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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이사야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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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2 조회수7,874 추천수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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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입문

 

 

1. 이사야서의 형성 과정

 

이사야서에는 모두 66개의 장이 결집되어있는데, 여러 가지 면에서 이들이 모두 동일한 시대의 것들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어떤 책의 저자가 여럿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실 구약성서의 적지 않은 책들이 다수의 저자들에 의한 합성물임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무명인 데 반하여, 이사야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어떤 시대에 살았던 한 인물의 이름 아래 전해진다(1,1). 많은 사람들은 이사야서 전체가 이 한 사람에게서 유래한다고 믿었고 또 아직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이에 관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견해는 기원전 2세기에 저술된 집회서에 잘 나타나있다. 히즈키야 임금의 치세 아래 예언자들의 활동에 대해서 말한 다음, 이 책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사야는 강한 신통력을 가지고 미래를 내다보았으며, 슬피 우는 시온 사람들을 위로하였고, 세상 종말까지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었으며 감추어진 일들을 사전에 미리 알려주었다”(집회 48,24-25).

 

그런데 저자가 여럿이라는 사실이 이 예언서의 통일성을 말하는 데에 저해가 되지는 않는다. 다만 이 통일성은 몇 세기를 걸쳐 펼쳐지는 지속성 속에서, 그리고 특정 주제들의 항구성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가 여럿이라는 점에 대한 가장 명백한 증거는 이른바 제2이사야의 작품이 시작되는 40장의 첫머리에 나타난다. 어떤 분명한 중간 과정도 없이 그 배경이 기원전 8세기에서 갑자기 기원전 6세기의 유배 시대 한가운데로 옮겨가는 것이다. 이사야는 홀연히 사라지고, 아시리아는 바빌론으로 대체되어 이후 이 바빌론만이 자주 언급된다. 그리고 바빌론을 정복하고 유다인들이 귀향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장본인인 메대와 페르샤의 임금 고레스가 여러 번 직간접적으로 언급된다(41,2; 44,28; 45,1).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할 때, 40장과 함께 새로운 책이 시작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 제2이사야서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따로 이야기될 것이다. 

 

40-66장이 이렇듯 분명하게 특색지어진다 하더라도, 이것들만이 이 예언서 가운데에서 분명하게 이사야 시대 이후에 생겨난 부분은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36-39장이, 물론 여러 중요한 변형들과 함께, 열왕기 안에 들어있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2열왕 18,13-20,19). 또한 34-35장은 유배 시대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으며 제2이사야의 작품과 유사하다. 끝으로 통상 ‘이사야의 묵시록’이라 불리는 24-27장은 기원전 8세기 사람들의 사고와 표현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예언자 자신과 결부되는 본문들 안에서도(1-12; 13-23; 28-33), 주석가들은 일정한 분량의 단편들이 예언자보다 후대의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저자의 단일성을 인위적으로 증명하려 드는 일이 없이, 이사야서의 합성적인 성격을 수긍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만 이사야 예언서의 형성 과정을 제시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많은 부분 가설을 내포하고 있는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완성은 56-66장이 전제하는 바와 같이 유배 시대 이후, 그리고 귀향 이후에 이루어진다. 편집자들은 흩어져있는 조각들만이 아니라 이미 진정한 의미의 문집들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사야서의 핵심은 주로 자서전적인 요소들 특히 자기의 소명과 예언자로서의 사명 수행에 대해서 예언자 자신이 들려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6장). 

 

예언자 자신이 직접 기록 작업을 했다는 사실이 8,1.16 및 30,8과 같은 본문들에 의해서 밝혀지기는 하지만, 그가 선포한 신탁의 기록은 많은 부분 그가 직접 하지 않고, 그의 지시에 따라서 또는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에 그가 선포한 말과 사건들 사이의 일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사야의 제자단은 먼저 그의 가족들, 곧 상징적인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자기의 사명 수행에 참여시킨 아들들과, 8,3에서 여예언자로 불리는 그의 아내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확대된 제자단은 (어떤 이들은 이 집단을 진정한 의미의 ‘이사야 학파’라 부르기도 한다) 스승의 신탁들에서 출발하여 문학적 활동을 하게 된다. 이들은 또한 기원전 587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함락과 성전의 파괴 그리고 유배라는 대환난 이후,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의 핵심이 되는 성실한 “남은 자들”을 이루었음에, 또는 적어도 그들을 예시했음에 틀림없다. 

 

이사야서 안으로 들어간 문집들의 수와 규모에 대해서는 추측만을 할 수 있을 따름이다. 함께 모아진 전체 신탁들과 역사 이야기들은 대부분의 다른 예언서들, 특히 예레미야서와 에제키엘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다음과 같이 세 부분을 포함하는 전통적인 도식 속으로 삽입되었다. 

 

가. 이스라엘에 내려지는 심판에 대한 예언. 

나. 이방 민족들의 불행에 대한 예언. 

다. 주로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의 약속. 

 

그런데 여러 모음들이 이사야서에 받아들여질 때에, 종종 이미 위와 똑같은 도식으로 구성되어있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편집될 당시에 이 전체적인 틀 속으로 다시 분류하여 집어넣기에는 어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1-39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단락들을 나누어볼 수 있다. 

