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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00년대와 교회의 대하여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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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선종수 쪽지 캡슐 작성일1999-03-03 조회수744 추천수1 신고
샬롬! 어느덧 한해가 시작한지도 2달이 지나 3월 문턱에 있군요. 새해 결심했던 많은일들이 서서히 허무러지고 있지 않은지. 사순절을 맞아 새로운 마음, 반성하는 마음으로, 은총의 시간으로 함께 했으면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다들 아시는 우리 천주교회내 진보단체의 하나인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매주 발행하는 "빛두레"지를 읽다가 2000년대에 우리 교회가 가야 할 방향을 연재로 실린것을 보고 시사하는 바가 커 이를 올려 다함께 공감할까 하고 글을 올렸습니다. 물론 어느 한 사제의 의견일지 모르나 우리의 교회 현실을 나름대로 진단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좀 길지만 끝까지 정독하시고 사순절을 맞아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가 몸담고 있고 이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워야 할 교회의 의무을 재인식하고자 합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빛두레지 99. 1. 10 .390호 ~ 2. 7 394호 교회로 가는길 2000년대와 교회Ⅰ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마태오 5, 16) 지난 98년은 우리나라가 정부수립 50주년을 맞는 해였다. 국민의 정부는「제2건국선언」을 주창하며 사회 각 분야에 개혁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이를 바라보는 국민 대다수는 사회전반에 대한 개혁에 대해 동의하면서도 과연 독버섯처럼 뿌리깊게 자리잡은 모순과 비리가 한 순간에 개혁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개혁의 고삐를 앞당기지 않으면 모든 분야가 더 심한 중병을 앓게 되리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특히 해방이후 최대의 국난이라는 IMF구제금융을 받게 되면서 더 심한 위기의식을 갖고 있고, IMF이후에도 이 사회가 보다 살기좋은 사회로 발전할 것이라고 바라보지 않는다. 소위 '20-80의 게임 '20-80게임'은 그동안 IMF를 경험했던 100여개국이 예외없이 전체 국민의 20%만이 부와 행복을 누리고 80%는 가난과 고통만이 남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이 여타의 IMF구제금융을 받는 나라와 마찬가지로 시작될 것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 교회사적 측면에서 예수그리스도 강생 새로운 천년의 기쁨의 대축제를 불과 1년여 기간을 남겨두고 있다. 인류사회에서 20세기가 역사의 후장으로 사라지고 21세기의 새로운 출발을 기약하고 있다. 이는 단지 시공간의 의미만이 아니라 한 시대를 결산하고 평가함으로써 새시대의 새로운 삶의 여정을 펼쳐가는 전환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 시점에서 우리 교회의 자화상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이에대한 대안을 강구해보는 것은 새로운 천년기를 열어가는 가톨릭 교회로서는 매우 유의미한 일이라 보여진다. 보편적이고 평등한 교회공동체는 어디에 있을까? 제2차 바티칸공의회이후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는 단지 성당건물이나 주교나 사제인 교회가 아님을 주지함으로서 교회에 대한 새로운 획을 긋게 되었다. 이러한 교의에 대한 변화가 과연 오늘날의 현실에서 얼마나 인식되고 있는지 매우 의문스럽다. 성령의 선물이라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개최된지 30년이 지나도록 교회안에 과연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이 살아있는지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특히 절대권력에 가까운 교계제도의 권위나 성직중심주의, 사목이나 교회관에 협소한 관점이나 이해정도, 평신도들의 소극적인 참여 등은 공의회 정신이 실종된 교회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한국교회 설정 200주년을 기념한 사목의안도 공의회의 정신과 함께「한국천주교사목지침서」로 묶여졌지만 이 지침서가 실제로 각 교구나 본당에서 실시되지는 않고 있다. 얼마전, 한 사제가 몇년동안 교회내 각종 기관지나 언론 등에 기고한 글을 모아 출판한「교회 - 순결한 창녀」라는 책자 <분도출판사, 이제민 저 1995 초판>가 교회내외에서 날개돋친 듯 팔려나간 적이 있다. 