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트에서 가톨릭으로
-18인의 개종 실기 중에서
서창제(徐昌濟)
1899년 함북 출생 서울 거주/성진(城津) 상업 중학
교 교사/조선 기독교 복음 교회 목사/한양 공과 대학
부교수/서울 대학교 공과 대학 강사
1. 루터의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이단적교설(異端的敎說)에 속아
헛된 평화를 누리던 나는, 자칫하면 지옥의 자식이 될 뻔했다. 이 헛된 평안이
무너지는 그 날, 나는 진리의 기둥인 성교회(聖敎會)에 달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바 ’죽은 믿음’의 헛된 평안 수십 년! 나는 정말 기막힌 어두운 자였다.
6·25 동란 당시 부산 피난 3년동안에는, 프로테스탄트 목사인 나였지만 소위
예배당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왜 그랬는가? 암만해도 프로테스탄트의 예배는 천
주께 드리는 예배라 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껏해야 성서 고전(聖書古典)
강연회 밖에는 될 수 없는 무엇이요, 가끔 특별 집회(소위 부흥회)를 연다 했자
그것은 한 종교적 말초 신경 흥분(末梢神經興奮)수단에 지나지 못하는 무엇이다.
일언이폐지, 프로테스탄트의 예배는 제헌이 아니다. 제헌이 아니니까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은총의 능력이 실현될 리 만무하다. 하니까 그들은 항상 "믿음
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헛된 위안의 캠퍼 주사로 그 연명책을 삼을 뿐 인본
주의(人本主義)의 유독(流毒)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야 나 어찌 더 오래 거기
머물 수 있을쏘냐. 드디어 나는 주일마다 수영(左水營) 20리를 걸어 부산진 천
주교의 문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성당 참례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
것은 미사 구경이지 미사 참례는 아니었다. 그 때 바로 성당에서 ’교부들의 신
앙’이란 책이 눈에 띄었다. 얼른 보기에 진리의 글인 듯하여, 버스도 타지 못하
는 나의 홀쭉한 주머니를 털어 그 책을 샀다. 그것을 읽기도 하며 미사 구경을
하노라니까 차차 성교회(聖敎會)의 진리가 어렴풋하게나마 알려지기 시작했다.
1952년 8월 15일이라, 이 날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 죄인 괴수인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드디어 장 요한 신부(부산 중앙 성당 주임 신부)의 손으로 나의 원죄
본죄를 다 씻어 주셨다.
아! 이 날이 바로 나의 천국 입적(入籍)의 날이다. 회령(會寧) 임화길(林和吉)
신부를 만나 뵌 뒤 흘러흘러 20여 년, 비로소 나의 정신사상(精神史上)에 새 광
명이 비치기 시작했다.
2. 성경의 주관적 해석이 프로테스탄트 세계를 소란케 한다. 따라서 분열에 분
열을 거듭한다. 그 세계에는 권위(權威)의 단언 명령(斷言命令)이 없기 때문에
마지막엔 일인 일교파 상태에까지 이르고야 말 것 같다. 항상 너도나도 다 하느
님의 직접 계시를 받았노라 날뛰니 대체 어느 것이 진짜 계시인지 알 수 있어
야지? 알고 보면 그 소위 직접 계시란 거의 전부가 도깨비 계시일 것이다.
이 많은 직접 계시(?)를 받은 자들이 날뛰는 판국에서 나는 ’양의 우리 밖의
양들’과 함께 하염없이 헤맬 뿐이었다. 어떤 이처럼 직접 계시(?)도 받지 못한
나는 정말 불쌍한 존재였다. 바다에 떠다니는 지푸라기 같은 존재였다. 가끔 성경
을 읽을 때의 감명 또는 감흥(感興)을 나에게의 직접 계시로 삼고 거기에 내 영혼
을 맡겨 보려 했으나 그야말로 위험 천만의 일이고 또 소속 교파의 감독을 영계
(靈界)의 권위로 떠받들어 보려고 마음을 도사려 보았으나 양심이 허락치 않음을
어쩌는 수 없었다.
신기루(蜃氣樓)가 얼마든지 나타나 있는 영계(靈界)의 망망 대해(茫茫大海)위에
조각배를 저어 가는 나! 어느 길로 저어 가야 할까를 몰라 망설이는 나에게 있
어서는 ’보냄을 받은 이’의 "나를 따르라."는 권위의 한마디 소리만이 생명의 길
로 인도하는 그것이다. 그 소리를 나는 목마르게 기다렸다. 천주교의 소리를 그
소리로 믿을까 어쩔까......