 

1  책 전체의 도입 부분으로서, 여러 시대의 신탁들 가운데에서 가려낸 것들로 이루어졌으며, 예언자의 선포 내용을 요약하여 제시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녔다.

2-12  이스라엘과 유다에 관한 예언들로서 대부분이 이사야서에서 가장 오래 된 것들이다. 

13-23  이방 민족들에 대한 신탁들. 

24-27  주로 묵시록의 성격을 띤 문단. 

28-33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약속과 위협을 담은 다양한 신탁들. 

34-35  또 다른 묵시록적 단편들. 

36-39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공격할 당시 이사야의 활동에 대한 이야기.

 

 

2. 예언자 이사야

 

1) 예언자의 활동

 

계속해서 새로운 부분이 첨가되는 과정이 끝나지 않는 열린 책이었던 이사야서는 도서관에, 어쩌면 예언서들의 도서관 그 자체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선집이라는 면이 예언자 이사야가 생애 중에 그리고 사후에 백성의 기억 속에 남아 수행한 본질적인 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이 비범한 인물은 기원전 740년 비교적 젊은 나이에 예언하도록 부름을 받았고, 그의 활동은 적어도 40년에 달하는 기간에 걸쳐 전개된다. 그가 역사의 무대 위로 등장한 것은, 아자리야라고 불리기도 한 우찌야 임금의(2열왕 15,1-7 참조) 오랜 치세 아래 유다가 누렸던 번영의 시대와 일치한다. 그러나 번영은 사치의 팽배, 모든 토지들을 독점하는 지주 계급의 출현,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억압 등의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그래서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정의에 반대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단죄하고, 그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를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이사야보다 몇 년 앞서 아모스 예언자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똑같은 언사를 사용한 적이 있다.

 

이사야가 정치 활동의 전면에 나타난 것은 아하즈 임금의 치세 초기의 일이다(2열왕 16,1-20). 당시,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하는 아람 왕국과 사마리아를 수도로 한 이스라엘 왕국은 점점 위협적으로 되어가는 아시리아의 세력에 대항하려고 시도하는 반면, 유다 왕국의 아하즈는 자진해서 아시리아 임금의 보호 아래 들어가는 것이 최선의 해결 방안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아하즈는 연합 전선 안으로 자신을 강제로 끌어들이려는 이 두 이웃 나라에 대항하여 징벌군을 보내줄 것을 아시리아 임금에게 요청한다. 이 원정은 실패로 끝나지만 아하즈는 자기의 친아시리아 정책을 계속한다. 기원전 734년을 전후하여 이 일이 일어난 뒤, 이사야는 자의로든 타의로든 십여 년간 공적인 생활에서 물러나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스라엘의 여러 지방에서도 직접적으로 느끼게 되는 아시리아 세력의 점진적인 상승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시리아는 기원전 722년 이스라엘을 침공하게 된다. 

 

기원전 716년 히즈키야 임금이 아하즈를 계승할 때(2열왕 18 - 20), 이사야는 다시 정치 무대의 전면에 나타난다. 그렇지만 새 임금은 주님께 성실하면서도, 국정 수행에 있어서는 예언자의 조언을 조금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이사야는 종교적인 이유로 해서, 유다가 비록 아시리아에 대항하기 위한 방편이라 할지라도, 에집트 및 그 밖의 인근 민족들과 동맹을 맺는 것을 계속 반대한다. 어떠한 당위성이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연합 전선의 구축은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치적 기회주의에 대항하여 이사야는 주님에 대한 충실성을 요구한다. 그는 바로 이 하느님에 대한 충실성이라는 시각을 통해서, 아시리아가, 주님에게 반항하고 그럼으로써 그분에게 일종의 적이 되어 그 교만에 대한 벌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된 백성을 책벌하기 위한 하느님의 막대임을 점점 선명하게 보게 된다. 

 

기원전 701년에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아시리아 임금 산헤립의 군대가 퇴각하게 되는데, 이는 이미 이사야 예언자에 의해서 예고되었던 바이다. 이렇게 일어난 사건의 원인과 결과에 대하여 예언자와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 근본적인 의견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이 이사야의 품위를 높였음에는 틀림이 없다. 

 

예언자 이사야가 왕족에 속한다고 추측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권위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언자로서의 그의 사명에서 유래한다. 많은 이들이 그의 조언을 청하기는 하였지만,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를 따랐다. 공적인 종교 대표자들 곧 사제들과 예언자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으며, 그에게 야유를 퍼붓기까지 하였다. 이사야가 순교하였다는 전통은 분명히 외경에 속한다(「이사야의 승천」이라는 외경과 에녹서 11,37). 이사야서의 머리글(1,1)에 따르면 이사야가 박해자 므나쎄 임금 시대에는 이미 살고 있지 않았음이 확실하지만, 그러한 이사야 순교의 전설 안에서 우리는, 자주 확인되는 바처럼 예언자가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실패를 체험한 것이라는 생각의 반향을 감지할 수 있다. 