이 책은 서울시내 대형서점에서도 교회관련 서적으로는 드물게 상당한 재미(?)를 보았다고 한다. 또한 이 책이 로마 교황청의 금서로 지정되었다는 이야기가 떠돌면서 이 책의 주가는 계속 올라갔다. 하여간 이 책에 대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인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한국천주교주교회의(CBCK)에 서한을 보내고 급기야 주교회의(상임위원회)는 '교회 공식 간행물에 문제가 된 신학자의 글을 싣지 않기로 하였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회보, 제100호, 1997. 9. 1일자>는 것이다. 2000년대와 교회Ⅰ-ⅱ 이에 대해 평신도들내에서도 정보통신동아리들을 중심으로 찬반으로 나누어져 열띤 토론을 전개하게 된다. 그러나 정작 문제가 된 신학자들에게는 쟁점에 대한 소명기회나 통보조차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여전히 권위에 사로잡혀 있는 교계제도 상층부의 단면을 볼 수 있다. 이는 본당내에서도 본당사제와 수도자, 사목위원의 모습에서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여전히 문턱이 높은 사제관과 지시와 명령으로 일관하는 사목자는 사목위원들조차 신자들내에 군림하는 교회지도자로 비추어지고 있다. 본당공동체는 소수의 사목위원과 봉사자들에 의해 유지되며 다수의 신자들은 일주일에 한번 미사전례에 참여하면서 자의적인(?) 안식과 평화 만을 갈구하며 영적 만족감을 달래고 있다. 이에 대한 당연한 귀결은 신자 대다수의 이원론적 신앙태도와 기복적이고 이기적인 신심, 가치 우선 순위의 전도, 사회윤리의식의 결여 등으로 나타났다. 또한 다른 종교와 비교해서 가톨릭 신자들이 냉담자나 신흥종교로 이탈되는 것이 가장 높다고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느님 백성 전체로 하여금 사제직, 왕직, 예언직을 선포(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10, 12항 평신도교령 31항)하였다. 이는 평신도들도 교회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그리스도의 한 자녀로서 하느님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교회의 보편성은 성직자나 수도자나 평신도에게 차별이 있을 수 없으며 각각의 고유한 은총을 교회공동체에 봉헌하며 일치를 향해 나아감을 역설(상기 문헌 13항)하고 있다. 이러한 평신도들의 그리스도의 사제직, 왕직, 예언직의 참여나 교회의 보편성은 우리 교회에는 아직도 요원한 것일까? 최근의 한 조사결과(김동기, 교구민 의식조사 결과분석, 수원교구 복음화국 교육자료, 1998)에서도 성직자중심의 교회운영이라는 말에 성직자나 수도자, 평신도 등의 65.1%∼83.7%가 많이 동의하거나 아주 많이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교회운영의 중심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평신도와 성직자 중심이라는 응답보다는 주로 성직자 중심의 교회운영을 답한 경우가 2∼3배 많았다. 특이한 것은 응답자 중에 성직자들이 평신도보다 훨씬 더 성직자 중심의 교회운영에 공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여전히 우리 교회의 성직중심주의, 위계적 권위주의가 그대로 표현된 것이다. 위계상의 교계제도만이 교회이고 평신도는 단지 드나드는 손님(?)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현실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정치사회적인 환경은 권력분산과 위임이 확대되고 기업에서 조차 노사간의 주종관계는 전근대적 방식이 되어버렸고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확산되고 있음에도 교회는 시대적 흐름조차 따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미 한국교회는 대형화된 본당에서 익명화 현상이 뚜렷하고 성소자는 격감하고 있으며 중산층화, 노령화, 여성화가 가속되고 있다. 또한 본당내 사목위원이나 단체장은 비교적 시간내기가 용이한 자영업자들의 독과점이 되고 있어 자기 계층과 직업의 이해관계에 따라 신앙을 받아들이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교회의 경쟁력이 점차 추락하고 있다 지금 사회는 IMF로부터 혹독한 '구조조정'을 강요당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조정'은 단지 20%의 사람만이 살아가고 80%는 죽음의 늪으로 밀어넣는 것이다. 지금 시장경제에서 경쟁력이 없는 기업들은 부도, 파산으로 대량실업사태를 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의 경쟁력은 있는가? 