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미 예수님
묵상 좋아하시는 분께서 올려주신 글인데, 세 번을 읽어 보아도 전혀 도움되는 내용 없는 묵상글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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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일방적으로 가르치려하시면 어떤 때는 잔소리로 들려 제자들이 수강 신청을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 억박지르기 혹은 협박하시는데..., 이미 여러번 말씀드렸지만, "전달 행위"과 "가르치는 것"은 제발 좀 제대로 구분하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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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 ''천국''등은 우리와 같은 평신도가 논하기에는 너무 어렵고 복잡하다고 한번 이야기했습니다. 첨부된 저의 글을 한번 참조해 보시죠.]
<----- 영어 자료들만 보면 너무나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인데 무슨 말씀이신지요? 국내의 평신도들은 계속 모르고 머물러 있어라는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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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믿는 사람치고 고집이 없는 사람 있다면 나와 보라 해 보시죠. 다들 고집 있습니다. 그 고집이 지금이나마 믿음의 사람 구실을 하도록 하는 것 아닙니까?]
<----- 자신의 고집의 근거라고 말씀하신 믿음이,
(1) 자신의 개인적 믿음(belief, 신념)인지요, 아니면
(2) 교회의 믿음(faith)인지요???
가톨릭 신자라면 이들 두 믿음들의 차이점은 제대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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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상공론''은 좀 지나친 저의 속견인 점 사과드립니다.]
<----- 기왕에 사과를 하시는 김에, 다음의 주장에 대하여서도 사과를 하시죠. 애초에 다음과 같은 억지 주장을 하셨으니, ''탁상공론''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아닐까요?
[이곳은 게시 내용처럼 회원 누구나가 이용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묻고 답하는 과정에도 어느 정도 룰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성경 본문의 해석과 관련하여, 제가 제시하였던 제안의 글은 읽어 보셨는지요? 혹시 읽지 않으셨다면, 여기를 클릭하여 다들 꼭 읽어 보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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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경 번역 오류''니 하는 심한 표현은 감히 우리 평신도가 야기하는 것은 해도 해도 너무 과한 건 만은 저버릴 수가 없군요. ]
<----- 제가 알고 지내는 일부 신부님들의 견해와는 너무 다릅니다. 확실한 근거 자료들의 제시와 함께 제대로 지적해 주어서 고맙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우리말로 번역이 된 교회의 핵심 문헌들 중에 심각한 번역 오류가 있을 경우에는, 많이 부족한 저에게, 확실한 근거 자료들의 제시와 함께, 계속 지적해 달라는 격려(?)의 말씀을 주시는 신부님들에 대하여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교회의 핵심 문헌들의 우리말 번역 오류에 대한 지적을 드리기 시작한 것은 이미 상당히 되었으며, 앞으로도 계속할 것입니다. 이는 "개념 전달"에 있어 어디에서 어떻게 막혀서, 국내의 교우님들이 신앙의 유산에 근거한 교황님과 교황청 유관 부서의 가르침과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다들 우선적으로 제대로 알아야, 각자의 신앙생활 안에서, 나름대로의 개선이 가능하기 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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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발 천국이니 하느님 나라이니 그 말의 문법적인 해석은 이제 그만합시다. 예수님의 설교를 들어시면 그분 자신에 관한 것인지, 그분 자신에 반대되는 것인지 다 알 수 있는 우리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분 나라에 관한 것인지, 그분 나라에 반대되는 것인지 다 ''척'' 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 스스로의 느낌만으로도 그만일 것을 굳이 더 안다면서 나부랑인다고 하느님 사랑 더 받으시리라 여기십니까? 하느님께서 ''내와 내 나라''갖고 따지기만 하라고 일러 주십디까! 사랑은 겸손이요 자기 낮춤입니다. 그리고 남에 대한 절대적인 배려입니다. 이게 희생 아닙니까! 이게 사랑과 용서 아닐까요! 이게 믿는 이의 자세라고 저는 교리반에서 배웠습니다. 그리고 교도권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믿는 이의 첫째 의무라고 다짐하면서 세례받았습니다. ^^+]
<----- 그동안의 자신의 개인적 견해/주장을 정당화하려고 참 좋은 가르침들을 이렇게 들고 나오시는군요...
홀수해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제1독서인 로마서 1,1-7의 입문으로, 교도권의 가르침에 매우 충실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에서, "국내의 가톨릭 신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천국"과는 다른, "예수님께서 공생활 첫 말씀으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하늘 나라)"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읽어 보시고,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이 스스로의 느낌만으로도 그만일 것을 굳이 더 안다면서 나부랑인다고 하느님 사랑 더 받으시리라 여기십니까?]
