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너의 눈을 키워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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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중규 | 작성일2001-03-07 | 조회수3,897 | 추천수1 | |
우리가 "이 우주는 무한하다"할 때, 아니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무한한 바다! 무한한 황야!"할 때, 그 무한이란 우주나 바다가 너무 넓고 커서 그 크기나 끝을 잘 알 수 없다는 의미에서의 무한이지, 다시 말해 "무한한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에서의 무한이지, "크기가 없다"는 그런 뜻의 무한은 아니다. 그러니 그 무한을 순수한 개념으로 쓴다 해도 그것은 "크기가 있다, 없다" 등등처럼 크기와 관련을 갖는다.
그러나 그런 것하곤 전혀 다른 의미의 무한이 있다. 그것이 우리 종교에 있어서의 무한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 종교에 있어서 "영원(구체적으론 영생)"이란 개념이 단순한 "시간의 계속됨"이 아니고 초시간적인 의미를 갖고 있듯, 이 "무한" 역시 그렇게 초공간적인 개념인 것이다. 이 개념을 이해하느냐에 따라 우리 종교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깨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종교에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할 때, 그것은 그냥 "잴 수 없는 사랑"을 말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어떻다"고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다는 그런 것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면 하느님의 사랑 속엔 정말 무한할 정도의 다양한 모습의 사랑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질투하시고 마구 질타하실 때도 있고, 몸소 희생을 하시는 그런 어머니 같은 사랑도 있기에, 우리는 "사랑의 행위" 그것 하나만으로는 하느님이 도체 어떤 분인가를 한마디로 표현할 순 없는 것이다.
그것이 여기에서 말하는 "무한하다"는 단어의 뜻이다. 어쨌든 우리 종교의 신앙에 대한 오해의 대부분은 이 "무한"이란 개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복음서에서 무한의 의미는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가.
"참새도 독수리도 같게 보시고, 버린 돌이 주춧돌이 될 수 있고, 말째가 첫째로 될 수 있는", 또는 "작은 겨자씨 하나가 가장 큰 나무로 변할 수 있는, 밀 알 하나가 썩어 많은 열매를 맺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서 잃어버렸던 양 한 마리를 되찾은 것을 하느님나라에선 더 기뻐하는, 하나의 악행 때문에 아흔 아홉의 선행마저 헛되게 될 수도 있는, 이웃과 형제에 대한 사랑이 온 우주를 사랑의 장으로 만들 수 있는, 우주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면서도 머리카락 하나조차 그분의 뜻에 따라 다스리는", 또는 "예수의 희생으로 인해 온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그를 믿는 자가 구원받을 수 있는, 우리의 옳은 기쁨이 그의 기쁨이 될 수 있는, 우리의 죄악이 그의 고통과 슬픔이 될 수 있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부활의 영광과 함께 할 수 있는", 또는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그의 말씀은 일 점 일 획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그리고 "산상수훈의 여덟 가지 참된 행복" "마리아의 마니피캇" "온갖 역설적인 말씀과 기적들" 한마디로 예수 종교의 모든 것이 이 개념을 말해 주고 있다.
그걸 옳게 이해할 때, 예수 종교 그 모든 걸 이해하게 된다.
흔히 범신론자나 이신론자들이 "하느님은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존재자다"라는 말 때문에, 인격신을 상정 못하는 이유가 그 오해에서 비롯된다. 하느님은 초공간적인 존재이기에 인간의 몸을 취해 발현하실 수도 있다. 또한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무한한 존재인 하느님께 품어질 수 있는 것도 거기에 있다. "무(無)의 무(無)이자 침묵과 부재(不在)의 존재로서의 하느님"인 동시에, "성령(聖靈)이 되시어 큰 소리로 말씀하시고 인간의 온갖 사생활에도 관여하시는 그런 분"으로도 될 수 있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것은 일견 역설적이고 모순되게 보인다. 마치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가 분명 존재하듯이, 그렇다 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누가 그를 향해 "넌 존재하고 있지 않아!"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양식의 다양성은 다름 아닌 그것을 받아 모시는 우리 자신의 천차만별적인 성격에서 오히려 비롯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같은 사물을 접하고서도 보는 이마다 모두 다르게 받아들이는 까닭은 시점의 차이에서도 비롯되겠지만 각자가 지닌 눈의 한계의 차이에서도 연유한다.
"눈이 까짓껏"이라는 말이 있다. 과연 우리는 우리 눈의 "까짓껏"만큼만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아무리해도 해결치 못하는 모순된 일조차 쉽사리 해결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그만큼 더 넓고 큰 눈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인(聖人)과 범인(凡人)의 차이다. 사실 우리가 사물을 불완전하게 보는 것은 우리의 눈이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동시에 하느님께서 창조의 그 날 우리 눈에는 불완전하게만 보여지는 이 세상을 "참 좋게 보신 것"도 그의 눈이 완전한 데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 눈으로 봐선 대단히 덜된 형편없는 인간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베드로나 막달라 마리아 같은 이에게서도 예수의 눈에는 완전한 그 무엇이 분명히 보이셨고 결국엔 그 자그만 불씨로 활활 타는 불길을 일구어 내셨다. 겨자씨나 금화 한 닢 또는 들꽃이나 참새 한 마리로써도 하느님나라의 이야기를 펼치시는 그분의 눈을 보라. 풍랑 속에서도, 무엇보다 반대자들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빛처럼 밝혀 드러내시는 그분의 눈을 보라. 과연 그분의 눈앞에 불완전한 존재로 낙인찍혀질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느님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의 무한하고 완전한 사랑은 그 때문에 모든 곳에 두루 계신다. 즉 편애가 될 수 없는 성질의 사랑이다. 모든 이를 똑같이, 아니 편중 없는 사랑이기에 똑같게 마련인 사랑을 펼치신다. 단지 우리의 눈이 그 사랑을 "까짓껏"만큼만 받아들일 수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이 없다고 떠드는 자는 그의 그릇이 작거나 까막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탓하기에 앞서 그대의 눈을 키워라. 그럴 때 모든 것으로부터 하느님의 사랑을 볼 것이고 그대의 가슴속으로부터도 그것이 느껴져 솟아날 것이다. 이처럼 이 우주의 모든 것은 완전히 열려 있다. 문제는 그것을 보고 받아들이는 그대의 눈에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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