교회의 경쟁력이란 '종교시장에서 가톨릭 교회로 유인할 수 있는 실제능력과 잠재력'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 교회는 물적, 인적자원에 기반한 사회복지사업과 사회민주화를 위한 예언직수행, 청빈하고 사심없는 수도·성직자의 생활태도나 타 종교들의 소극적인 사회참여와 분열 등의 어부지리로 유례없는 성장기를 누려왔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혹자는 인구대비 신자률의 증가를 이유로 자족하고 있으나 신자 증가률은 둔화되고 있는 현실(C.B.C.K.의 교세통계에 의하면 신자증가률은 91년 6.28%를 정점으로 92년 4.90%, 93년 4.66%, 94년 4.03%, 95년 3.36%, 96년 3.23%, 97년 3.18%로 계속 하향세를 나타내고 있다.)을 안이하게 바라보고 있다. 실질적으로 매주 성당에 모이는 신자는 전체 신자대비 30%를 밑돌고 있으며(97년말 CBCK통계는 29.96%)냉담자는 증가되고 있다. 이러한 위기적 징후에 대해 교구나 사목자들은 합당한 원인찾기와 대안모색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의 현실은 과거 성장기에 구가해 왔던 가톨릭 성직자나 수도자의 사회적 존경과 도덕적 권위, 영향력 등은 타 종교 등의 분투와 종교 수요의 감소, 탈제도적인 종교의식 등으로 추락하고 있는 사실을 직시하면서 내부적인 자기정화와 쇄신을 계속하여야 한다. 요즈음 성당 안의 성물이나 성체 등의 도난이나 취객들의 침입을 예방한다며 성당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겨우 주일이나 미사때나 잠시 문을 열어 두는 본당들, 집밖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집안에서 유흥지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제들, IMF로 인해 실의와 도탄에 빠진 형제들에게 교무금이나 신축금을 요구하는 미사시간이나 성모마리아상을 앞세워 집집마다 다니며 감사헌금을 강요하는 교회는 결코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없다. 현 시대에 IMF로 인해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는 형제들이 성당에 찾아와도 별다른 위안이나 희망을 가질 수 없다면 그들도 역시 교회를 떠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사회의 사목은 울타리안에 가두어둔 양떼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과학문명의 발전과 다원화된 사회는 양들이 전 지구상을 마음껏 누비고 다양한 자신들의 욕구를 분출한다. 지금 교회 일각에서는 속지주의를 속인주의로 바꾸거나 결합해야 한다. 특별히 직장단위의 소공동체운동을 전개하는 서울대교구 직장인사목부는 거주지 중심의 사목이 아니라 사람들이 속한 집단(회사)중심의 사목과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몇 년전 교구장의 사목교서를 통해 '오라'는 사목에서 '가라'는 사목으로 변화할 것을 요청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교구장의 교서가 얼마나 많은 사제들에게 사목의 쇄신을 가져왔는지 회의적이다. 이는 속지주의니 속인주의의 교회법적 논쟁을 떠나 분주하게 움직이는 현대인들과 끊임없는 새로운 욕구를 분출하며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들에게 사목자들은 신자들의 집을 부담없이 방문하며 신자들의 가정형편이나 안부를 묻고 세상살이에 얼마나 많은 기쁨과 고통을 겪고 있는지 마음속 깊이 체험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또한 사목자는 최소한 1주일에 8시간 이상은 지역사회내 재래식시장이나 노동의 현장, 시민사회단체 등을 찾아가 낮은 자들의 땀과 피가 응어리진 현장을 찾아가 보아야 한다. 이러한 체험과 경험에 밑바탕으로한 교회는 목자와 양떼들이 한몸이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맺는 친교는 평신도들이 가정과 일터에서 삶과 신앙이 유리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처지나 조건에서도 복음적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동반자이자 안내자가 될 수 있음을 주지하고 있다. '참회와 회개'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지금 교회는 2000년 대희년을 기쁨의 축제로 맞이하기 위해 각 교구마다 시노두스를 개최하였거나 준비중에 있으며 대희년 행사계획에 분주(?)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이미 한국교회에 맞이했던 수차례의 희년행사가 예전처럼 집안잔치로 끝나거나 행사의 존재자체도 기억하기 어려운 의례적인 행사로 전락해 버린다면 우리 교회는 침체기의 단계를 넘어 쇠퇴기의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 과거의 희년행사가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나 박해기의 주변 조건에 따르는 희년인 반면에 2000년 대희년은 그동안 90년대 교회의 성장세 둔화에 대한 우려를 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그런데 대희년의 행사가 단지 바티칸과 주교회의, 교회상층부만 요란할 뿐, 대다수의 신자들은 희년의 기쁨보다는 IMF와 자연재앙 등으로 종말론적인 기운을 감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000년 대희년과 새로운 천년기의 준비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그랬던 것처럼 '참회와 회개'에서 출발해야 한다. 