<----- 기껏해야, 이렇게 전달해 드리는 종류의 보잘것 없고 하찮은 역할을 하고 있는 저를 두고서 이런 모함을 하시는지요? 어휘의 선택에 있어, 억지도 정도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번 글과 같은 종류의, 그리고 아무런 내용없는, 억지 주장은 더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적으로 꼭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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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이의 첫째 의무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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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박윤식(big-llight) |
번 호 |
4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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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0-10-15 오전 12:16: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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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순태님의 아래 질문에 대한 소생의 답변입니다.
1. "약은 집사의 비유"와 관련하여 제가 올려드린 "번역 오류" 지적의 글들을 다시 한 번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형제님께 드린 글이 아닌데, 형제님께서 굳이 나셨던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번역 오류를 바로 잡는 권한이 평신자에게 없다고 하여, 심각하게 파악되고 있는 번역 오류의 지적글을 교우님들께 게시글의 형태로 보고 할 수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입니다.
답변]''성경 번역의 오류''라는 공개적인 제언은 다른 인터넷 상으로는 가능하나, 이곳 ''굿뉴스''의 ''묻고 답하기''코너에는 적절치 않는 방법입니다. 이곳 홈페이지의 주인장이 누구입니까? 성경을 먹고 사시는 분 아닙니까? 그분들 우리가 보호하고 힘을 담아 주어야 합니다. 가사 조금은 따질 만한 것이라도 면전에서만은 정말 자제해야 할 우리 평신도입니다. 아무리 100% 틀렸다 할지라도요. 그렇지만 가사 그렇다할지라도 그 제기 방법은 참 많다고 여겨집니다. 연구해 보시죠. 본당 신부님을 통해서라도 의견 개진은 참 많다 생각됩니다. 그리고 제가 왜 나서느냐고요? 나서는 게 아니고 소순태 교수님의 많은 연구 내용을 계속 접하기 위해섭니다. 너무 일방적으로 가르치려하시면 어떤 때는 잔소리로 들려 제자들이 수강 신청을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2. 예를 들어, 일전에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늘나라"와 관련하여 제가 2009년 10월 21일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번역 오류 지적들을 할 때에는, 왜 가만히 계셨는지요?
답변]저는 그 때에 ''위대한 침묵''이란 영화를 봤습니다. ''침묵''도 ''참여''일 것 같아서요. 그리고 저는 침묵만이 능사가 아닐 것 같아 할 말은 했습니다. ''하늘나라'', ''천국''등은 우리와 같은 평신도가 논하기에는 너무 어렵고 복잡하다고 한번 이야기했습니다. 첨부된 저의 글을 한번 참조해 보시죠.
3. 사뭇 교도권에 준하는 ''성경 번역 오류''등에 관한 탁상공론에 휘말리게 된 점] <----- 고집이 대단히 센 형제님의 판단과 기준에 의하면 탁상공론이겠지요.
답변]하느님을 믿는 사람치고 고집이 없는 사람 있다면 나와 보라 해 보시죠. 다들 고집 있습니다. 그 고집이 지금이나마 믿음의 사람 구실을 하도록 하는 것 아닙니까? ''탁상공론''은 좀 지나친 저의 속견인 점 사과드립니다. 그러나 ''성경 번역 오류''니 하는 심한 표현은 감히 우리 평신도가 야기하는 것은 해도 해도 너무 과한 건 만은 저버릴 수가 없군요.
결론]소순태 교수님! 성경만큼 쉬운 게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쉽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쉬운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어렵게 생각하면 정말 어렵구요. 그렇지만 정말 쉽기에 베스트 셀라 아닙니까! 저는 쉽게 봅니다. 그리고 질문하신 "‘위대한 침묵’ 영화를 보고서!"와 이곳 ''묻고 답하기''에 게시된 4434번의 글, ''그건 몰라도 되며,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해서!''라는 제 의견을 참조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첨부 1] ‘위대한 침묵’ 영화를 보고서!
해발 1,300m 알프스의 깊은 계곡, 그곳에 누구도 쉬이 들여다보지 못했던 고요함의 세계가 있다. 해가 뜨고 달이 지고 별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는 계절 속에서 영원을 간직한 공간, 그들만이 그들의 시간을 만들어가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저 조용히 그 일상의 깊이를 바라본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카르투지오 수도원’의 일상을 담은 침묵으로 일관된 긴 여행을 그린 다큐멘트[기록 영화]이다.
