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하느님 뭐라꼬예?: 판관들을 통해 구원하시는 하느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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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3-06-06 | 조회수1,292 | 추천수0 | |
[하느님 뭐라꼬예?] 판관들을 통해 구원하시는 하느님
판관 -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도구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로 인해 생긴 전리품을 하느님께 완전히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지파들이 가나안 사람들과 섞여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따라 이방의 신들을 섬겨 하느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고, 그 결과 하느님의 부재하심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전쟁을 치러도 그 전처럼 전쟁에서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승리하기는커녕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재앙으로 심한 곤경에 빠지기 일쑤였지요.
이러한 가운데서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판관들을 보내주시어 구원의 손길을 펼치신 것이지요.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 그들이지만 또 세월이 흘러가면 옛일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판관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아닌 다른 신들을 따르며 타락하였고, 판관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조상보다도 더한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과 탈선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그 백성을 선택하신 당신의 마음을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선하신 하느님의 항구한 의지를 드러내는 징표가 바로 판관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곤경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판관들을 보내주시고, 판관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통해 당신의 구원하시는 힘을 계속 펼치신 것이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판관이 자신들 곁을 떠나면 또다시 타락하여 악한 행실을 일삼고 이방의 신들을 숭배하는 잘못을 반복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판관을 보내주시어 당신 백성을 구하시는 하느님의 은혜도 멈출 줄을 몰랐습니다.
판관의 역할은 하느님에게서 파견받아 곤경에 빠진 이들을 구해주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지금 어려움에 처해 계신가요? 힘을 내십시오. 우리에게는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든든한 판관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님이시지요. 그분은 교회와 성사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고, 참된 삶을 위한 은총을 베푸시는 판관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영이시며 우리 안에서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가 ‘내 인생의 판관’을 잘 알아보고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판관이신 예수 주님, 어두움 속에 있는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곤궁에 빠진 저를 구해주소서!”
약속의 땅에 이민족이 남겨진 이유
그러면 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은혜를 입고도 반복해서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일까요? 판관기에 의하면,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들을 약속의 땅에 남겨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판관기는 완전한 봉헌을 이행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그 일차적인 잘못을 찾고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그러한 잘못마저 하느님의 뜻에 의한 것으로 고찰합니다. 즉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에 진노하시고도 다른 민족들을 약속의 땅에서 더 이상 쫓아내지 않고 그냥 두고 계시는 까닭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명하신 길을 제대로 따라 걷는지 시험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지요.
“이는 이스라엘이 저희 조상들처럼 주님의 길을 명심하여 따라 걷는지 따라 걷지 않는지, 그 민족들을 통하여 시험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민족들을 곧바로 쫓아내지 않고 남겨 두셨으며, 그들을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주지 않으셨다.”(판관 2,22-23)
“이는 오로지 … 이 민족들(가나안족, 시돈족, 히위족)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시험해 보시려는 것이었다. 곧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 조상들에게 명령하신 계명에 순종하는지를 알아보시려는 것이었다.”(판관 3,4)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려는 하느님의 뜻대로’ 그들 가운데 이민족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는 판관기의 해석입니다. 하지만 더 올바른 해석은 하느님께서 가나안족들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용인하셨고, 또 그러한 상황을 이스라엘 백성의 시험대로 활용하셨다는 것 아닐까요? 즉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행동한 것이고, 그러한 행동이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시험으로 이어졌다는 것이지요. 아무튼 판관기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러한 시험에 어떤 답안을 제출하느냐에 따라 하느님으로부터 축복이나 징벌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삶에도 수많은 유혹이 함께합니다. 때로는 그 유혹을 이겨내는 일이 너무나 힘들 수도 있겠습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매일 기도하는 우리들이지만 유혹과 완전히 무관한 삶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원망하는 자세로는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이 원하지 않은 유혹에 직면할 때, 차라리 그러한 유혹이 하느님께서 나를 시험하시기 위해 마련해 놓으신 것으로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시험에 임하는 나에게 그 시험을 통과할 힘과 지혜도 주실 것입니다. 그 시험을 어떻게 통과하느냐에 따라 나에게 주어질 하느님의 축복을 헤아리고 희망하며 용기를 냅시다!
