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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5] 영도자의 권위 굳힌 '대교황' 레오 1세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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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1999-08-29 조회수579 추천수1 신고

 

[5] 영도자의 권위 굳힌 ’대교황’ 레오 1세

 

■ 영도자의 권위 굳힌 ’대교황’ 레오 1세

 

베드로를 선두로 초대 교회의 30여명의 교황들은 거의가 다 순교가 아니면 옥사

또는 유배를 당했다. 박해자는 로마 황제들이었다. 그들은 야만적 폭력을 통해

끊임없이 교회와 교황에게 도전하여 박해를 가했다. 그러나 교황과 카이사르

사이의 투쟁, 영권(靈權)과 속권(俗權)의 투쟁은 결국 십자가의 승리로 끝났다.

 

311년의 소위 콘스탄티누스이 전환기를 맞으면서 교회는 비로소 시민권을

획득하고 동시에 지하생활과 고별하게 된다. 그후 교황은 라테란 궁전에 거처를

정하고 또 그것에 성 요한 라테란 대성전을 세우게 되니, 그것은 모후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교사인 로마교회의 주교좌 성당이 되었다.

 

그러나 미구에 게르만 민족 대이동이 시작된다. 여기서 로마 대제국의 붕괴가

시작되고 로마시는 그를 방어해 줄 주인을 잃게 된다. 이 무렵 다행히 로마

교황좌에 위대한 인물이 나타나게 되니 그가 바로 레오 1세였다.

 

서 고트족이 로마를 공격했고 이어 훈족이 로마를 침입했다(452). 로마황제는

그들의 침략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교황에게 기댔다. 과연 레오

교황은 로마 시외로 나가 훈족의 아틸라왕과 직접 담판함으로써 그들을 물러가게

했다. 이리하여 로마는 멸망 직전에서 구출될 수 있었다. 역사는 레오의 이

위대하고 용감한 행위를 깊이 기억하였고, 특히 화가 라파엘은 레오와 아틸라의

만나는 극적인 장면을 그려 바티칸 박물관에 남겼다.

 

이번에는 가장 야만적인 반달족이 가이세랙을 앞세우고 로마를 공격해

왔다(455). 이번에도 레오 교황은 용감이 가이세릭과 대면하고 그와 담판했다.

교황은 로마시를 그들의 약탈에서 구해내는 데까지 성공하지는 못했으나 최소한

로마시를 방화에서, 또 로마 시민을 살육에서는 구해 낼 수 있었다. 이로 이해

교황직의 위신이 아주 높아졌고 또 서 로마제국의 멸망(476)이란 최대의

불운마저도 이겨낼 수 있었다.

 

이렇게 교황직은 교회 영역을 초월하는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레오 교황과 그 후계자들은 그러한 기능을 떠맡게 되었다. 이칼리아

주민들은 전쟁과 기근이 닥치면 으레 교황을 그들의 유일한 보호자로 바라보게

되었고, 교황들 또한 위험을 무릎쓰고 게르만족과 최고의 정치적 협상을 했다.

또한 굶주린 주민들을 위해 교회의 소유지에서 곡식과 양식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교황들은 지난날의 황제들의 임무를 자신의 임무로 인식하였고 또

주민들도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다. 현지 주민들의 의식에는 교회의식과

시민의식이 하나가 되어 있었다. 하르나크의 말과 같이 이제 로마교회는 종교적

의미에서 서 로마제국이었고, 로마주교는 사실상의 황제였다.

 

레오 교황의 재위기간을 통하여 로마 주교좌의 세력과 명망은 더할 수 없이

성장되었다. 대외적으로 교황은 사실상 로마시의 수호자가 되었고, 동시에

대내적으로도 로마교회의 최고 통치권의 기반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후 레오에게 ’대(大)’란 존칭을 부여하게 된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실제로 그는 451년 동방의 ’칼케돈’에서 개최된 제4차 공의회에 그의 사절을

파견하여 공의회를 사회하게 했고, 또 그의 유명한 교의서한(敎義書翰)을 보내어

정통신앙을 옹호하게 했다. 그의 이러한 강력한 간섭으로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단성설(單性說)을 단죄하는 한편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한 위격(位格)에서 혼합되지도 않고, 분리되지도 않은 채 결합되어

있음을 신조로 선포하게 되었다. 레오 교황의 교의서한이 이 신조의 기초가 된

것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역사가들은 이 서한을 교황의 최초의 무류적

성좌선언(無謬的 聖座宣言)이라고 까지 평한다.

 

레오 대교황 이후 역사에서 두 번째로 대교황으로 불리게 될 인물이 또

나타났는데 그가 다름아닌 성그레고리오 1세(590-604)였다. 그는 레오와는 다른

스타일의 교황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수도자의 겸손을 지닌 교황이었다. 이미

그의 세 누이가 수도자였고, 자신도 수도자가 되어 6개의 수도원을 건설했다.

교황으로 당선되었을 때 그는 "나는 물속에 깊이 잠겨 파도에 휩싸여 있다"는

시편의 구절을 읊으면서 거절의 의사를 나타냈다고 한다. 부득이 교황직을

수락한 후에도 그는 수도자 시절에 애용하던 ’하느님의 종중의 왕’이란 말을

즐겨 사용했다.

 

교황직에 대한 이 겸양의 호칭은 그후 교황들에게 애용되기에 이르렀다. 직책에

대한 겸손이란 점에서 그레고리오는 모범 교황이었다. 1073년 성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직을 수락하면서 "공포와 전율이 나를 엄습하고, 암흑이 나를 가리고

있다"는 겸손을 말을 했고, 1958년 요한 23세는 콘클라베(conclave, 선거회)에서

교황직을 수락하느냐는 물음에 "나는 당신의 소리를 두려움에서 받아들입니다.

나의 당황함이 어떤 것인가는 나의 비천함이 어떤 것인가에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전환기에서 새 시대를 개척할

사명을 의식한 교황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14년간의 교황직은 세계사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그는 대외적으로 중세의 주인이 될 게르만족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그들을 개종시켰으며 영국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앵글로 색슨족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대내적으로 성직자 생활을 쇄신하고 미사를 오늘의 형식으로

정착시켰으며 또 그레고리안 성가도 개혁했다.

 

그는 또 학자 교황이었다. 그는 암브로시오, 예로니모,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서방교회의 4대 교회학자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에는 저술가의 모습과

함께 성신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항상 곁들여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교황직은 성레오 1세와 성 그레고리오 1세에 이르러 서구에서의 지도자적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고, 그것은 동시에 다가오는 중세의 기반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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