 

이사야의 본질적인 자질들 곧 그의 권위와 고귀함,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자기 민족에 대한 열정은 그의 언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예언적인 신탁들이 지니고 있던 일정한 전통적 규칙들에 부합하면서도, 그는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언어 기술과 함께 그것들을 자기 예언에 적용시킨다. 이따금 해학으로 가득한 언어 유희, 동일한 자음 또는 모음을 되풀이하는 두운법과 반해음,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는 은유 등이 그것이다. 그가 교육을 받았던 현인들에게서처럼 현실은 그에게 의미가 가득한 것으로 드러난다. 자연의 요소들 곧 불, 땅, 그리고 물과 바람 등은 그에게 삶과 죽음의 세력이라는 이중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우리 주변의 현실처럼 피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이중적인 면을 표현한다. 이 모든 것이 놀라운 간결성과 함께 말해진다. 그는 불필요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이 이사야서에서 평범하고 장황하게 표현된 일정한 문장들을 예언자 자신의 말과 구분할 수 있게 해준다. 언어가 표현의 능력만이 아니라 창조력을 지니고 있다면, 성서에서 이에 대한 최선의 예증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사야서이다.

 

2) 예언자의 선포 내용

 

예언자의 선포 내용은 그의 사람됨, 그리고 그가 자기의 사명을 수행하도록 파견된 당시의 정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사야는 항상 정해진 상황 안에서 그리고 그 상황을 위해서 말하고, 그의 자세는 자기 민족과 함께 그 자신이 체험한 바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독창성을 희생시키기 전에는 그의 메시지를 어떤 도식적인 내용으로 변환시키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어좌에 좌정하여계신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 항상 현존해있는 이 예언자가 또한 자기의 역사 및 제한성과 함께 이 세상에 현존해있듯이, 우리는 그의 메시지 안에서 일정한 불변의 것들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사야에게 있어서 하느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이 거룩하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곧 당신의 백성과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 분이시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표현은 이사야서 밖에서는 매우 드물게 나온다. 그래서 이를 이사야 학파 신학의 특성으로 간주할 수 있다. 하느님의 이 거룩함은 독점적인 성격, 또는 구약성서의 표현을 사용한다면, ‘시기가 많은’ 성격으로서, 종교적 차원에서건 정치적 차원에서건 우상들과 공유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이사야에게 있어서는 자기 민족과의 연대 속에서 전체 인류에 대한 전망이 결코 배제되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 인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몰상식과 그에 따른 삶에 의해서만 그 자명성이 부정되는 이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어떠한 정황에서건 교만, 모든 형태의 우상숭배, 그리고 인간들이 하느님의 눈길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 수단과 책략들 속에 들어있는 자만은 언제나 단죄되는 것이다. 

 

이 초월적인 하느님께서는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 계시며, 이 역사는 세상의 역사와 무관하게 전개될 수 없는 동시에, 이것과 항상 일치하지도 않는다. 이사야가 즐겨 말하는 하느님의 계획 또는 그분의 뜻은 감추어져계신 하느님의 것으로서 인간으로서는 흔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지만, 유능하기로 평판이 높은 고문들보다도 항상 더 슬기로운 것이다. 하느님 계획의 지상권을 강하게 확신하면서도, 예언자는 인간의 활동과 또한 그의 자발성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한다. 인간은 결코 이것들과 반대되는 형태로 구원받거나 단죄받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이사야가 항상 자기 민족에게 촉구했던 항구적인 자세로서의 신앙이라는 용어 안에 내포되어있는 것이다. 이는 시리아-에브라임 전쟁 때처럼(7,1과 각주 참조), 사리에 어긋나는 듯이 보일 정도로, 그리고 일반적인 견해에 역행할 정도로 단호한 신앙을 말한다. “너희가 믿지 않는다면”, 곧 너희가 견고하지 않으면, “정녕 서있지 못하리라”, 곧 너희는 확고하지 못하리라(7,9; ‘믿다’와 ‘서있다’를 뜻하는 두 동사는 히브리말에서 동일한 한 어근에서 파생한 두 가지 변화형으로서, 이 어근은 ‘견고하다, 확고하다’의 뜻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예언자는 이러한 일종의 언어 유희로써 신앙의 깊은 뜻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불굴의 신앙 역시 조용하고 겸손한 신뢰로써 이루어진다(30,15). 

 

인간에게 요구되는 이러한 견실성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함, 또 당신의 왕위를 완전하게 정립시키고자 하시는 의지로써 베푸신 징표들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11,9에 나오는 ‘주님을 앎으로 가득한 땅’이라는 주제 참조). 예루살렘에 설치되어있는 다윗의 왕좌는 하느님의 천상 어좌의 복사품이다. 이사야는 다윗의 전통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으며, 설사 왕국의 계승이 중단될 수가 있음을 예견하면서도, 그에게 있어서 미래의 이상적인 임금은 항상 다윗의 자손일 뿐이다. 그의 메시아 사상은 왕국적 메시아 사상이다. 다윗 왕조는 유다와 이스라엘 그리고 다윗이 건설한 옛 제국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이사야가 다시 채택하여 갱신하는 옛 전통에 따르면, 장차 모든 민족들이 모여들 세계의 중심인 예루살렘에 설립된다(2,1-4). 다윗과 예루살렘은 이사야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두 주요 주제로서, 그는 자기의 청중들에게 이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켰으며, 그의 제자들은 그것들을 받아들여 새로운 상황에 적용시켰다. 이렇게 해서 메시아 사상은 장차 예루살렘이 세계 중심적이고 보편적인 구실을 수행하리라는 내용과 함께 이사야서의 제2부와(40-55장) 제3부에서도(56-66장) 계속 그 중심부에 남아있게 된다.

