인의 반응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아마 믿음(신뢰)가 생겼던 모양입니다.

우리는 누굴 믿을 수 있는가? 나를 잘 알아주는 존재를 믿습니다.

그리하여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의 믿음이 영글었을 때에 제자들이 돌아옵니다.(4,27 참조)

그런데 왜 제자들은 아무도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또는 "저 여자와

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 하고 묻지 않았다고 복음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무엇을 보았을까요? 그것을 오늘의 우리들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여인 사이에 흐르는 그것을 제자들은 볼 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동안 예수님과 자신들 사이에 흘렀던 그것임을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4,28-29) 그리하여 그들이 고을에서 나와 예수님께 

모여 왔다고 합니다. 

 

여인에게 물동이는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의 생명을 연장해 주는 귀한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여인은 그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갔습니다. 이 묵상은 무얼 말씀하시고

싶으신걸까? 여인에게 두려움이 걷혔고 용기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 여인은 자신의 인생으로 인해 사람들과의 만남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무도 없는 정오를 택해서 물을 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인이 보여주는 모습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생명은 부지하고 있으나 그건 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종종 자신이 왕따를 당할 때에 자살을 했다는 기사를 많이 봅니다.

왕따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살던 불쌍한 여인이 이제 스스로 사람들의

고을로 들어갈 수 있는 그 용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은 그것을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여인을 치유해 주셨는데 결국 한 공동체가 모두

치유되었습니다.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여자가

''저 분은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혔습니다.'' 하고 증언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람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4,39-42 참조)

 

우리는 보통 나의 공로를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속상해 합니다.

위의 말을 사람들에게 들었을 여인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우리들이 나의 공로를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속상해 하였을까요?

 

아니라고 묵상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살던 여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 들여져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감사가 있었을 것입니다. 감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안다는 사실입니다.

 

"그 여자가 ''저 분은 제가 한 일을 모두 맞혔습니다.''하고 중언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4,39)에서 보여주는 삶이 자신의 몫임을 잘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몫이 자신의 몫임을 잘 알았던 여인은 사람들이 예수님

을 만나뵙고 구원을 받게 된 것이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는 말을 한다해도

속상하거나 불쾌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자신이 구원받은 모든 정화을 살펴봐도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에서

일어난 치유기적임을 잘 알기에도 그렇습니다.

사라리아 여인의 영적 성숙은 결국 한 공동체의 구원으로 열매를 맺게

되었다는 묵상을 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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