나만의 작은 결론은 이것이다. 율법의 선조 ‘모세’에게도 예언자의 대표 ‘엘리야’에게도 결코 모습을 보여 주시지 않는 그 주님을 침묵으로 체험하는 그분들의 그 ‘위대한 침묵’을 나 같은 세속인이 어떻게 이해할 수가! 그 ‘위대한 침묵’을 위대한 침묵으로 내버려 둘 수 없는 나는, ‘침묵’할 수 없는 세속의 사람이라고 자인하는 것만이 최상의 ‘침묵’이라고.
사실 이 수도회는 천여 년 전에 설립된 이래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일체 외부 방문객의 출입이 단절되어 가장 엄격하기로 유명하며, 경제적으로 자체 내에서의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는 곳이다.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 19개의 수도원에 총 370명의 수사가 있기도 하다.
침묵을 어떻게 담을 것인가? 1984년 처음 이 ‘침묵’을 주제로 작품을 구상했던 독일 출신 ‘필립 그로닝’감독은 ‘영화’라는 매체가 허용하는 ‘언어’를 최대한 배제한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이에 침묵 수행을 하는 이 수도회가 적격이라 생각한 그는 신청 후 19년이란 오랜 세월 후에 촬영의 승인을 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그들과 6개월의 생활을 함께하면서 수사님들처럼 독방에서 묵었다. 은둔 생활을 통해 그들과의 ‘침묵’이라는 기막힌 생활을 체험했다. 홀로 그곳에서 촬영했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녹음했고 편집도 했다. 이 모든 작업을 혼자 해낸 다양한 재능의 소유자인 그는 의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영화감독이다.
위대한 침묵, 어떤 침묵이기에 위대한 것일까? 아무리 믿음의 사람이라지만 ‘믿음의 장소’에서 행해지는 그 ‘침묵’은 관심의 대상에서 허탈감으로 빠져들곤 했다. 그건 침묵이 아니고 답답함이었다. 고통이었다. ‘행여나’하는 맘이 ‘역시나?’로 계속 이어지는 정말 답답함으로 빠져드는 몸부림이었다. 이곳저곳에서 몇 분은 끝내 견디지 못해 슬그머니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신부 수녀님들과 함께하는 영화인지라 그래도 견뎌보지만, ‘행여나’ 하는 그 맘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기다림’이다. 그 기다림 속에 코 고는 소리가 이곳저곳으로 퍼지고 그 소리에 나도 가끔은 잠결에 빠지기도 한다. 한번이 아니고 몇 번이나 빠졌다. 장장 162분, 3시간 가까이 그 침묵의 고통은 계속되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자네를 얼마간 감시하고 너를 내 보낼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네는 이곳 ‘룰’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고, 이 기간 언제라도 어렵다면 나간다고 ‘이야기’할 권한도 가진다.” 원장 수사님[?]이신 분이 새로 들어온 수사님께 들려 준 이 이야기만이 영화가 끝나고 뚜렷이 기억된다. 알프스의 산장에 눈이 내리고 꽃이 피고 더위가 찾아오고 낙엽이 나부낀다. 침묵 속으로 시간은 자꾸만 가고 몇 자 성경의 자막만이 기억도 없이 스쳐간다. 성경 구절이라고는 열왕기에 나오는 것이 전부이다.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세속의 믿는 이로 이 영화를 보고서 이처럼 후회되는 영화는 없었다고나 할까. 정말 견디기가 어려운 고통이었다. 말이 없는 곳, 소리가 들리지 않는 그곳의 고요함을 견디어낸다는 건 정말 어려웠다. 그 침묵은 침묵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위대함일까! 주님이 함께해 주시는 그 침묵은 시간이 갈수록 나를 이렇게 또 다른 침묵으로 빠지게 한다. 하느님이 지금 이 시각 나에게 주는 침묵을 생각해 본다. 무언가 한마디 나를 일깨워 줄 말 한마디를 그분은 침묵으로 일관하신다. 위대한 하느님이시다. 침묵하시는 주님이시다.
이 영화를 보신 분 일부는 이처럼 긴 참을 수 없는 침묵에 지겨워서라도 후회할 것이다. ‘이것도 영화야!’라고 하시면서. 그러나 또 어떤 이는 ‘그 영화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만 더 꼭 보았어야 했는데!’ 하실 분도 계실 것이다. 그리고 이 글만 읽는 분 일부는 그 ‘위대한 침묵’을 경험하지 못한 아쉬움으로 가득할 것이다.