 

 

3. 제2 이사야서

 

1) 제2이사야 예언자의 시대와 그의 활동

 

이사야서 40-55장에 들어있는 메시지의 연대는, 이 이사야서 제2부가 페르샤의 승리, 바빌론인들의 쇠퇴, 메소포타미아에 유배 중인 이스라엘인들의 임박한 해방을 선포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제2이사야서는 기원전 550년과 539년 사이, 페르샤의 고레스 2세 대왕이 메대 왕국의 아스티아즈와(550년) 리디아 왕국의 크레수스를(546년) 제압한 다음(이사 41,2-3 참조), 그리고 바빌론을 침공하기 전에(이사 45-48) 선포되었다. 이 고레스 2세는 결국 기원전 539년에, 바빌론의 마지막 임금인 나보니드가 통치를 잘못함으로써 백성 대부분이 반대하고 일어선 것에 힘입어, 전투를 할 필요도 없이 해방자로 환영을 받으면서 바빌론으로 입성한다.

 

나보니드 임금에게 명백하게 반기를 들던 갈대아의 사제들은 이 페르샤 임금의 이러한 승리를 그들의 최고신인 마르둑과(예레 50,2 참조) 그의 시종들인 벨 신 및 느보 신의(이사 46,1 참조) 덕택으로 돌린다. 그 영향으로 이스라엘인들의 거주지에 이르기까지, 몇몇 사람들은 이 일련의 사건들 안에서 이러한 거짓 신들의 개입을 보려는 경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무명의 예언자인 제2이사야는 유배 온 자기의 동포 가운데에서 깨어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동포들에게 세상의 유일한 주인은 주님뿐이심을 주지시킨다.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다는 확신 속에서(이사 48,16), 그는 구원 곧 바빌론의 억압에서의 해방, 자기들의 거룩한 땅으로의 귀환 그리고 예루살렘의 복구를 선포하는 것이다. 

 

해방은 ‘칠 년에 일곱을 곱한 햇수’ 동안의 유배 기간에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기원전 587-538). 이방 출신이면서도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기름부음받은이”, 곧 메시아라 불리는 고레스를 통해서 당혹스럽기까지 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이 해방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굴욕에서 영광으로 건너가게 만든다. 그들이 거룩한 땅으로 돌아가는 것은 옛날의 에집트 탈출보다 더욱 훌륭한 새로운 탈출로 이루어질 것이다. 예언자는 에집트에서의 탈출을 상기시키면서, 당신의 계획에 대한 하느님의 성실성을 강조한다. 에집트 탈출을 능가하는 것으로, 그는 하느님의 일관된 계획, 곧 온 세상을 포괄하는 그분의 보편적인 왕국의 결정적인 실현을 엿보게 한다(52,7-10). 이 왕국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창건되기 때문에, 이 거룩한 성읍은 화려한 복구를 체험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예루살렘으로 해서 하느님에 의해서 이룩된 구원이 모든 인간들에게 예외없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이 체험하게 되는 구원의 첫째 요소, 곧 바빌론의 멸망과 고레스에 의한 해방은 무엇보다도 40-48장에서 다루어지고, 그 구원의 두 번째 요소, 곧 새로운 탈출은 40장에서 55장에 이르는 제2이사야서 전체에 걸쳐서 되풀이된다. 그리고 세 번째 요소, 곧 시온의 재건과 보편적인 구원의 강조는 무엇보다도 49-55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제2이사야 예언자의 활동은 두 단계로 이루어졌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1) 첫째 단계(40-48장)

 

전체적으로 구원을 선포하면서 예언자는 네 가지 오류를 교정시킨다. 

 

가. 자기들을 버리셨다고 주님을 탓하면서 용기를 잃은 자들에게(40,27) 예언자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두 가지 이유를 상기시킨다. 첫째는 주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분의 권능은 온 세상에 빛난다는 것이고, 둘째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그분의 성실성은 역사에 빛난다는 것이다. 

 

나. 자기들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고마워할 줄 모르신다고 주님을 탓하는 몰염치한 자들에게(43,22-24) 예언자는, 고마워할 줄 모르는 자들은 자기네 불행의 원인인 죄악을 쌓아온 그들 자신이라고 반박한다(43,24-28). 

 

다. 이방인 출신 해방자를 선택하셨다고 주님을 탓하면서 화를 내는 자들에게(45,8-10) 제2이사야는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로서 그들이 품고 있는 교만을 지적한다(45,11-13). 

 

라. 바빌론의 번영을 가져왔다는 그곳의 신들에 이끌린 자들에게 예언자는, 참되신 하느님만이 유일하게 미래를 예고하고 만들어가실 수 있음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과정에서, 또는 흔들거리는 신상들처럼 효력이 없는 이 자칭 신들이라는 존재들에 대한 풍자에서, 이 물신(物神)들에게 신빙성이 없음을 보여준다(41,24; 42,17; 44,21; 46,8; 48,5). 

