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묻고답하기

제목 비신자의 눈으로 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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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1999-01-22 조회수882 추천수3 신고

 

성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대화중에 흔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
고 있는 사람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것은 오히려 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
들 - 개신교인이든 천주교인이든 상관없이 - 중에 더 많다고 볼 수도 있
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글 - 성공회 신자였으나 회심하여 가톨릭에 귀의, 게세
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사제가 되었던 토머스 머튼 수사의 글 가운데
 - 에서 우리들의 잘못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시각을 바로 잡아 줄 수
있기를 필자는 조금이나마 기대하며 이 글을 옮겨봅니다.

 



 때로는 신앙이 없거나  또는 스스로 신앙이 가정하고 있는 비합리성을 받
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신자들보다 더 나은 위치에
서 성서와 대화를 나누고 씨름하면서 성서 속으로 몰입해 들어갈 수 있습
니다. 진지하게 붙들고 씨름해 볼 만큼 충분히 흥미있는 책이라고 여겨지
면, 그들은 처음부터 성서와 싸우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죄의
식을 느껴 뒤로 물러서지도  않습니다.

또 그  거룩한 책이 애매모호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인정하기를 주저
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과연 이 책이 ’하느님의 말씀’인
가 하고  의심해 보기도 합니다.

그들은 성서를 인간의 말로 대하고 또 그렇게 읽음으로써  신자들보다 더
자유롭게 썩 잘 이해하며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흔히 신자들은 지나치게
호의적으로 공손하게 성서를 대해, 마치 성서에서 무언가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듯한 신앙심으로 인해 성서에  관해
무의식적으로 마음의 문을 닫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성서
가 오로지 자기만의 책인 양, 또는 자신이 성서에 관한 모든 것을 알기나
한 것처럼 지나치게 만족하여  자신의 신분과 외적인 특권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도리어 이 시대의 보편적인 관점은 선조들의 광적인 신심을 반성하도록
우리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선조들은  자신과 자기 공동체만이 옳으며
선택받았다고 믿었기에, 성서 해석의 세세한 문제에 대해서 전쟁까지도
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아가서 성서는 모든 사람들의 책이며, 비신자라도 신자들
이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성서의 새로운 측면을 신자 못지않게 발견할 수
있음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한 예로서,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인  파솔리니(Pasolini)와 마태오 복음에 대한
그의 비범한 반응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꽤 널리 알려져 있습니
다.

 교황 요한 23세가 아씨시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교황이면 마땅히 그가 속해있는 바티칸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
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방문은 20세기  교황이 행한 아주 색다른 사건
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요한 23세가 거리낌없이 자유롭게 움직임으로
써 아씨시 일대의 교통이 완전히 마비되었습니다.  몇 시간 동안 어느 누
구도 거리를 나다닐 수 없었습니다. 곳곳이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이
렇게 ’바티칸의 포로’인 교황이 아씨시의 세속 생활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
는 동안, 마르크스주의자인 파솔리니 역시 밖으로 나갈 수 없어 ’호텔방의
포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우연히 방에서  성서를 발견하고,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것을 집어
마태오 복음서를 읽었습니다. 그 복음서를 읽은 결과 그는 영화 - "성 마태
오에 의한 복음서"- 를  제작하게 되었고, 이 영화를 교황 요한 23세를 추모
하며 그에게 바쳤습니다.

 이 영화의 가치는  아주 뛰어난 진지성과  신빙성에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 영화는 아주  적은 제작비로 만들어졌습니다.  바위투성이인 형편없는
이탈리아의 시골 들판이  무대였으며, 출연진도  직업배우가 아니라 그냥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가난했으며,  공산주의자도 꽤
섞여 있었습니다. 파솔리니 자신도 베드로 사도로 출연했고,  그의 어머니
는 동정 마리아 역을 맡았습니다.

