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6] 교황의 명칭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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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 작성일1999-08-29 | 조회수631 | 추천수2 | 신고 |
[16] 교황의 명칭
■ 교황의 명칭
오늘날 교황을 뜻하는 ’파파(papa)’란 호칭은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 본뜻은 ’아버지’이다. 이 호칭이 로마주교 즉 교황에게 국한되기 시작한 것은 5세기 중엽부터이고, 그 전에는 일반주교들과 대수도원의 원장들도 이 호칭으로 불렸다. 그러나 11세기부터는 완전히 교황에게 국한된 호칭이 되었다.
교황의 호칭중에도 이 밖에도 ’성부(聖父’ ’성하(聖下)’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호칭들은 아직 교회 안에서의 교황의 위치나 교회 밖에서의 교황의 정치적 지위를 나타내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그런 명칭은 다른 명칭에서 찾아야 한다.
1983년 ’교황청 연감’에 보면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밑에 무려 9개의 명칭이 나열되어 있다. 즉 로마주교,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 으뜸 사도의 후계자, 전교회의 대사제, 서구의 총대주교, 이탈리아의 수석주교, 로마 관구의 수석 대주교, 바티칸 시국의 원수, 하느님의 종 중의 종 등인데 이 중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제일 큰 활자로, 로마 주교를 다음으로 큰 활자로 표시함으로써 기타 명칭들에 비해 이 두 명칭이 가장 중요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상 9개의 명칭 중에서 ’바티칸 시국의 원수’는 가장 늦게 생긴 것이고, 또 유일하게 교황의 정치적 지위를 나타내는 명칭이다.
이 명칭은 1929년 교황청과 이탈리아 국가와의 정교조약을 통해 바티칸 국가가 창설됨으로써 비로소 교황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바티칸 시국의 원수’란 명칭을 제외하면 다른 모든 명칭은 교회개념과 관련되는 것들이다. 교회제도면에서 교황은 첫째로 로마주교이고 동시에 유럽교회의 총대주교, 이탈리아의 수석주교, 로마 관구의 수석 대주교이다. 제도면에서 볼 때 교황은 다른 주교들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주교에 불과하고, 비록 로마주교일지라도 로마교구를 책임진 주교에 불과하다. 그러나 최초의 로마주교가 베드로 사도였다는 점에서 로마주교의 위치는 전혀 다른 의미와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즉 로마주교는 다른 아닌 베드로의 후계자이기 때문이다.
이 로마주교의 후계자, 즉 베드로의 후계자란 명칭에서 미구에 가장 중요한 명칭이 파생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란 명칭이다. 이 명칭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에서 비롯되었는데, 그는 그때까지 교황에게 적용되어온 ’성베드로의 대리자’란 명칭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란 명칭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로써 교황은 베드로와 같이 그리스도의 대리역을 맡은 사람이 되었고, 베드로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중재자 구실을 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종중의 종’이란 명칭은 교황 그레고리오 1세(190-605) 때부터 사용되어온 것으로, 교황 자신에 대한 겸칭(謙稱)에 불과하고 다른 뜻을 별로 없다.
교황직의 근본적이고 유일한 특성은 그 신적 기원,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직접 이 직책을 베드로와 그 후계자들에게 위임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스도는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터인 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16;18-19)고 하며 교회에 대한 최초의 사목직책을 베드로와 그 후계자에게 위촉했던 것이다. 이 성경구절은 간략한 것이지만 교황직의 신적 기원에 대한 결정적이고 중심적인 증명이 되었다.
그러나 그후 교황직의 신적기원에 대한 반대가 교회 내외에서 끊이지 않았고, 그래서 교황직은 그의 수위권에 대해 교회 내외로부터 계속 도전을 받아야 했다.
교회 밖에서는 일찍부터 이 성경구절이 마태오 복음 외에 다른 복음에는 없고, 따라서 후기에 삽입된 것이라고 하며, 교황직의 신적기원을 반대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교회 내외서도 이 성경구절을 베드로에서만 국한시키려 하지 않는 사람이 나타났다. 한 유명한 교우는 그 구절을 베드로에게 국한시키지 않고 베드로를 통해 모든 사도들을 포함한 것으로 해석하려 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동등자 중의 첫째(Primus inter pares)’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곧 ’주교 지상주의(Episcpoalism)’로 불리는 것이다. 이것은 주교들이 그들의 교구에 대해 교황의 지나친 간섭을 의식한 데서 발생한 것으로, 로마의 중앙집권에 대한 주교직의 자립을 의미한다. 이런 주장은 교황직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나타났고, 비단 교황의 수위권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났다는 점에서 문제와 심각한 일면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교황직은 그때마다 자신의 수위권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특히 레오 1세 교황은 이미 5세기 중엽에 그것을 이론화였고, 그것은 마침내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신조로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그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주교들에게 보다 큰 권한을 부여하였다.
교황의 수위권은 주교 지상주의자들로부터보다, 공의회 지상주의자들로부터 더욱 강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교황을 공의회에 예속시킬뿐더러 경우에 따라서는 공의회가 교황을 폐위시킬 권한까지 갖는다고 주장하였다.
불행히도 이런 주장은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에서 교황을 폐위시키고 새 교황을 선출함으로써 한때 크게 득세하였으나, 점차 쇠퇴하여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까지에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1917년의 교회법은 물론이요, 최근에 반포된 교회법에서도 교황은 공의회의 주장임을 명문화하였다. 즉 교황만이 공의회를 소집하고 폐회할 수 있고, 교황만이 직접 또는 사절을 통해 공의회를 주재하고 의제도 결정한다.
무엇보다도 공의회의 결의는 모두 교황의 인준을 받아야 하고, 교황의 이름으로 공포될 때 비로소 법적 효력을 갖게 된다고 명문화하였다.
그러므로 교황직은 전교회의 모임인 공의회를 통솔할 수 있는 권한까지도 겸한 최고의 주교직이다.
우리는 역사 안에서 교황들 다시 말해서 세계사와의 관계에서 교황의 역사를 일별하였다. 교황들 중에는 훌륭한 교황도 많았으나, 기대에 어긋난, 좋지 못한 교황도 적지 않았다.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전개하는 교회의 역사가 하느님의 위촉과 인간의 허약 사이의 긴장과 모순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종말 완성을 향해 전진하고 있듯이 교황사에 있어서도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나약 사이에서 긴장과 충돌이 끊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세우고, 그것을 지속시킬 사명을 인간에게 위촉한 분이 바로 그리스도 주님이기 때문에 교회는 교황의 지도하에 존속할 수 있었다. 인간적인 배반은 이미 베드로 사도에게서 시작된 것이지만, 그후 많은 교황들의 배신은 또한 남은 뛰어난 교황들의 성성에 의해 극복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교황의 역사는 베드로로부터 요한 바오로 2세에 이르는 2천년간 여러번 위기를 극복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가장 객관적이고 가장 정확한 증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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