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성경 인물 이야기: 히즈키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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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3-01-22 | 조회수1,619 | 추천수0 | |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히즈키야 (1)
이제 히즈키야 임금에 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그런데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히즈키야에 대한 기록은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열왕기 하권, 역대기 하권, 이사야 예언서에 들어있는데, 이 기록들은 상충하고 있으며, 각 권 내의 기록도 일관성이 부족합니다. 따라서 이 기록들의 역사적 사실성을 둘러싼 학자들의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역사적 사실의 재구성에 지나치게 몰두하지 않을 것이며, 히즈키야의 인물됨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쪽으로 이야기를 풀어가 볼 생각입니다.
‘주님께서 힘을 주신다’라는 뜻의 히즈키야는 남 유다 왕국의 13번째 임금입니다. 그의 재위 기간은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2열왕 18,1에 따르면, 히즈키야는 북 이스라엘 왕국의 호세아 임금의 통치 3년째 남 유다 임금이 됩니다. 이때는 기원전 726년으로 그의 재위 기간은 697년까지입니다. 하지만 2열왕 18,13은 히즈키야 임금 제 14년에 산헤립이 유다를 침략했다고 하는데, 이때는 기원전 701년입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히즈키야의 재위 기간은 기원전 715-686년이 됩니다. 성경학자들은 대체로 후자의 정확성을 더 신뢰하는 편입니다. 어쨌든, 이 시기는 역사상 첫 번째 제국인 아시리아가 북 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하고 남 유다 왕국까지 노리던 위기의 때입니다.
히즈키야는 무엇보다 먼저 우상숭배를 뿌리 뽑고자 했습니다. 성경은 ‘없애다’, ‘부수다’, ‘자르다’, ‘조각내다’ 등의 격렬한 단어들을 연이어 사용함으로써 히즈키야의 강한 의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2열왕 18,4).
우상숭배의 척결을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지방 성소들을 없애고 예루살렘 성전을 유일한 성소로 자리매김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소의 중앙집중화가 필요했던 까닭은 본디 지방 성소들 또한 하느님을 위한 것이었지만, 어느새 임금부터 나서서 열성적으로 우상숭배를 하는 장소로 변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아하즈)는 산당과 언덕과 온갖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물을 바치고 향을 피웠다. (2열왕 16,4) 물론 예루살렘 성전 또한 우상숭배로 얼룩져 있었지만, 온 나라에 흩어져 있는 성소들을 모두 관리하는 것보다는 하나의 성소를 정화하는 일이 더 쉬웠을 것입니다. [2023년 1월 22일(가해) 설(하느님의 말씀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히즈키야 (2)
히즈키야의 종교개혁은 또한 신명기의 정신을 따르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신명 12장은 4번이나 반복해서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하나의 성소에서만 예배를 드릴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편은 그 성소가 바로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정녕 주님께서는 시온을 선택하시고 당신 처소로 원하셨네.(시편 132,13)
그리고 이 종교개혁에는 갈등으로 인해 남과 북으로 갈라졌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의 성소에서 같은 예배를 드림으로써 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재확립하도록 하는 목적도 있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히즈키야의 종교개혁을 시대적 상황이 돕습니다. 예루살렘이 나라 안에 견줄만한 도시가 없는 유일무이한 도성이 되어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아버지 아하즈 임금 때부터 아시리아에 바칠 막대한 조공을 준비하느라 온 나라의 자원이 예루살렘에 모이고 있었습니다. 또한,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북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 이후 유입된 유민으로 인해 예루살렘의 인구수와 도시의 규모가 10배가량 증가한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은 단기간에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아하즈 시대에 북 이스라엘 왕국과 아람 왕국의 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도 예루살렘은 화를 면했기에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 도시라는 인식이 퍼져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히즈키야의 종교개혁은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시작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열왕기와 역대기 모두 이 개혁의 완성은 히즈키야의 증손자인 요시야 임금 때 이루어진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전 내에 있던 구리 뱀도 없앴습니다: 모세가 만든 구리 뱀을 조각내었다. 느후스탄이라고 불리던 그 구리 뱀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때까지도 향을 피웠기 때문이다.(2열왕 18,4) 느후스탄은 구리를 뜻하는 나하쉬와 뱀을 의미하는 느호쉐트의 합성어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본디 우상이 아니라 민수 21장에 나오는 것으로 하느님의 명에 따라 백성을 구하기 위해 모세가 만든 것입니다(민수 21장).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하느님의 권능을 떠올리게 하는 도구였던 구리 뱀이 어느새 하나의 신(우상)으로 변질하였기에 파괴한 것입니다. [2023년 1월 29일(가해)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히즈키야 (3)
히즈키야가 종교개혁과 더불어 사회적 통합과 경제적 번영을 추구하고 있던 때, 아시리아의 산헤립 임금이 기원전 701년에 유다를 침략합니다. 이유는 히즈키야가 이집트를 등에 업고 팔레스티나의 암몬, 모압, 에돔 등의 여러 나라와 반아시리아 동맹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히즈키야가 아시리아에 맞서려 한 이유를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산헤립(기원전 704-681)이 아시리아의 새로운 임금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내 사정이 어수선하고, 때맞춰 바빌로니아가 반기를 든 것을 보고 유다 또한 아시리아의 압박에서 벗어날 좋은 기회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산헤립은 탁월한 통치자이자 유능한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는 국내의 혼란을 빠르게 수습하고 바빌로니아의 반란을 진압합니다. 그리고 유다로 쳐들어옵니다.