 

첫째 단계의 목적이 바로 이러하다. 48장의 마지막 단락에서 제2이사야서의 중간 지점에 도달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이 예언자의 생애 가운데에 일어나는 하나의 전환점을 예감하게 된다. 지금까지 말해졌던 주제들은 포기되고 이제 새로운 주제들이 등장한다. 또한 그의 선포는 이스라엘의 정예 계층의 사람들에게만 향하는 것으로 여겨진다(48,22의 각주 참조).

 

(2) 둘째 단계(49-55장)

 

이스라엘인들 가운데서 가장 성실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예언자의 메시지는 세 가지 면에서 주목된다. 

 

가. 그들의 상황은 극적으로 반전될 것이다. 곧 예언자처럼(50,4-11) 박해받는 이들은(51,7-8) 위로를 받고(51,1-8), 억압받는 이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나. 시온의 복구가, 예언자 호세아와 그 후계자들이 그렸던 것처럼, 남편인 하느님과 그의 아내인 이스라엘 공동체 사이에 이루어지는 부부간의 재회로서 서술되고 경축된다. 곧 과부가 되었던 예루살렘은 다시 남편을 찾게 되고, 아이를 갖지 못했는데 이제 다시 아이를 낳게 되며, 그리고 불충했던 예루살렘은 변함없이 계약을 지키시는 주님에 의해서 다시 정숙한 아내가 된다(49,14-26; 51,9 - 52,12; 54). 

 

다. 진정한 하느님, 만물의 하느님에 대한 민족들의 회개가 점점 더 강조된다. 이 민족들은 점차 하느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구원에 경탄하고(49,7; 52,10; 이는 이미 40,5에서도 언급됨),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을 알기를 갈망하며(49,23; 55,5; 이는 이미 45,14-15.23-25에서도 언급됨), 온 세상에 대한 진실한 신앙의 증인인 주님의 참다운 종에 의해서 계몽되고 변화되는 것으로 나타난다(49,2.6; 53,11).

 

2) 주님의 종들과 ‘주님의 종’

 

이렇게 요약되는 메시지를 선포하는 과정에서 제2이사야는 모두 21번에 걸쳐 “종”이라는 낱말을 사용한다. 그 가운데 단 한 번은 복수로(54,17), 또 다른 한 번은 노예가 되었다는 경멸의 뜻으로 쓰인다(49,7). 그리고 나머지 19번은 주님의 종에게 유리한 의미로 쓰여진다. 그중 14번에 걸쳐 이 종은 본연의 이름 곧 “이스라엘” 또는 “야곱”으로 불리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킨다. 나머지 5번의 경우에 이 종은 무명으로 남는데, 문맥에 따라서 이 칭호로 불린 이가 누구인가를 물어야 한다(42,1; 44,26; 50,10; 52,13; 53,11). 여기서 말하는 주님의 종 역시 계속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는 것인가? 한 인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민족 내의 작은 집단인가? 아니면 한 개인인가? 위에 나열한 다섯 구절 이외의 경우들 곧 “이스라엘” 또는 “야곱”이 나오는 구절들에서도, 주님의 종은 단순히 이스라엘 전체를 의인화하는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종류의 의인화가 들어있는가? 그래서 똑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가? 이 모든 가설들은 나름대로 지지될 수 있으며 또한 실제로 그렇게 되어오고 있다. 

 

해당 본문들이 문맥에서 지니는 직접적인 뜻만을 먼저 고려할 때, “종”이라는 낱말은 차례로 다음의 인물들을 가리킬 수 있다. 곧 이스라엘 전체, 정예의 이스라엘인들, 제2이사야 자신, 그리고 페르샤의 임금 고레스이다.

 

가. 민족 전체로서 주님의 종인 이스라엘 

 

41장에서 48장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실제로 주님의 종이라 불린다. 나머지 구약성서와의 관계에서 볼 때 이는 새로운 사실이다. 이사야서의 이 구절들 외에는 드물게 그리고 후대의 본문들에서만 이에 상응하는 명칭이 이스라엘에게 적용됨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예레 30,10; 시편 136,22). 예언자는 이스라엘에게 이 칭호를 부여함으로써, 선택된 민족이 에집트에서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후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했음을 강조한다. 이 섬김은 비단 하느님에게 종속되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에게서 당신의 계획에 대한 계시를 받고 이를 실현하는 데에 협조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을 정도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41,8-16과 44,1-5에서는 하느님께서 어떠한 애정으로 당신의 종 이스라엘에게 정성을 기울이시는지를 볼 수 있다.

 

나. 소수의 뽑힌 이들로서 주님의 종인 이스라엘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에는 선별된 사람들이 활약한다. 자기의 청중들 가운데 일부에게서 배척을 받은 예언자는(50,6-9.11) 이제 49장에서부터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집단에게로 향한다(50,10). 이 집단은 병행 명칭인 이스라엘-야곱으로는 한 번도 불리지 않지만, 계속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킨다(49,3). 그러나 전체가 아니라 축소된 이스라엘, 정선된 사람들, 남은 자들이다(46,3). 49,5-6을 이들에게 적용한다면, 이들의 첫 번째 임무는 전체 이스라엘인들 가운데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다시 일으켜세우는 것이고, 그들의 주 임무는 민족들에게 빛을 가져다주는 것이 될 것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52,13-53,12의 시 역시 이렇게 정선된 이스라엘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라고 여긴다.

