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신약 성경 다시 읽기: 기쁜 고통 - 베드로 1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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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1-07-19 | 조회수5,004 | 추천수0 | |
[신약 성경 다시 읽기] 기쁜 고통 - 베드로 1서
요즘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박해나 고통을 겪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그럼에도 신약 성경에는 고난의 메시아이신 예수님에 대한 묘사, 그리고 그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은총이고 행복이라는 신앙인의 간절한 증언들이 차고 넘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신앙이란 드라마 속 ‘클라이막스’라는 사실엔 이견이 없다. 실제의 삶과 괴리 된 신앙 속 박해와 고난의 가치가 행여 관념적으로 축조된 신앙의 배타적 지적 유희로 변질되어 있는 건 아닌지 다시 묻게 된다.
베드로 1서는 특별히 ‘고난’에 대해 많은 말을 남겼다. 베드로 1서가 언제 쓰여졌는지 따져 묻는 것은 대개 ‘고난’이란 단어를 염두에 두고 그리스도인에게 가해진 박해의 역사적 흔적을 더듬는 것이기도 했다. 64년간의 네로 황제의 박해부터 트라야누스 황제 때(97?117년)의 국지적 박해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들은 크고 작은 박해에 시달린 것도 사실이다. 다만 제국 차원에서 일어난 공식적인 박해는 2세기 중반에서야 시작되었다고 하니, 1세기 말경 쓰여진 베드로 1서가 말하는 박해나 고난은 신앙적 가치를 거부하는 세상의 조직화 된 박해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베드로 1서 1장 1절은 편지의 수신자를 나그네로 살아가는 이들로 제시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방인과 나그네로 사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1베드 2,11-12) ‘이방인’으로 번역된 ‘파로이코스(πάροικος)’는 시민권이 없는, 그래서 일상의 삶 안에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이들을 가리킨다. ‘나그네’로 번역된 ‘파레피데모스(παρεπίδημος)’는 본디 자신의 삶의 자리가 아닌 곳에 당분간 머무는 이들을 지칭한다. 신앙인의 삶이 나그네 살이라면 신앙인이 머물 본디 제 집은 어디일까. 베드로 1서는 단연코 예수님의 고난이라 역설한다.
베드로 1서의 박해나 고난은 예수님과 신앙인들이 만나는 내적 일치의 지점이자 신앙인이 제 정체성을 가다듬는 자리다.(2,19.20;3,14.17;4,1;5,10) 베드로 1서의 박해나 고난에 대한 이해는 일상 속 맞닥뜨리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펼쳐진다. 세상 삶이라는 게 늘 갈등과 다툼이 흐트러져 있는 것이라 다소 난해하고 힘겨운 삶의 족적을 남긴다. 간혹 세상에 지친 이들이 신앙 안에 위로받고 다시 힘내서 세상을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하기도 한다. 이런 생각은 대개 세상의 삶과 신앙의 삶을 이분법적으로 갈라놓는 위험을 내포한다. 예수님을 만나 기쁜 것과 세상을 살면서 아픈 것은 실은 하나다. 베드로 1서는 이를 ‘자유’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자유인으로서 행동하십시오. 그러나 자유를 악행의 구실로 삼지 말고, 하느님의 종으로서 행동하십시오.”(2,16) ‘자유’라는 단어 ‘엘레우테로스(έλεύθερος)’는 정치적 용어다. 그리스 문화 안에서 이른바 ‘민주적 사회 공동체’를 이루는 이유와 목적은 ‘자유’에 기반한다. ‘자유’는 정치적 공동체 안에 살아가는 시민의 기본 권리이자 존재의 이유가 된다. 베드로 1서는 자유를 ‘하느님의 종’이 마땅히 지녀야 할 삶의 자세로 인식한다. 달리 말하자면 세상살이를 하늘 나라의 시민으로 살겠노라 다짐하는 것이 신앙인으로서의 ‘자유’다.
자유의 구체적 삶은 이렇다. 모든 인간 제도에 복종하라(2,13), 착하고 너그러운 주인뿐 아니라 못된 주인에게도 복종하라(2,18),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하라(3,9)… 견디기 힘들고 지키기 힘든 가르침이다. 세상을 선악구도로, 신앙을 악과 불의에 배타적인 선과 정의의 실천적 삶으로 이해하는 이에겐 얼토당토 않은 가르침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건 어떤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창조주 하느님이 아니던가?” ‘창조주, 그러니까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자 목적이 되시는 분이 하느님이 아닌가’,하는 질문은 ‘우리를 모욕하거나 저주하는, 때론 해코지 하거나 겁박하는 이들에게조차 하느님은 창조주로 계시지 않는가’, 라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말하자면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을 근본으로 하는 것인데, 어떤 것은 하느님의 것이고 어떤 것은 하느님과 대립한다고 여기는 생각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고난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고난은 제거나 해소의 대상이 아니라 이 세상살이에 존재하는 한, 하느님 안에서 생각하고 고민해 봐야 할 문제다. 회피할 대상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 이해할 것인가가 고난을 직면한 신앙인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다. “그분께서는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당신 자신을 맡기셨습니다.”(2,23) 예수님은 모욕과 고난의 자리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전적인 의탁을 보여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 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1,13) ‘마음을 가다듬는다.’로 번역된 말을 직역하자면 ‘여러분의 생각의 허리를 묶다.’ 정도가 된다. ‘허리를 묶다.’라는 표현은 이집트 탈출의 마지막 밤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을 먹을 때는, 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둘러 먹어야 한다.”(탈출 12,11) 자유와 해방을 향한 첫걸음의 자리를 떠올리게 하는 ‘허리를 묶다.’라는 표현은 종말을 향한 신앙인들이 진정으로 자유롭게 살아갈 태세를 갖추는 데 기여한다. 고난의 자리는 진정한 자유를 향한 첫걸음의 자리고, 그 첫걸음은 마지막 종착지인 예수님과의 내면적 일치로 이어진다.
요즘 들어 부쩍 사람들이 고단해 보인다. 사는 게 힘들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 역시 견뎌 내야 하고 견뎌 내다 보면 언젠가 희망찬 날이 올것이라고 말하는 신앙의 강변은 잔혹하거나 비겁한 변명으로 들릴 때도 있다. 우리 신앙인은 고난과 고통을 제 운명인양 움켜쥐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이고 고난과 고통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줍니다. 불평하지 말고 서로 잘 대접하십시오.”(4,8-9) 답은 늘 한결같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 고난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고난의 자리에 울고 좌절하고 낙담하는 이들을 그냥 보고 넘기지 못한다. 제 자유로, 제 권리로, 제 의무로 신앙인은 사랑이란 걸 실천하는 이들이다. 고난을 움켜쥐는 신앙인은 고난이란 자리에서 놀랍게도 예수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만난다. 그래서 고난은 아프지만 또한 가슴 벅찬 기쁨과 보람으로 남게 된다. 세상은 그런 신앙인에게서 늘 빛과 소금을 맛보고 발견한다.
[월간빛, 2021년 7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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