"슐라이어마허류(流)의 신(新)프로테스탄티즘이냐, 가톨릭이냐 하는 양자택일(兩
者擇一)의 절박한 대목에 이른다면 나는 가톨릭을 택하겠다."는 프로테스탄트
대신학자 카를 바르트의 술회(述懷)의 말이 이 경우의 나로 하여금 천주교의 소
리에 귀를 기울이게 한 바도 있었다.
권위(權威)에의 복종 행위 없이는 영계(靈界) 물계(物界)의 혼란은 정리되지 못
할 것이다. 실상 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그 데모크라시적 꼬락서니에 대한
염증 때문에 현기증을 일으킬 지경이었던 자이다. 천주(天主)의 전권(全權)을
신인(信認)한다면야 교회의 데모크라시란 어불성설(語不成說)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 때다! 교황에게의 절대 반대자였던 나는 교황 성하에게의 절대 복종자
가 되기에 이르렀다. 교황 성하만이 당위에 선 천주의 대리이시요, 베드로의 반
석이기 때문이다. 베드로 이래 2천 년 줄곧 한 교회로 걸어온 참 교회인 천주교
계시 진리의 권위에 영혼을 철저히 맡겨 놓은 나는 비로소 하늘 나라의 참평안을
맛보게 되었다.
3. "하느님이 내 죄를 사했을 것이다." 하는 주관적 위안은 암만해도 한심한 것
이다. 이런 거품 같은 ’소위 믿음’으로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십수 년 전
프로테스탄트 교직 몇 어른과 함께 덕원 수도원을 구경한 나는 천주교의 고해
성사를 훌륭한 제도라고 찬양한 바 있다. 그 때 일행 중 한 분은 나의 이 말을
못내 비웃었다. 나는 다만 낮은 소리로 "사람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당장 내 앞에 앉은 하느님의 대리자에게 나아가 죄를 고백해버려야 시원할 것
같소. 하느님에게 직접 고죄하지 않고 사람에게 한다 하여 비웃는 이도 있겠지
마는 그래도 이는 내 영혼의 솔직한 경험이오." 하는 의미(意味)의 말을 그에게
했다.
그러나 결단성이 부족한 명랑치 못한 걸음을 걸으면서도 얼른 발을 돌려
고해 성사의 천주교에 돌아오지는 못했다. 객관적 권위의 사죄 선언을 듣지 못
했으니 어찌 내 영혼이 명랑해질 수 있었겠는가? 구름 덮인 골짜기를 수십 년
무거운 영혼으로 허덕이던 나는 고해 성사를 베푸는 천주교의 품 안에 돌아오
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영세 후 하루는 윤 신부(부산 천주교 도서관)의 앞에
고죄한 한 다음, 그의 사죄 선언과 함께 그의 "평안히 가오."하시는 말씀을 들
은 나는 "하늘이 열리는"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4. 연옥 교리에서 크나큰 위안을 찾게 된 나는, 연령(煉靈)을 위하여 뜨거이 기
도하는 성교회(聖敎會)에 귀정(歸正)치 않고 어디 갈 것이냐! 내가 당장 죽는다면
천국 가기엔 암만해도 자신이 없고, 그렇지만 천주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애를 써 온
나를 설마 지옥에야 보내시랴. 그러나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자라면 갈 데는
지옥밖엔 없잖은가. 이거 정말 야단났다! 이를 어쩌나! 가끔 지옥의 악령(惡靈)
이 큰 입을 벌리고 덤벼든다! 보라! 이런 영혼 상태의 나에게 있어서 연옥 교
리가 그 얼마나 고마웠는가! 이 연옥 교리에 대한 성경의 근거도 뚜렷이 있으
니 더욱 마음 든든한 바 있다.
5. 성교회(聖敎會)의 품안에 돌아와 보니, 성교회(聖敎會) 경영의 모든 문화면(文化面)
사업이 모두 없어진다 해도, 다만 미사성제와 성체 성사만 있으면 성교회(聖敎會)는
비록 수소탄의 폭풍이 불어와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줄 굳게 믿는다.
저 슐라이어마허류(流)의 계시관(啓示觀) 위에 세운 소위 기독교회는 ’모래 위에
세운 집’ 이어서 때가 되면 죄다 몰락(沒落)될 것이다. 8, 9백교파로 분열되어
매일 옥신각신할 뿐 아니라, 오히려 박테리아처럼 끊임없이 분열되는 프로테스탄
트를 어찌 구령의 기관이라 이를 수 있겠는가? 보라! 사태 이러하니 해마다 백여
만 명의 프로테스탄트가 천주교로 개종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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