히즈키야는 아시리아군의 침략을 예상하고 나름대로 맞설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부분은 2가지인데, 첫째는 예루살렘에 성벽을 이중으로 건설하여 견고한 요새로 만든 것입니다. 둘째는, 안정적인 물 공급 체계를 갖춘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유일한 수원은 기혼 샘인데, 이 샘은 성 밖 키드론 골짜기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아시리아의 군대에 포위되면 식수를 구하지 못할 상황이었죠. 히즈키야는 이를 대비해 성 내에 저수지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유명한 실로암 못입니다.
기혼 샘의 물줄기를 막고 그 물을 530m의 암석을 파서 만든 지하수로를 통해 성안으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이 수로를 히즈키야 터널이라 부릅니다. 히즈키야 터널은 세계 수도 역사의 기원인 로마 시대 이전까지는 가장 획기적인 수로로 평가받습니다. 이전까지의 수로가 단순히 물을 길어 올리는 수직 통로였다면, 히즈키야 터널은 수평으로 많은 양의 물을 원활하게 저수지까지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터널의 시작과 끝부분의 높이를 30㎝ 차이가 나게 하여 물이 긴 거리를 완만한 경사로 흐르게 한 점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1880년에 발굴된 실로암 비문을 통해 더 놀라운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터널을 한쪽에서 쭉 파 들어간 것이 아니라, 양쪽에서 동시에 파서 가운데서 만난 것입니다. 시작 지점에서 한치만 틀려도 절대로 만날 수가 없었을 것인데, 오늘날처럼 토목 건축학이 발달하지 않았고 과학적 장비도 없었던 시대임을 생각하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2023년 2월 5일(가해) 연중 제5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히즈키야 (4)
예상과 달리 아시리아군의 말발굽이 단숨에 유다 전역을 유린하고 가장 강력한 요새였던 라키스까지 점령당하자 공포에 사로잡힌 히즈키야는 무조건적 항복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성전의 금까지 긁어모아 조공을 바침으로써 나라의 멸망을 피하려 합니다. 위기를 모면하려고 성전의 재물에까지 손을 댔다는 것은 히즈키야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약했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히즈키야의 외교적 노력에도 아시리아는 만족을 몰랐고, 하느님까지 조롱을 받으시게 됩니다:
“뭇 민족의 신들 가운데 누가 제 나라를 아시리아 임금의 손에서 구해 낸 적이 있더냐? 하맛과 아르팟의 신들은 어디에 있느냐? 스파르와임과 헤나와 아와의 신들은 어디에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구해 냈더냐? 이 나라들의 모든 신 가운데 누가 자기 나라를 내 손에서 구해 낸 적이 있기에, 주님이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구해 낼 수 있다는 말이냐?”(2열왕 18,33-35)
아시리아 연대기에 유다 침략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이에 따르면 산헤립은 유다의 성 46개와 많은 마을을 점령하고 200,150명의 포로를 사로잡았으며 수많은 전리품을 획득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새장 안에 새를 가두듯 히즈키야를 예루살렘에 고립시켰다고 합니다.
물론 이 기록은 아시리아의 입장에서 쓴 것이기에 곧이곧대로 다 믿기는 힘듭니다만(예를 들면, 여러 학자는 포로의 수가 기록의 1/10 정도였으리라고 추정합니다), 고고학적 증거들은 아시리아가 유다를 얼마나 처참하고 광범위하게 짓밟았는지 보여 줍니다. 고고학자들은 최소한 354개의 유다인 거주지에서 전쟁의 흔적을 발견했는데, 어찌나 철저히 파괴했던지 한 세기가 흐른 뒤에도 39개만이 재건되었음을 확인했습니다.
