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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7] '위령집'과 교황의 수위권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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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1999-08-29 조회수468 추천수1 신고

 

[37] ’위령집’과 교황의 수위권

 

♤문: 교황들은 그들의 강탈한 수위권에 대한 기초를 마련하기 위하여

’위령집’으로 알려진 일련의 문서들을 로마에서 위조하지 않았는가?

 

교황 니콜라오 1세(858-867)는 이 문서들을 다른 교회들을 통치하기 위한 그의

새로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사용하지 않았는가?

 

♠답: ’위령집’은 로마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850년경 프랑스의 한

도시(랭스나 투르)에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칼 대제(800-814)의 사망 후의

무정부 상태로 미루어 보아 ’위령집’의 익명의 편집자는 성직자를 수석 대주교와

평신도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서들 중 많은 것이

교황들이 실제 서한들로 이루어져 있는 바, 예를 들면 레오 1세(440-461)의

서한도 그 중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 서한은 그 전세기의 교황들의

서한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 문서들은 교회의 본질적인 행정에 아무것도 새로운 것을 첨가하지 않았고,

다만 세속 군주들로부터의 부당한 비난과 랭스의 힌크마르 대주교 같은 전제적인

고의 성직자들의 횡포로부터 주교들을 보호하려는 것을 의도했을 뿐이다. 이

문서들이 그토록 기꺼이 그리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아무런 새로운 법안을 첨가하지 않은 데에 있는 것이다.

 

이 문서들이 교황의 수위권을 고양시키는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오늘날 많은 학자들에 의해 인정되고 있다. 교황 니콜라오 1세는 ’위령집’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이를 한 번도 이용하지 않았다. 로마는 교황

하드리아노2세(867-872)가 아주 사소한 일에 있어서 한 번 인용한 것 외에 레오

9세(1049-1054) 시대까지 ’위령집’을 완전히 무시하였다.

 

’위령집’에 포함한 문서들이 신빙성에 대해서는 종교개혁이 있기 이미 오래

전부터 가톨릭 신학자이며 교회법 학자들이었던 베드로 컴스터(1178),

비테르보의 고드프리(1180), 투르네이의 스테파노(1203), 쿠사의 니콜라오(1431)

및 트르크마다의 주앙(1468) 등에 의해 의문시 되었었다. 로마 교회에서는

’위령집’에 대해 매우 초연한 자세로 지켜만 보고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교회는

교황의 주장들 만으로도 9세기의 프랑스 교회법 학자들의 호의적이나 정직하지

못한 위조 문서들을 독자적으로 밝혀낼 수 있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 교황의 계보는 40년 동안 계속된 ’서구 대이교’(1378-1417) 동안에 끊어진

것이 아닌가?

 

♠답: 그렇지 않다. 교황의 현재의 계승이 로마계 또는 아비뇽계를 통하여 계속

이어졌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가들과 공식적인 바티칸

목록은 로마계 교황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긴 기간에 걸친 ’아비뇽 유수’를 끝내고 로마에

교황좌를 재건한지 거의 1년만인 1378년 3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

 

추기경단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프랑스인들이 프랑스인을 교황으로 선출하여

다시금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겨갈까 두려워한 로마의 교황선거장 앞으로

몰려가서 로마인 교황 또는 최소한 이탈리아인 교황을 선출해 줄 것을 요구했다.

추기경들은 민중들의 요청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지만 4월 8일에

바리의 대주교인 이탈리아인을 전원 일치로 선출했고, 그는 자신을 우르바노

6세로 명명하였다. 이 선거는 매우 특수한 상황에서 행해졌을지라도 추기경들은

우르바노를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하고 있었음에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들은

6명의 결석 추기경들에게 우르바노의 당선을 정식으로 통보했으며 또한 이들은

우르바노 교황과 함께 성주간 전례를 집전했으며 그에게 성직록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8월 2일이 되자 추기경은 우르바노를 선출한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우르바노는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부터 경솔하고 기이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는데,

공공연히 추기경들을 비방하는가 하면 한 추기경에게는 폭력을 행사하기까지

했다. 추기경들은 그들에게 교황을 폐위시킬 권한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오직 하나 가능한 길이 있다면 교회법에 협박을 받아 행해진 강압적인

교황선거는 무효라는 조항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추기경들은 우르바노의

선출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르바노를 선출한 교황선거가 바로 문밖에서 시위하는 로마 민중들의 위협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모든 추기경들이 우르바노를 거부했으며 9월

20일에는 클레멘스 7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했다. 우르바노가 교황으로

선출된 후 처신을 좀 더 올바르게 했었다면 모든 사람이 그의 선출의 적법성

여부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두 번째 선거를 치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클레멘스의 지위를 확고한 것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모든

추기경들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상충되는 주장과 증언들이 오가는 사이에서 외부인들이 그 사건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국가들은 정치적 노선에 따라

각기 의견을 달리하게 되었다. 영국과 독일, 플랑드 지방에서는 우르바노를

인정하는 반면에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스페인에서는 클레멘스를 인정했다.

신학자들, 교회법 학자들, 심지어 성인들까지도 국가적 노선에 따라 분열되었다.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는 우르바노를 지지한 반면에 성 빈첸시오 페레는

프랑스인인 클레멘스를 옹호했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모든 증거물들을 근거로하여 일반적으로

우르바노 6세를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하고 있다. 우르바노의 뒤를 이어

보니파시오 9세, 인노첸시오 7세, 그레고리오 11세가 정당한 후계자로서

교황직을 이어나갔으며 클레멘스 7세의 뒤를 이어 베네딕토 13세, 알렉산델 5세,

요한 23세는 대립 교황이 되었다.

 

이 ’대이교’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이교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어느 쪽에서도 신앙의 일치나 교황의 수위권을 문제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누가 합법적인 교황인가를 결정짓는

문제였다. 1876년에 미국에서 헤이즈를 대통령으로 선출한데 대한 합법성 여부가

심각한 의심을 자아내게 되었다. 이 문제를 놓고 민주당과 공화당 간에 내란이

일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양쪽 편에서 다 누군가 진정한 대통령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했을 것이다. ’서구 대이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가톨릭

교도들은 누군가 진정한 교황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으나 누가 합법적으로

선출된 교황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교황직의 계승은 로마측 계보를

통해 끊어지는 일없이 이어졌으며 이 문제에 대한 모든 논의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마르티노 5세(1417-1431)를 선출함으로써 종결지어졌다.

 

론칼리 추기경이 자신을 요한 23세로 명명한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이

선택으로 교회사상 요한 23세란 이름으로 재직한 합법적 교황이 없었음이

명백해졌다.

 

가톨릭 교도들은 이 수치스럽고 비극적인 대이교 사건을 기꺼이 인정하고 있다.

이는 교황직의 위신과 권위를 손상시켰으며 16세기에 일어난 반란의 불씨가

되기도 하였으나 그 반면에 이는 교황직이 신성하고 영구 불변의 것임을

밝혀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교황직이 단순히 인간이 만들어낸 지위에

불과했다면 이와 관련해서 그토록 큰 혼란의 와중에서 어떻게 그 직책이 지속될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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