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회개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교회는 그 품에 죄인들을 품고 있으므로 거룩하면서도 항상 정화되어야 하겠기에 끊임없이 회개와 쇄신을 계속하는 것이다.<교회헌장, 8항> 2000년 대희년의 직접 준비 제1단계 1994∼1996년도 "모든 희년의 기쁨은 무엇보다도 죄의 용서에 기초한 기쁨, 회개의 기쁨"<교황요한바오로2세,『제삼천년기』, 32항 참조>임을 말하고 있다. 교회는 과거의 과오와 불충한 사례들, 항구치 못한 자세와 구태의연한 행동에서부터 자신을 정화하도록 격려하지 않고는 새로운 천년기의 문턱을 넘을 수 없음<교황요한바오로 2세,『제삼천년기』, 32항 참조>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작년 프랑스 가톨릭교회가 공식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찌정권의 유태인에 가혹한 박해에 대해 침묵하고 무관심한 것을 참회하는 '회개선언'을 발표<프랑스 가톨릭 교회의 회개선언, 공동선 11,12월호 23쪽, 안보옥역, 1997년>한 것처럼 우리교회도 근현대사의 흐름속에서 씻을 수 없는 과오들을 과감히 씻어내야 한다. 사목자들 스스로가 교회의 본질과 사명은 저버리고 단지 울안에 갇혀있는 양떼들만을 사목하면서 안주하고 있지는 않은지, IMF시대에 고통받는 이웃들은 죽음의 나락으로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는데 이는 단지 생존경쟁의 낙오자, 실패자, 적선을 받을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가난한 이들과 젊은이들이 성당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있음에도 고전적인 전례방식만 고집하면서 '무조건 믿고 외우세요'라고 하지는 않는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꿈꾸는(?) 교회의 미래상 불과 1년도 남지않은 '밀레니엄 버그(Millenium bug)' 대소동에 온갖 데이타가 2000을 인식하지 못하는 대혼란을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어떤 모습으로 인류사회를 바라볼까? 고도로 발달된 과학문명이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낙태와 전쟁 등으로 생명을 죽이면서도 인류사회는 유전공학의 발달로 생명을 복제하기에 이르는 세상에 와있다. 과연 인간의 욕망이 아인슈타인을 빼어닮은 또 하나의 아인슈타인을 복제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또한 인간의 노동에 의해서만 창조되었던 가치는 더 이상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다. 인간은 단지 느끼고 생각하는대로 이야기만 하면 컴퓨터나 기계가 대행해주는 시대에 살게 된다. 2000년동안 추구해온 교회의 전통적인 전례나 교리가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에서 어떻게 실현될 것인지 별로 고민하는 신학자가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21세기 우리 사회의 모습은 탈냉전, 탈이념의 시대와 '국경없는 경제전쟁'으로 국제화, 개방화가 촉진되고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정착이 주요한 문제로 대두될 것이다. 또한 도시의 인구집중이나 노령인구의 증가는 또 다른 사회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혹자는 21세기를 전문화, 정보화, 지방화의 시대로 요약하기도 한다. 이러한 새로운 환경은 물론 20세기의 연장선상에서 지난 세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은 문제들이 새로운 세기에 더욱 심화된 모순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세상 종말까지 '인류구원에 대한 봉사'의 본연의 사명에 충실할 것이고 하느님의 백성들은 사제직만이 아니라 왕적 선교활동이나 예언적 사회활동을 통해 지상의 하느님 나라 실현에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 시대에 걸쳐있는 몇가지 현안에 대한 입장정리와 함께 2000년대 교회가 해결해야할 몇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우선 그동안 사장되어버린 200주년 사목회의 의안을 재평가하고 21세기 환경에 맞는 사목정책과 프로그램 개발을 서둘러야 한다. 이를 위해 「주교회의 2010년 사목연구 특별위원회」를 각 교구단위로 제도화하고 실질적인 물적, 인적자원을 지원하며 가급적 전문적인 평신도나 단체가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야 한다. 