아시리아군은 진군을 계속해 결국 수도 예루살렘까지 포위합니다. 예루살렘을 단숨에 함락시키지 못하고 포위만 한 것은 이중 성벽을 갖춘 견고한 요새였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최선일 뿐 예루살렘은 아시리아군을 상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고사할 처지였습니다. [2023년 2월 12일(가해) 연중 제6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히즈키야 (5)
히즈키야는 옷을 찢고 자루 옷을 입습니다(2열왕 19,1). 이 행동은 히즈키야의 비탄과 참회를 드러냅니다. 이집트와 동맹국들의 무력과 자신의 지혜를 믿었던 히즈키야는 이제 하느님을 찾습니다. 어떤 인간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때에 믿고 의지할 분은 하느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여기서 히즈키야의 위대함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직간접 경험을 통해 진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즈키야는 하느님께 구원을 청합니다(2열왕 19,19). 우리말 성경에 구원으로 번역된 동사 야샤는 강력한 개입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구원의 의미로 자주 사용되는 나스탈보다 훨씬 강한 어감을 가진 단어죠.
히즈키야의 기도대로 하느님께서는 강력하게 개입하십니다. 세계 최강의 아시리아 군대를 하룻밤 새 무력화하심으로써 당신이 ‘홀로 살아 계신 하느님’(2열왕 19,16)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런 다음 주님의 천사가 나아가 아시리아 진영에서 십팔만 오천 명을 쳤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들이 모두 죽어 주검뿐이었다.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은 그곳을 떠나 되돌아가서 니네베에 머물렀다.(2열왕 19,35-36)
이 사건은 또 다른 밤에 일어난 한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날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해주셨고, 이스라엘은 바닷가에 죽어 있는 이집트인들을 보게 되었다.(탈출 14,30) 출애굽 사건에 비견할만하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그 많은 아시리아 군사들을 죽이셨는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집트인들이 이 아시리아의 패배 이야기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신이 쥐 떼를 아시리아 진영에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을 토대로 아시리아인들의 죽음의 이유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쥐 떼가 호흡기를 통해 빠른 속도로 전염되는 치명적인 흑사병을 퍼뜨린 것이 아시리아 군대 몰살의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2023년 2월 19일(가해) 연중 제7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함신부가 들려주는 성경 인물 이야기] 히즈키야 (6)
히즈키야 임금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신앙 또한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그 무렵에 히즈키야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가 주님께 기도하자, 주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시고 표징을 주셨다. 그러나 마음이 교만해진 히즈키야는 받은 은혜에 보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의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렸다.(2역대 32,24-25)
이와 같은 기록은 열왕기에는 아예 나오지 않으며, 이사야서는 오히려 병이 나은 히즈키야가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싣고 있습니다. 히즈키야의 평판을 해치는 것을 원치 않는 듯합니다. 하지만 역대기는 비록 아주 짧고 완곡하게나마 히즈키야의 잘못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시리아의 위협과 죽을병에서 벗어나면서, 어느 것 하나 제힘으로 이룬 것이 없음에도, 히즈키야는 하느님 앞에서 교만해지고 맙니다. 이미 모세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큰 성공을 연이어 맛보게 되면 교만에 빠지기에 십상인 것이죠.
그렇지만 히즈키야의 삶은 그의 돌이킬 수 없는 타락으로 마무리되지 않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히즈키야는 마음이 교만하였던 것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주민들과 함께 자신을 낮추었다.(2역대 32,26)
성경은 히즈키야를 유능하고 신실한 왕으로 그리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특히 그를 한 문장으로 평가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유다의 모든 임금 가운데 그만 한 임금이 없었고, 그보다 앞서 있던 임금들 가운데에서도 그만 한 임금이 없었다.(2열왕 18,5)
히즈키야에게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임금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이죠. 유다 전승에서 히즈키야의 위상은 더 높습니다. 랍비들은 이사야의 메시아에 대한 예언 전부가 예수가 아닌 히즈키야를 가리키고 있다고 할 정도로 그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았듯이, 히즈키야는 흠도 티도 없는 인물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의 삶에 불신도 있고, 교만도 있음을 솔직히 말합니다. 하지만 히즈키야는 잘못을 회개할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그의 성왕(聖王) 호칭은 죄를 짓지 않음으로써가 아니라 죄를 회개함으로써 얻은 것입니다. [2023년 2월 26일(가해) 사순 제1주일 가톨릭안동 3면, 함원식 이사야 신부(갈전마티아 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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