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331,332] 성서 자유 해석과 신앙 체험에 관하여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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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 작성일1999-08-18 | 조회수1,135 | 추천수5 | 신고 |
아래 송석진 형제님께서 질문하신 내용중 신앙체험과 성서의 자유 해석에
대해서는 필자가 올려 놓은 보다 더 상세하고 자세한 글들 - ’프로테스탄트적
성서관의 오류’, ’두 개의 종파가 다 옳은가? -종교 무차별론의 허구성’,
’무슨 종교를 믿든지 무슨 상관인가?’, ’지성인은 로마로- 왜?(1) (2) (3)’,
’어느 것이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인가?’, ’개신교 근본주의의 종말론’, ’믿
음만으로 구원될 수 있는가?-개신교 근본주의에 답한다’, ’당신은 구원받
았습니까? 라는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의 질문에 대해’, ’교황의 무류성에
대한 상세 고찰’, ’가톨릭의 혼인과 혼종혼’, ’가톨릭 교회에서는 왜 이혼
을 금하는가?’, ’과연 성서만으로 족한가?’, ’가톨릭은 우상을 숭배한다?’,
’개신교 자매님의 글 "카톨릭과 개신교"에 답하며’, ’ 개신교에서 부정하는
연옥과 죽은 이를 위한 기도’, ’루터는 진정 어떠한 인물이었나?’, ’소위
종교개혁에 대하여 (1) (2) (3)’, ’가톨릭 신앙과 개신교 신앙은 도대체 어
떻게 다른 것인가? (1) (2) (3)’, ’프로테스탄트에서 가톨릭으로(18인의 개
종 실기 중에서)’ -등등의 글을 참조하시기 바라며 필자의 아이디(saint72)
로 검색하셔서 찾아보시면 이보다 많은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신교인들의 경건한(?) 신앙 태도와 견주어 볼 때 외적으로는 가톨릭 신자들의 생활방식이나 태도가 느슨해 보이는 것은 어느 정도 맞 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구원의 문제가 외적 생 활의 모습으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개신교에서는 술과 담배를 금 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대개의 개신교 교파가 그런 경향을 나타내고 있습 니다. 오늘날은 심지어 그런 경향이 너무나 강해서 신앙을 갖지 않은 사 람들과 대화를 할 때면 늘 듣게 되는 이야기 중의 하나는 천주교 신자는 술, 담배에 자유롭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임에도 전혀 어색해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말과 함께 개신교 신자는 술, 담배를 금기시하고 사람들과 의 모임에도 영 분위기를 못 맞추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어찌보면 세인들의 눈에 비친 가톨릭과 개신교의 구분 잣대가 아닐 가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기도 합니다만 그렇게 세상 사람들이 구분할 정 도로 개신교의 금욕주의적인 성향은 극단을 향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개인 의 기호에 따라 선택할 것들도 종교의 이름 아래 묶어두려는 것은 가톨릭 신 자로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걸핏하면 성경에 나 와 있느냐 없느냐 가지고 옥신각신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이 어쩐 일인지 성경 에는 술, 담배를 금기시한다는 글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술, 담배를 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순진한 개신교인들이나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성경에 나 와 있기에 술 담배를 금하는 게 아니라 현대 위생학의 영향을 받은 일단의 20세기에 출현한 미국의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이 금욕주의적 종교 생활을 해 치는 물품의 사용(술, 담배)을 금하자고 주장한 뒤로 개신교 각 교파 사이 에 급속히 퍼져나간 말하자면 종교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 다. 미신이기에 조상 제사도 안 지낸다는 개신교도들이 취한 이 이상한 행 동은 여타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러한 행위에 대한 합리적 설명은 고사하고 그들 스스로 의문조차 제기한 바 없습니다. 그 결과 지금까지 개신 교의 한 특징처럼 굳어져 온 것입니다.