 

다. 제2이사야 자신이 주님의 종 

 

예언자 자신이 정선된 이스라엘인들 가운데 하나였다. 유배로 끌려와서 억압받는 그가 동포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위로를 얻어야만 했다. 사려깊은 제자처럼 그는 자기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를 전달하였다. 이 일을 하면서 그는 사람들의 회의와 적대감에 부딪치게 된다. 그러나 모욕을 받으면서도 그는 하느님에게 계속 충실함으로써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자기에게 동의하는 이들을 강화할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꿋꿋하게 활동을 계속한다(50,4-11).

 

라. 주님의 종인 고레스

 

제2이사야의 메시지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서, 많은 이들에게 거슬리는 것이 되기도 하지만, 고레스의 사명에 대한 예언자의 선포 내용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페르샤 임금도 참으로 하느님의 종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사람들이 다시 살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고레스의 계획이 성공하도록 만드시는 만물의 주인이시고, 고레스는 ‘예루살렘은 재건될지어다.’라고 말하면서 주님의 계획을 성공으로 이끄는 그분의 종이다(44,26-28). 

 

헛된 신들에게 바쳐진 쓸모없는 신상들과는 대조적으로(41,24.29), 고레스는 하느님의 입김으로부터 영을 받은 그분의 선택된 자가 아니겠는가?(42,1) 고레스는, 역사가 인정하듯 온화한 통치 방법으로, 모든 민족들이 주님에 의해서 내려진 판결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장본인이 되는 것이다. 그는 이 판결을 수행하면서도 바빌론에 의해서 희생된 자들, 곧 억압적인 통치의 멍에 아래에서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이국땅에 억류됨으로써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다’(42,3). 그는 나약해짐이 없이 자기의 사명을 끝까지 완수할 것이다. 고레스는 주님의 종인 이스라엘의 종으로서 이스라엘을 복구시킴으로써, 사람들을 당신의 빛으로 비추시고 그들을 당신의 계약으로 결집시키시려는 하느님 계획의 전개를 촉진시킨다(42,1-7). 

 

‘주님의 종’과 관련해서 이상과 같은 설명들이 제안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은 다소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모두 본문들을 존중하면서 얻어진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들만이 유일한 가능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히브리말로 된 구약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해낸(칠십인역) 그리스화한 유다인들은 42,1에 나오는 무명의 종에게 이름을 부여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옮긴다: “……나의 종 야곱, 나에게 선택받은 자 이스라엘…….”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정의와 그분이 세상에 전하라고 맡기신 ‘율법’을 민족들에게 제시하는 이는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구약성서 본문에 대한 구두 번역 및 설명에서 유래하는 것으로서 아람어로 된 주석서인 타르굼은, 한 개인으로서의 하느님의 “종”에 대하여 말하는 신탁들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설명을 내놓는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후대에 와서 곧 그리스도교 시대의 도래 이후에 편집된 타르굼의 많은 단락들 가운데, 주님의 종의 고통에 대하여 말하는 부분에서는 이스라엘의 고난을 읽어내고, 종의 영광에 대하여 말하는 부분에서는 장차 올 메시아의 승리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게 된다. 반면에 이사 50,10에 서술된 “종”에서는 단순하게 우리가 제2이사야라고 부르는 예언자를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52,13에서는 42,1과 43,10에서처럼 주님의 종을 메시아로 해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제2이사야의 신탁들은 내용이 풍부하고 미래를 향해 열려있다. 그래서 “종”이라는 무명의 칭호 속에 감추어진 이런 개인 또는 저런 집단에 의한 그 의미들의 실현은 부분적이고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어떠한 실현도 제2이사야에 의해서 예고된 세계에 알맞는 사명을 남김없이 다하였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약성서에서는 제2이사야의 많은 본문들이 예수의 인물 및 업적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예수께서는, 그의 죽음이 죄사함의 제물로서 하느님에게 기꺼이 받아들여지고(53,10: 이는 구약성서에서 매우 새롭고도 유일한 단언이다) 죽음을 넘어서는 강력하고 생산적인 삶이 약속된(53,9-12) 완전히 의로운 종인 것이다(50,9; 53,9).

 

3) 하느님의 모습

 

제2이사야는 하느님의 모습에 대하여 매우 인상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다. 여기서 그 그림의 주요 선들을 말해보기로 한다. 

 

하느님께서는 유일하시며 결코 비길 수 없으신 분, 그 옆에 다른 어떤 신도 존재할 수 없는 분이심을 예언자는 되풀이하여 강조한다. 영원하시기 때문에 그분 이전에 또 그분 이후에 어떤 존재도 있을 수가 없다(43,10; 44,6). 모든 것 이전에 또 모든 것의 원천에 그분은 존재하시고 당신 홀로 만물을 창조하셨다(44,24). 하느님의 행동에만 유보된 이 ‘창조하다’라는 동사는 제2이사야와 함께 그 사용 빈도가 잦아진다. 곧 구약성서 전체에서 모두 44번 나오는데, 제2이사야서에만 16번 쓰이는 것이다. 이 밖에도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일어서는 것을 창조로 규정함으로써 이 용어를 갱신하고(43,1.7.15), 또한 새로운 탈출과 관련해서도 창조를 이야기한다(41,20; 48,7). 사실 하느님께서는 창조주로서의 당신의 권능을 당신의 구원 계획에 이용하신다. 창조 때 원초의 혼돈에서 세상의 요소들을 끌어내시고, 또 당신의 자녀들을 에집트의 강제 노동에서 끌어내셨기 때문에(51,9-10), 그분께서는 당신께 충실한 이들을 바빌론 유배로부터 해방시키실 수 있으며, 이러한 그분의 구원 행위는 창조력의 새로운 폭발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41,17-20). 

