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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성경 이야기: 홍수, 그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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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1-07-19 조회수4,094 추천수0

[성경 이야기] 홍수, 그다음…

 

 

노아는 동시대 사람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의로움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뛰어난 믿음과 삶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는 못했습니다. 노아가 몇 년에 걸쳐 방주를 건축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규모를 보아 분명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노아의 이웃들 중에는 그 누구도 그가 하는 일이나 하느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누군가 방주에 태워주기를 청했더라면 노아는 분명 그를 방주에 데리고 들어갔을 텐데도 말입니다.

 

시대의 표징을 읽은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운명이 갈리게 됨을 성경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 하던 시절, 하느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이집트에서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파라오의 신하들 가운데 하느님의 말씀을 두려워했던 몇몇 이집트인들은 모세의 조언을 받아들여 우박이 내리기 전 자신들의 가축과 종들을 집 안으로 피신시켰습니다.(탈출 9,20) 라합 역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해 주신 많은 기적을 소문으로 듣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며 정탐꾼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녀의 세대 중에서 시대의 표징을 알아본 그녀와 그녀의 가족 만이 구원 받았습니다. 하지만 노아의 이웃 가운데에는 그 누구도 노아의 행동이나 또 그것과 연관된 하느님의 심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홍수가 끝난 후 하느님께서는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라.’는 명령을 반복하십니다.(창세 9,1.7) 그리고 성경은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노아의 후손이 번성 해나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모든 민족의 기원을 말하면서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펫의 족보는 이러하다.”며 홍수가 있은 뒤에 그들에게서 자식들이 태어났다고 언급합니다.(창세 10,1) 그리고 씨족과 언어, 지방과 민족에 따라 그들 후손들을 나열한 후, 마지막 구절에서도 “이것이 민족 계보에 따라 본 노아 자손들의 씨족들이다.”라는 반복으로 끝맺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있는 다양한 민족들이 모두 노아의 세 아들의 후손으로, 결국 인류가 ‘한 가족’, ‘한 형제’라는 것입니다.

 

원역사가 끝나가는 지점에 등장하는 바벨 탑 이야기는 언어의 혼란과 사람들의 흩어짐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창세 11,1-9) 하지만 바벨 탑 이야기는 단어가 갖는 원래 의미(혼란, 분열)와 정반대로 ‘단일성’ 내지 ‘통일성’에서 출발합니다. 이 이야기에 앞서 나오는 민족들의 기원에서 모두가 ‘한 가족’, ‘한 형제’라는 ‘단일성’이 돋보이는 것처럼, 바벨탑 이야기에서는 하나의 ‘언어’가 부각됩니다. ‘같은 내용의 말’, ‘하나의 입술’이라는 단어로 사람들이 동일한 언어를 사용했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홍수 이후, ‘하나의 입술’을 지녔던 사람들은 이전보다 진보된 신기술을 개발합니다. 벽돌을 불에 구워내면 더 견고해진다는 것과 벽돌과 벽돌을 연결하는 접착제로 역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벽돌을 이용하여 과거의 어떤 건축물보다 쉽게 효율적으로 높은 구조물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신기술에 고무된 사람들이 상상력을 실현할 목적으로 ‘바벨 탑 프로젝트’를 구상해냈습니다.

 

전 인류의 ‘바벨 탑 프로젝트’ 사업은 크게 세 가지 목적을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첫째,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으며 셋째는 ‘자신들의 이름을 떨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을 대적하여 벌인 인류최초의 집단적 단체행동이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단일 언어와 통합의 상징물인 탑으로 그들의 잘못을 고발합니다. 인간이 쌓은 탑의 꼭대기가 구름에까지 도달했다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 극에 달했다는 말일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처럼 되고 싶었던 것처럼 탑 건축자들은 이제 하느님의 영역에 도전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자신들의 힘을 ‘성공의 상징’으로 극대화하려는 행동은 오만과 교만의 극치입니다.

 

그런데 바벨 탑 이야기는 정말 아이러니하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성경은 높고 높은 탑을 쌓고 뿌듯해하는 인간의 오만을 비꼬기라도 하듯이 ‘탑이 너무 작아서 하느님께서 그 탑을 보기 위해서 친히 아래로 내려오셔야 했다.’는 것 입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하늘을 찌를 듯 높아 보이는 그 탑이 하느님 입장에서는 볼품없이 작아서 하늘에서 내려오셔야만 보실 수 있다며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벨 탑 건축자들은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고자 했지만 그들의 이름은 세상 어디에서도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헛된 명예욕을 조롱하듯이 오히려 성공과 업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한 사람들의 흔적을 세심히 기록해 두었습니다.

 

바벨 탑의 언어가 지배하던 그 시기, 사람들은 서로 흩어지지 않기를 염원했습니다. 하지만 언어의 혼돈으로 서로 통교할 수 없게 되었고 급기야 사람들이 온 땅으로 흩어지는 분리의 결과가 생깁니다. 인간의 기술 문명과 도시 문명이 인간 서로의 결속을 다지기 보다는 오히려 바벨 탑 이야기에서처럼 분리와 분열을 낳았습니다. ‘하느님의 문’, 혹은 ‘하늘의 문’이라는 의미를 지닌 ‘바벨’은 성경 저자에 의하여 풍자화(parody)되어 히브리어 ‘발랄()’에서 유래 된 ‘혼란’, ‘혼잡’이라는 조롱 섞인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바벨 탑 이야기는 ‘하늘로 들어가는 길’과 ‘하느님께로 가는 문’은 인간이 스스로 개척할 수 없다는 교훈을 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늘나라로 가는 길과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오직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또 고백합니다.

 

[월간빛, 2021년 7월호, 임미숙 엘렉타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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