둘째로 교계제도의 중앙집권화된 권력과 임무를 분산시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지난 로마 바티칸에서 개최된 주교 대희년 회의 아시아 특별총회에서 인도네시아주교회의에서 제안한 바있는 '동아시아주교좌'<심상태, 아시아교회 안에서 한국교회의 역할, 사목 253호 46쪽>의 설립이나 교구장으로부터 감목대리권을 갖는 지구장제<가톨릭신문 98. 7. 26日字>, 구역반 체계를 실질적인 친교와 나눔이 가능한 소공동체로 전환하는 문제에 대해 깊이 제고하여야 한다. 세째, 현행 개별 본당별 사제관이 아닌 지역사회내 공동사제관을 설치하고 형제적 애정에 기초한 공동생활과 공동사목을 통해 지역사회 복음화를 위한 구체적인 사목을 수행하여야 한다. 이는 사제관 운영비의 감축만이 아니라 사제들의 공동체적 규율이나 품성, 사회에 대한 식견과 안목을 넓힐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할 수 있다. 네째로 교회내에서 수도자들에 대한 역할과 임무가 재조정되어야 하며 수도자들이 지역사회내 3-4명의 분원공동체를 두고 본당의 전교수녀와 사회복지시설이나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수녀들간의 공동체를 통해 수도자의 자기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수녀원과 사제관을 줄여 지역복음화센타를 건설, 주민자치센타(현 정부에서는 2,000년까지 읍면동사무소를 단계적으로 주민자치센타로 개편하여 행정지원만이 아니라 사회복지서비스를 증대할 예정으로 있음.)와 연계한 프로그램을 실시하게 되면 보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지역복음화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다. 다섯째로 현재 본당내 사목협의회로 단일화된 구조를 사목협의회와 평신도사도직협의회로 이원화된 구조로 운영되어야 한다. 물론 본당의 인적자원에 대한 제한성이나 사도직 단체의 침체 등은 본당의 효율적인 운영을 저해하고 있으나 중장기적으로는 사목회와 평협이 각각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 여섯째, 현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추구해온 속지적 사목구조를 극복할 수 있는 속인적 사목구조의 도입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미 핵가족이 가속화되고 농촌공동체가 파괴되어가는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직장이나 삶의 현장에 소공동체를 적극적으로 육성하고 이를 본당의 소공동체와 함께 발전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야 한다. 일곱째로는 고도로 발달된 과학문명이나 정치, 경제, 문화 등에 대한 신학적 정립을 통한 사회교리의 계승,발전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삶과 신앙이 유리되는 지금의 사도상으로는 세상 복음화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복잡다단한 현실사회를 복음적으로 식별해보고 이를 실천하는 길만이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도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영적이고 청빈한 사제상 정립'이나 '여성의 사제품 수여', '평신도의 종신부제직' '교구장의 임기제' 등 21세기 초입부터 교회내 뜨거운 감자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한 교회차원의 적극적인 의견수렴과 여과과정, 공론화하는 절차만이 남아있다고 본다. 그리스도께서는 산상설교(마태오 5,1-12)를 통하여 새로운 사회에 뜨거운 열망과 희망을 보여주신다. 이 시대에 가난하고 굶주리고,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받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어야 한다. 치열한 생존경쟁과 물질과 탐욕으로 어우러진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찾아가기란 쉽지않은 여정이다. 새로운 천년기를 맞이하는 사목자와 수도자, 평신도가 각각의 직분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가는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은 단지 꿈꾸는 미래가 아니다. 주위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을 켜서 어찌 됫박으로 덮어두면서 주위를 밝게할 수는 없다.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오 5, 16) <최영·사베리오/ 수원교구 사회복음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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