 

이 구원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더더구나 그러하다. 이스라엘을 창조하시기 전에 만물의 하느님, 우주의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창조하셨다(45,12).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기 전에 그분께서는 노아와 계약을 맺으셨다(54,9). 그분께서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동의어들로 일컬어지는 인류 전체를 잊으신 적이 없다: 인류 또는 아담의 자손들, 모든 사람(본디는, 육신), 민족들, 나라들, 성읍들, 족속들, 먼 섬들, 세상 끝들 등. 이 모든 사람들은 예외없이 하느님의 세력권 안에 들어있다. 그들의 오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미미하고 나약한 존재들로서 전능하신 분의 손안에 있다(40,6-7.15-17; 51,6). 악은 불행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심판자이신 그분의 눈앞에 모든 인간들은 서있는 것이다(47장). 그들은 결국 모든 이들을 구원의 기쁨으로 초대하시는 구원자의 부름을 듣게 된다(45,22-24; 55,3-4). 

 

그러나 전반적으로 이렇게 보편주의적인 시각들도 이스라엘의 특권을 폐기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전제로 한다. 절대적인 방식으로 “거룩하신 분”께서는(40,25) 동시에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시다(제2이사야서에서 모두 12번). 진실하신 하느님께서 모든 이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진다면, 이는 특별히 선택과 부름을 받고 세상에 파견된 증인인 민족 안에서 더욱 그러하다(43,10-12; 44,8). 이 신앙인들의 공동체는 아브라함과(41,8; 51,2) 야곱과(43,27), 유다와(48,1) 다윗을(55,3) 내세우고, 그리고 여기에서 모세를 직접 지명하지는 않지만, 그의 활동 곧 장차 도래할 구원의 담보이며, 현재는 감소되었지만 앞으로도 그 후손들이 존속할 뿐만 아니라 쉬지 않고 불어날 것이라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약속으로서의 에집트 탈출을 끊임없이 상기한다. 사실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당신 백성을 돕고 희망을 북돋아주며, 떠받쳐주고 후원해주고 인도해주시며, 거짓 신들과는 달리 당신만이 혼자 예고하고 성취하실 수 있는 당신의 구원 계획에 참여시키신다.

 

주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실현시키면서 보여주시는 항구성은 제2이사야에게서 매우 특별한 명칭으로 불리게 된다. 그것은 “정의”로서 모두 28번 나오는데, 거의 모두가 법률적 정의의 유리한 면이나, 또는 각자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바를 나누어주는 분배 정의에 의해서 보장된 공정성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이 “정의”는 당신의 구원 약속을 지키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성실성이기 때문에, “구원”과 거의 동의어가 될 수 있는 것이다(45,8,21; 46,13; 51,5.6.8). 

 

제2이사야서에 22번 나오는 말마디로서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사실은 그분의 성실한 사랑은 물론 그분의 항구한 정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 정성은 목자나 임금의 정성만이 아니라(40,11; 41,21; 43,15; 44,6; 52,7), 무엇보다도 먼저 자녀들에 대한 아버지의 정성(43,6; 45,10-11), 자식들에 대한 어머니의 정성(49,15-16), 그리고 아내에 대한 남편의 정성이다(54장). 그분의 사랑은, 아무리 크고 되풀이되는 인간의 죄라 할지라도, 그것을 없애주시고(43,25; 44,22) 완전히 용서해주시기까지(55,7) 참고 극복하는 사랑이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은 두 가지 면을 나타낸다. 그분께서는 한편으로는 풀어주고 구제하며 해방시키시고, 또 무엇보다도 구원자로서 구원해주신다(41,14을 비롯하여 모두 17번). 다른 한편으로 그분께서는 다시 모으고 격려하며 위로하신다. 제2이사야서의 첫번째 낱말로서 9번 되풀이되는 이 ‘위로하다’라는 동사는, 흔히 ‘위로의 책’이라 불리는 이 예언서의 어조를 결정짓는 구실을 한다. 이러한 격려는 불행과 악에서의 구원 이상의 것을, 공동체가 다시 모여 평온하고 행복한 생활로 되돌아감 그 이상의 것을 가져온다. 그것은 이 밖에도 이러한 은혜를 받는 사람들 안에 하느님의 광명 자체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킨다. 하느님의 이 ‘광채’는 제2이사야서에 7번 나오는 “영광”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 낱말은 히브리말에서 본디 ‘무게’를 뜻한다. 실제로 하느님의 이 ‘광채’는, “이스라엘에게 당신 영광을 드러내셨다”(44,23),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49,3) 등으로 선포되는 데에서, 5번에 걸쳐 “영광”이라는 낱말로 옮겨진다. ‘큰 무게를 지니신’ 하느님께서는 결국 “모든 사람(본디는, 살덩이)”에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서(40,5),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느님 덕택으로 이 세상의 삶 안에서 ‘무게를 지닐 수 있게’ 하신다(43,4). 제2이사야서 전체를 통해서 볼 때, 부지런히 우상들을 만들어서 그것들에게 인간적인 “영광”을 집어넣으려는(44,13) 장인들의 가련한 작업과, 당당하게 믿는 사람들을 만들어내시어 그들에게 실제적으로 신적인 “영광”을 부여하시는 창조주의 눈부신 업적 사이의 대립이 두드러진다. 