여판관 ‘드보라’와 장수 ‘바락’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가나안인들의 신들을 섬기며 악한 행실을 일삼자 그들을 가나안 족속들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보시고 구원자 판관들을 세우시어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판관기는 그렇게 하느님께서 세우신 12명의 판관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먼저 (3장에서) ‘오트니엘’, ‘에훗’, ‘삼가르’에 대해 서술하고, 이어 (4장에서) ‘판관 드보라와 그의 장수 바락’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여성으로서 판관의 역할을 수행한 예언자 드보라는 프랑스의 ‘잔 다르크’를 떠올리게 합니다.
에훗의 사후, 다시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일삼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느님의 벌하심으로) 가나안 ‘하초르’의 임금 ‘야빈’의 억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의 판관은 ‘라피돗’의 아내이자 여예언자였던 ‘드보라’였는데, 그는 남탈리 케데스의 ‘바락’을 불러 그에게 자신이 받은 하느님의 명령을 전하였습니다. “자, 납탈리의 자손들과 즈불룬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만 명을 데리고 타로르 산으로 행군하여라. 그러면 내가 야빈의 군대 장수 시스라와 그의 병거대와 그의 무리를 키손천으로 끌어내어, 네 손에 넘겨주겠다.”(판관 4,6-7) 하지만 바락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드보라가 함께 가지 않으면 자신도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에 드보라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함께 전장에 나섭니다. “내가 반드시 그대와 함께 가겠소. 그러나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그대에게 영예가 돌아가지 않을 것이오. 주님께서 시스라를 한 여자의 손에 팔아넘기실 것이오.”(판관 4,9)
하느님께서는 철 병거만 9백 대를 가졌던 야빈의 군대 장수 시스라와 그의 전 군대를 혼란에 빠뜨리시어 멸하셨는데, 시스라 혼자만 살아남아 (하초르와 우호적 관계에 있던) 카인족 헤베르의 천막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하지만 (시스라를 거짓으로 안심시킨) 헤베르의 아내 ‘야엘’은 잠든 시스라의 머리에 말뚝을 박아 죽인 후 그 시신을 바락에게 넘겼습니다. 이렇게 하여 드보라의 예언대로 적 군대의 장군 시스라를 없애는 영예는 바락이 아니라 야엘이라는 한 여자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부르짖음에 하느님께서 응답하셨으니,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이 판관 드보라를 통해 펼쳐졌고, 더구나 연약한 여인을 통해서 그 승리는 절정에 달하였던 것입니다.
14-15세기에 프랑스 국왕과 잉글랜드 국왕 사이에 영토분쟁이 한창이었습니다. 1337년에 시작하여 1453년에 종결되었던 소위 ‘백년전쟁’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그때 한 소녀의 지대한 활약이 있었습니다. 프랑스가 승리하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던 그 여인은 바로 ‘잔 다르크’(Jeanne d’Arc)였지요. 적의 포로가 되어 이단 재판을 받아야 했던 잔 다르크는 심문을 맡은 주교가 “어떤 상황이건 그대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고 생각하느냐?” 하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만약 제가 그분의 은총을 받지 못했다면 하느님께서 제게 은총을 베풀어주시기를, 만약 제가 은총을 받고 있다면 하느님께서 제게 계속해서 은총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의 은총 하에 없다는 것을 제가 알았다면, 저는 세상의 가장 슬픈 존재입니다.” 지혜로웠던 잔 다르크는 자신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고 하면 교만하다고, 또 받지 않았다고 하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문제 삼을 줄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게 바로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십시오! 하느님의 은총에 놀라워하십시오!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십시오!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십시오! 어려움 중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빌어주십시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6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무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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