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구약 이야기3: 하느님의 눈높이 교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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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1-05-22 | 조회수3,425 | 추천수0 | |
구약 이야기 (3) 하느님의 눈높이 교육
성경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때로 매우 위험한 일이다. 이슬람교에서도 코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여 그대로 따르는(근본주의) 이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는 알고 있다. 사이비 종교들도 마찬가지다. 묵시록에 나오는 14만 4천 명을 근거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종말론을 부추기는 경우들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예수님 역시 구약의 말씀과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셨고 받아들이셨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마태오 복음 19장에 나오는 혼인 문제는 대표적이다. 구약에서 신명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남자가 여자를 맞아들여 혼인하였는데, 그 여자에게서 추한 것이 드러나 눈에 들지 않을 경우, 이혼 증서를 써서 손에 쥐여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신명 24,1).” 이에 대해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던가?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마태 19,8).” 만일 우리가 구약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켰다면, 우리는 여전히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라고 말한 율법의 내용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다시 해석하여 우리에게 전해주셨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
그렇다면 왜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백성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일까?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라고 말씀하셨다. 무슨 말인가? 다시 말해서, 당시 구약의 백성들이 갖고 있었던 인식 수준은 지금 우리가 당연히 알고 있는 것들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뒤처져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인식으로 보기에 구약의 말씀들은 시대에 뒤떨어져 있는 것들이 많다. 여성에 대한 인권이라던가 노예 제도에 대한 인식들을 접하노라면 우리의 눈이 찌푸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 유다인들이 읽기에 구약의 말씀은 의문을 가질 것이 전혀 없었다. 그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인식과 문화 안에 완전히 부합하는 말씀이었고, 그러기에 그들에게 구약의 말씀은 하나도 거를 것이 없는 주님의 말씀 그 자체였다.
장하준 교수의 말이 떠오른다. “200년 전에는 노예 해방을 외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 100년 전에 여자에게 투표권을 달라고 하면 감옥에 집어넣었다. 50년 전에 식민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면 테러리스트로 수배당했다.” 구약의 이야기가 쓰인 때가 언제인가? 2-3천 년 전이다. 지금 우리에게 당연한 것들이 불과 몇십 년, 몇백 년 전만 해도 미친 소리였는데, 하물며 2-3천 년 전 사람들이 듣기에는 어땠겠는가?
성경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탄생한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저자의 의도와 저자가 갖고 있는 인식의 한계, 독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적 한계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하느님은 그들의 눈높이에서 말씀하셔야 했고, 그것을 시작으로 그들을 조금씩 성장시켜 나갔다. 구약의 이야기엔 천년 이상의 역사가 담겨있다. 그 시간의 흐름과 변화를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천년의 역사 안에서 백성들의 눈높이에 따라 당신을 조금씩 계시해 주시던 하느님께서는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의 계시를 완성하신다. 하느님 당신이 누구이신지, 어떤 분이신지, 당신이 이 백성들에게 진정으로 하고자 하셨던 말씀이 어떤 것이었는지 이제서야 감추지 않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복음을 열쇠로 구약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2021년 5월 23일 성령 강림 대축일 원주주보 들빛 3면, 정남진 안드레아 신부(용소막 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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