개신교 근본주의의 또 다른 특징은 종교와 현대 위생학의 결합 뿐만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의 형식적 율법주의를 맹목적으로 광신한다는 데 그 문제의 심 각성이 있습니다. 그들은 종교 편협주의자들로서 성서의 글자를 글자 그대로 해석해야만 한다면서 성경은 무오류한 책이다라는 궤변만을 늘어놓고서 그들 자신을 구약 시대 이스라엘만을 구원하시겠다던 ’심판의 하느님’, ’정의의 하느님’이 선택한 새로운 선민 내지는 유대인과 동등한 자격의 선민으로 동일 시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최후의 구원이 가능하고 이스라엘을 통 해서만이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시작된다고 봅니다. 결국 그들에게는 언제나 중요한 것은 심판의 때가 언제일 것인가와 그 순간을 맞이하기 위한 금욕적 인 생활 태도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비신앙인에게는 정신 병자들로 그리고 가 톨릭 신자들에게는 경건한 (?) 신앙 태도로 비춰지기도 합니다만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볼 필 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까지 유대인들에게 정의와 심판관으로서의 ’무서운’ 구약 의 하느님이 아니라 ’자애로움’ 그 자체인 ’사랑이신 하느님’ -신약의 메시 지 - 을 선포하십니다. 심지어 예수께서는 율법에 나와 있는 안식일에 소경 을 고쳐주실 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모함하며 비난할 때에도 ’나의 하느님 은 언제나 일하고 계신다’ 라고 말하며 당신의 무한한 사랑을 몸소 보여주셨 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도대체 성서의 말씀과 사랑의 완성이라는 예 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구분하지 못하고 구약의 이스라엘과 자신들의 개신 교를 동일시하는 그들 근본주의자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어떤 가톨릭 신자가 성사만 열심히 받고 나머지 개인의 삶은 나태하고 비난받을 행동으로 일관한다면 그것은 분명 ’훌륭한 가톨릭 신자’는 아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일상의 삶에서는 성실하고 선량함을 보이나 교회에 냉담 중이라면 역시 ’훌륭한 가톨릭 신자’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세우신 교회의 목적은 개인적 구원을 최종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점 이 개인의 구원만을 부르짖는 개신교 근본주의와 가톨릭의 차이입니다.
한국 「천주교 요리 문답」에는 "자기 탓으로 천주 교회 밖에 있는 자 는 구령하지 못하나니라"라고 했고, 그 중에는 "천주교회의 신덕 도리 하나라도 일부러 믿지 않는 열교인(裂敎人)"(n. 88, 89)도 구원의 은혜 를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신덕 도리’란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 로서 믿을 교리인데, 이를 도그마(Dogma)라고 합니다. 세례를 받은자로 서 이 도그마 중 한 가지만 믿지 않아도 그를 열교인이라고 규정합니다.
가톨릭 신자 중 누가 이 믿을 교리 중 하나라도 믿지 않거나 이설(異說) 을 제창하여 그것을 고집한다면, 교회는 하느님의 권위를 부인한 이 자를 가차없이 파문해 버립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단자는 한두 번 경고해 보고 그래도 말은 듣지 않거 든 그와 관계를 끊으시오. 그대도 알다시피 이런 사람은 옳은 길을 이미 벗어나서 죄를 짓고 있으며 스스로를 단죄하고 있는 것입니다."(디도 3, 10)라고 하였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하느님 권위를 한 점이라도 부인하는 것은 곧 그 전부를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독자는 프로테스탄트적 신앙과 가톨릭적 신앙의 커다란 차이를 여기서 도 살필 수 있을 것입니다. 프로테스탄트적 신앙은 주관적인 것이요 자유 주의적인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음을 믿고 자기도 이 구속 공로를 믿기만 하면 사죄와 의화의 은혜를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교리는 몇몇 중요한 교리, 즉 하느님의 존재, 그리스도의 천주성, 인류 구 속 등만 믿고 나머지 교리들 즉 세례 성사, 고해 성사, 성체 성사, 교회 통치 제도 등에 관하여는 믿든지 안 믿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 교파 안에서도 교리상의 이견이 분분하여도 내버려 둡니다. 그저 예수 를 믿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식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 예수를 따라가는 태도가 아니고, 주 예수께서 우리를 따라오라고 강요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께서 가르치신 대로 믿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믿고 싶은 대로 인정하여 주시기를 요구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그들 프로테스탄트들의 심정과 행동을 대변하는 말은 아마도 바로 아래
말이 될 것입니다.