[첨부 2]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어떤 분이 ''대유법''을 모르면서 엉뚱한 주장만 한다고 몰아붙이는 분도 계시구나.''라는 생각이 나기도해서 소생도 한마디 몰상식한 넋두리 몇 마디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아요. 다만 제가 여기 답변으로 올리는 것은 성경을 이렇게 어렵게만 ''묻고 답하기'' 할 필요 없다는 겁니다. 게시된 것 기쁘게 읽으시고는 저런 생각을 가진 분도 계시구나하고 느끼기만 하면 어떠세요. 그리고 나는 이렇게도 생각한다고만 게시해 보세요. 성경은 절대 비교가 아닙니다. 성경은 느낌입니다. 묵상의 결과로 나만의 의견입니다. 어디 감히 하느님 나라, 천국, 하느님/하나님 등 그분 관련된 것, 그분 나라 지칭하는 것 가지고 따질 우리가 아니잖아요! 이것 관련 어디 하찮은 단 하나 만이라도 비교 분석할 능력이나 가지고 있는 우리입니까! 그분 그림자도 본적이 없는 우립니다. 그분 나라에 다녀 올 ''비자''한번 신청해 보지 못한 우립니다. 제발 천국이니 하느님 나라이니 그 말의 문법적인 해석은 이제 그만합시다. 예수님의 설교를 들어시면 그분 자신에 관한 것인지, 그분 자신에 반대되는 것인지 다 알 수 있는 우리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분 나라에 관한 것인지, 그분 나라에 반대되는 것인지 다 ''척'' 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 스스로의 느낌만으로도 그만일 것을 굳이 더 안다면서 나부랑인다고 하느님 사랑 더 받으시리라 여기십니까? 하느님께서 ''내와 내 나라''갖고 따지기만 하라고 일러 주십디까! 사랑은 겸손이요 자기 낮춤입니다. 그리고 남에 대한 절대적인 배려입니다. 이게 희생 아닙니까! 이게 사랑과 용서 아닐까요! 이게 믿는 이의 자세라고 저는 교리반에서 배웠습니다. 그리고 교도권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믿는 이의 첫째 의무라고 다짐하면서 세례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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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은 집사의 비유'의 구체적 의미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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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박윤식(big-llight) |
번 호 |
45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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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0-10-14 오후 5:35:14 |
조회수 |
29 |
추천수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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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은 집사의 비유'의 이 복음을 통하여 '자선'에 관한 오랜 시간 묵상을 갖도록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평소에 생각했던 이 복음의 어려운 점을 여러 자료를 통해 정성으로 이해가 되도록 협조해 주신 소순태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 많은 관심거리로 회자되어지는 '약은 집사의 비유'에 관해 저는 예수님께서 설교하신 그 내면의 참뜻을 정말 아직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소순태님의 첫 제언에 제 나름의 복음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저의 의견을 피력한 것입니다. 그것도 복음에만 있는 예수님 말씀의 큰 뜻의 내용이 아니라 '성경 번역의 오류'라는 소순태 교수님의 '성경 번역 오류 공개 지적'에 관한 제언에 제가 느낀 점을 피력한 것입니다.
'성경 번역 오류'라는 의견 개진을 접한 많은 천주교인들은 아마도 저와 같은 찹찹한 심정을 가지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사실 믿음의 사람인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인간의 글'로 기록하는 과정에 일부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 오류의 지적을, 이렇게 공개가 아니고 여러 좋은 경로를 통해 그 뜻을 관계되시는 분께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사 이곳 '묻기 답하기'에도 간단히 '그럴 가능성'만 개진해도 '운영자'및 '여러 신자분'은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할 것입니다.
소순태님 지적대로 '성경 번역 오류'를 염두에 두고 이 비유가 각자 나름대로 충분한 묵상 거리가 될 수 있을까요? '번역의 오류'를 먼저 받아들일 경우엔, 일반 신자 입장에서는 또 다른 혼돈으로 이어질 것으로 저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저는 일단은 번역의 오류를 떠나 현재의 복음 내용을 토대로 묵상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소순태님이 지적하고 계신 '집사 일을 청산하게.'라는 내용이 '출납 보고서 제출'로의 번역 오류이다.'라는 지적이 '약은 집사의 비유'를 정확히 이해하는데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문제는 '약은 집사의 불의한 처신'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저의 고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부자 주인이 그 불의한 집사를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에 칭찬하였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밖에도 예수님께서는,
-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등 쉽게 묵상하기엔 너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복음내용들의 적절한 이해가 저의 고민이며, 저의 소중한 묵상거리라 생각합니다.