 그 결과, 총천연색 필름은 아니었지만 15세기 피렌체파(객관적인  표현을
중시하고 합리적인 조형성이 특징인 유파)나 시에나파(정서적인 도해성과
장식성을 강조하며 색채의 조화를 중시한 유파)의  회화에 가까운 시각적
효과를 가진 일종의 예수 수난극  영화가 생겨났습니다. 적어도 천박하고
지나치게 인위적인 헐리우드 영화와 대조해 볼 때 아주  인상적인 작품이
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본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작품을 비난하였는데, 그 이유는
영화가 복음서에 충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영화에 묘사된 그리스도의 모
습이 그들을 놀라게 했기 때문입니다. 파솔리니가 그려낸 그리스도는 젊고
어둡고 놀랍도록 초연하며 무섭게 진지하여, 지난 19세기 교회 예술에 묘
사되었던 친절하고 너그러운 예수는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 역시
인간 실존에 관해서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비현실적인 그림자나 유령
같은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잔혹한 전쟁 한가운데서도 살아 남았고,
정치 경찰을 피해 산 속에 몸을  숨겼으며, 감옥과 강제수용소의 실정이 어
떻다는 것을 아는, 아주 실제적이고 우락부락하며 거친  사람들, 세상풍파
를 다 겪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그리스도가 자신의 제
자로 삼은 실제의 사도들과 똑같았던 것입니다!   
 
 파솔리니의 그리스도는 너그럽지 않고 분명하게 요구하였습니다. 그는
부드럽지 않고 단호하였습니다. 어느 면에서는 무자비하다고 느낄 정도였
습니다. 이런 모습 때문에 그렇게 많은 그리스도인이 놀랐다는 사실 자체
가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린 그리스도의 모습이야말로 분명히 마태오 복음서를 아주
있는 그대로 열린 마음으로 읽은 결과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보다 더 거칠은 복음서라면 아마 마르코 복음서일 것입니다.
  
 사랑이란 요구하고 엄격하며 단호하다는 것을 우리는 잊었습니까? 특히
사랑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이나 무자비하게 남을  속이고
착취하려는 경향과 부딪칠 때는  어떠합니까? 복음사가 마태오가  기술한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서로 자비롭게 대하는 것이 자비를 받을 수 있는 유
일한 길임을 단호하게 일러주고 있습니다.(마태 5, 7 ; 25, 31-46 참조).

 
 결국 이 영화는 복음서를 아주 그럴 듯하게 또  설득력있게 해석한 작품
입니다. 이러한 해석이 가능했던 까닭은 틀림없이 감독과 배우 모두가 영
화를 만들면서 마태오 복음을 인격적으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들이 관례적이고 하찮은 성서 풀이에 익숙해 있다면 - 아마 지겨웠을텐데
- , 결코 이렇게 신선한 성공은 거둘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
에게 새로웠고, 그래서 그들은 마태오 복음서를 읽고 해석하면서 그 메시
지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분명히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그
런 식으로 성서에 응답한 것은, 어느 면으로는 그 당시 세계에 대한 그들
의 분명한 입장을 밝힌 것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현대 세계와 그리스도의 메세지 사이에 확실한 연결 고리를 만들
었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마태오 복음서 하나에  의해서라도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셨는지에 대해 자기들 나름대로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나아
가 그토록 진지한 자세로 영화를 제작함으로써, 이 복음서의 기록이 어떤
면에서는 아주 믿을 만한 것임을  분명하게 드러내었습니다. 그들이 신학
을 무시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인간적인 실제 모습 그대로  - 마
태오 복음서라는 뛰어난 인간 문학작품에 묘사된 것 같이 -  온전히 받아
들이려 했기 때문에, 그들이  이 영화에 부여한 신빙성은 한층 감명깊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학은 이런 것들에 무감각할 수 없습니다. 신학이 지나치게 추상화되어
갈 때, 또 복음서 저자들이 그토록 납득할  수 있게 기록해 놓은 살과 피
를 갖춘 실제적인 그리스도와 복음을 텅 비게 만들 때, 신학은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로 믿는 더 나은  신앙인이 되는 데 결코 도움이  될 수 없습
니다. 육화(肉化)에 관한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누가  무어라고 규정짓든
간에, 그리스도를 ’사람의 아들’이 아닌  듯이 다룬다면 - 마태오 복음서에
서 그리스도는 자주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는데 -, 신학적으로 얻을
것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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