즉 "당신이 세우신 교회 제도야 어떻든, 또 베드로 사도와 그 후계자들
에게 교회의 권위를 맡기셨든지 안 맡기셨든지 거기에 대하여는 관심없
습니다. 그런 제도는 워낙 우리 이성이 승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당신을 믿기만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회개하면 죄를 사하여 주시겠다고 하셨으니 회개만 보시
고 죄를 사하여 주시든지 고해 성사로 사하여 주시든지 그것은 당신의
재량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나 고해 성사가 당신이 세우신 것이든 아니
든 상관없이 나의 기성(氣性)에는 맞지 않습니다. 그저 혼자서 죄만 통
회하겠으니 내 죄만은 꼭 사하여 주셔야만 됩니다. 성체 성사에 당신이
실재하실 수도 있고 실재하지 않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쨋든 우리
는 그 ’실재’를 믿기는 참으로 어렵고, 단지 돌아가신 것을 기념하는 행
사 정도로만 인정하겠습니다. 언제든지 당신을 신뢰하는 그 정감(情感)
만은 변함이 없으니 당신은 우리를 꼭 구원하셔야만 됩니다…"라는 태
도인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예수더러 자기를 믿으라는 말입
니까. 독자가 만일 스승에게 자기 의견을 따라와 달라고 강요하는 제자들
을 가졌다면 과연 그들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은 아예 이렇게 처음부터 틀이 잡혀 있어서 교리, 즉 진리를 철저히 연구하려 들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으로 믿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진리를 더욱 깊이 연구 하려 해도 그것은 거의 헛수고에 가까운 일이 되고 맙니다. 신학 서적을 읽어보면 저자에 따라 의견이 다르고, 교직자들에게 문의하면 교직자에 따라 그 답이 다릅니다. 결국은 권태를 느끼는 동시에 예수를 믿으면 그 만이라는 결론에 귀착하고 맙니다. 신자들 뿐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교역 자들도 교리 문제를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문제를 삼으면 서로간에 의견 대립만 날카로워지므로 차라리 예수를 믿 으면 그만이다에 눌러 앉아 있으려 할 뿐 더 나아가기를 두려워합니다. 프 로테스탄트 신자들의 영적 빈혈 증상의 주요 원인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가톨릭 신앙은 이성적이며 객관적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한 번 계시하신 이상, 그것이 우리 이성에 영합되지 않을지라도 우리 이 성을 굴복시켜(2고린 10, 5 참조) 그에 승복하고 신앙하여야 합니다. 그렇 지 않으면 대죄가 됩니다.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면 기탄없이 파문 해 버립니다. 교리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기는 가톨릭을 따를 교회가 없습 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 이래 일관된 태도입니다.
교리적 신앙을 도외시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 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그만이다’ 는 신뢰적 신앙은 그리스도교가 성립 된 지 1500년 후에 생긴 병든 잎입니다.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관과 개신교 신자들의 신앙관은 먼저 올린 필자의
글 - ’가톨릭 신앙과 개신교 신앙은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1) (2) (3)’
- 에서 말했듯이 하늘과 땅 이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위의 글을 찾아보시
기를 부탁드리며 가톨릭의 교리적 신앙을 말하고 있는 다음의 성서 말씀
으로 필자의 두서 없는 답변을 마칠까 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들
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은 내 아버지에게서 사랑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
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
키지 않는 사람이다." (요한 14, 15. 21-24).
갈현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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