'성경 번역의 오류'라는 소순태 교수님의 제언에 대해서도 저는 일단은 좋은 의견이라 생각은 합니다. 충분히 개진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절차상 한번 고민해 봐야 합니다. 우리 천주교가 일부 평신도가 사목자의 고유 권한인 성경 번역과 설교에 대해 공개적으로 '번역 오류'니 '사목자분들의 이러 이러한 행위들이 안타까워'라는 식의 공개적인 의견 개진까지 할 지저분한 실정이며 꽉 막힌 지경입니까?
이것은 믿음의 속성상 '일부 위험한 한계 노출'및 '편 가르기로 지혜보다는 지식 다툼'만 불러 올 뿐입니다. 이런 불협화음이 제 나름대로 예상되기도 하고, 저 역시 교수님의 이런 안하무인격인 의견에는 다소 불만이 있어 저의 의견을 개진한 것입니다. 그러는 과정에 '집사 일을 청산하게.'라는 내용과 '출납 보고서 제출'의 원 뜻은 '어차피 그게 그 뜻 아닌가?'라는 소생의 견해도 같이 드린 겁니다. 따라서 제 뜻이 교수님의 주장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몰아 부칠 이유는 없다 여겨집니다. 오해가 계셨다면 이해를 부탁합니다. 또한 저는 이곳 '성경 묻고 답하기'가 하느님의 그 큰 뜻을 공개토론하기엔 분명히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 생각이 이러니 같은 생각을 가진 분만 들어 와 이야기 나누자 할 장소도 분명 아닙니다. 그저 그런 생각을 가지신 분도 계시구나라고 생각합시다.
저는 교수님께서 처음 이 '비유'가 어렵다는 걸 전제로 하면서 게시할 때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참 좋은 묵상거리를 주셨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화를 진행하면서 저는 '그래도 가진 자가 없는 자를 위해 자선을!'이란 부제로 전환하면서까지 이 '비유'의 본질을 이해하려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인 '비유'의 본질의 구체적 내용은 뒤로하고 '성경 비전문가'운운하면서 온갖 모욕적인 처사의 남발에 대해서는 소생은 참 안타까울 뿐입니다. 소순태 님! 가진 자의 것이 비단 '돈' 뿐이겠습니까? '힘, 재산, 심지어 '지식'도 가진 것입니다. 일반 평신도인 어떤 분이 저런 의견도 가졌구나 생각해 주시기를 다시금 부탁드립니다.
이 즈음 저 역시 소순태 님 이상으로 할 말이 많으나 믿음의 사람으로 차마 말문을 닫는 게 저를 위한 상책이라 생각을 해 이만 접습니다. 어찌 그리도 많이 배우셨나요! 사실 저는 요 며칠간 인터넷 접속이 불가한 곳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수일 내로 또 다녀와야 할 형편입니다. 그때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저의 의견 개진은 이것으로 충분히 끝난 것으로 여겨지는 바, 이번 '비유'에 관련된 저의 게시물을 죄다 삭제할 예정입니다. 그간 좋은 묵상거리를 주신 소순태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일부 오해가 계셨다면 이해를 부탁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어려운 루카 복음의 정확한 내용을 묵상하지도 못하고, 사뭇 교도권에 준하는 '성경 번역 오류'등에 관한 탁상공론에 휘말리게 된 점 '성경 묻고 답하기'를 즐겨 찾으시는 형제자매님께 죄송함을 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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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순태(sunsoh) (2010/10/14) :
+ 찬미 예수님
주신 글은 잘 읽었습니다. "약은 집사의 비유"와 관련하여 제가 올려드린 "번역 오류" 지적의 글들을 다시 한 번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형제님께 드린 글이 아닌데, 형제님께서 굳이 나셨던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번역 오류를 바로 잡는 권한이 평신자에게 없다고 하여, 심각하게 파악되고 있는 번역 오류의 지적글을 교우님들께 게시글의 형태로 보고 할 수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일전에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늘 나라"와 관련하여 제가 2009년 10월 21일 이후 최근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번역 오류 지적들을 할 때에는, 왜 가만히 계셨는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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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순태(sunsoh) (2010/10/14) : [사뭇 교도권에 준하는 '성경 번역 오류'등에 관한 탁상공론에 휘말리게 된 점] <----- 고집이 대단히 센 형제님의 판단과 기준에 의하면 탁상공론이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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