 

이것이 제2이사야가 보여주는 하느님의 모습이다. 인간에게 그토록 관대하신 이 하느님 앞에서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고 그분에게 감사드리도록 부름을 받는다. 하느님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예언자는 주님에게 되돌아오도록(44,22; 55,7 등), 그분을 찾고(51,1) 만나뵙도록(55,6), 그분의 말씀을 듣고(48장 등) 빵보다 더 큰 양식이 되는 그분의 계시를 향유하도록 자기 동포들을 부른다. 하느님께 감사드리라고 격려하기 위해서 제2이사야는 하느님을 위하여 노래하도록(42,10), 그분 안에서 기뻐 뛰도록(41,16과 그외 6번), 그분에게 환성을 올리고(42,11과 그외 11번) 기뻐 소리치도록(49,13), 즐거워하도록(54,1), “기쁨과 즐거움”을 증거하도록(51,3.11) 권유하는 열렬한 부름을 되풀이한다. 이러한 합창에는 유배자들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들, 그리고 이스라엘인들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 나아가 세상의 모든 민족들만이 아니라 세상 자체와 우주의 모든 요소들, 하늘과 별들, 바다와 그 심연까지도 모여와야 한다. 그리하여 한 목소리로, 세상의 단결과 인류의 일치를 원하시는 하느님을 노래하고 기뻐하는 우주의 찬미가를 울려퍼지게 해야 하는 것이다.

 

 

4. 제3 이사야서

 

1) 제3 이사야서의 문제

 

이사야서 40-55장에서 56-66장으로 넘어가 보면, 이 둘 사이에는 사고와 어휘의 유사점들 뿐만 아니라, 동시에 어조와 새로운 표현들의 차이점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한편 이사야서의 이 마지막 부분 안에서도 이를 구성하는 서로 다른 본문들 사이의 다양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이와 관련하여 주석가들은 서로 다른 세 가지 입장을 취하고 있다.

 

가. 어떤 이들은 이사 56-66장을 일종의 편집물, 곧 저자나 생성 연대와 관련해서 각기 다양한 단편들의 인위적인 집합으로 여긴다. 이러한 설명은 이 작은 책에 들어있는 시들 사이에 일정한 부조화가 있음을 전제한다. 사실 모든 것을 동일한 한 저자의 것이라 하기는 어렵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 사이의 상대적 통일성을 찾아내기를 너무 쉽게 포기해서도 안될 것이다.

 

나. 다른 이들은 56-66장 역시 유배에서 돌아와 고향 땅에 재입주하는 문제에 봉착한 제2이사야에게서 유래한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예언자 스스로 자기만의 고유한 표현들을 변형시키면서까지 자신을 표절할 가능성이 별로 없고(40,3과 57,14; 52,12와 58,8; 49,23과 60,16 등 참조), 다른 한편으로는 이 두 작품들 사이의 차이점들이 유사점들보 다 더 중요하게 드러남을 부정할 수도 없다.

 

다. 끝으로 또 다른 성서학자들은 이사야서의 마지막 11개 장이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이 제2이사야에게서 영감을 받아 유배가 끝난 뒤 20여 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자기의 사명을 수행한 동일한 한 예언자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선은 매우 일관성이 있는 60-62장을 이 제3이사야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56,9-57,21과 58장과 59장, 그리고 65장과 66장의 대부분을(비록 서로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이 마지막 두 장을 별개의 것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이 예언자의 것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없다. 이 밖에 뚜렷이 눈에 띄는 시 두 개가 있는데, 63,1-6과 63,7-64,11이다. 이것들이 제3이사야에게서 유래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조심스럽게 그의 작품 속에 삽입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시는 그의 관심사에 부응함을 보여주고 있다. 끝으로 66,18-24는 편집자들의 손에 의한 부록이고, 성전 재건 후에 발설되었을 56,1-8은 가장 후대의 본문이면서도 제2이사야서와의 문학적인 접촉 때문에 서두에 위치하게 되었을 것이다(56,5는 55,13을 상기시키고, 56,1은 46,13과 51,5.6.8을 되풀이한다).

 

2) 예언자와 그의 활동

 

이 무명의 예언자는 기원전 537년과 520년 사이에 등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유배자들의 첫 무리가, 본디 유다의 제후였다가 나중에 총독으로 임명된 세스바쌀의 지휘 아래 귀향하였다(에즈 1,8-11; 5,14; 1역대 3,18의 칠십인역 본문). 성전을 재건하기 위한 기초를 놓기는 하였지만(에즈 5,16), 곧바로 대내외적인 여러 어려움으로 해서 작업이 중단되었다. 그래서 약식의 제의나마 속개하기 위해서 제단만이라도 세우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하였다(에즈 3). 조금씩 조금씩 다른 유배자들의 집단들이 되돌아오는데, 그 가운데에는 대사제 요수아와 유다 왕국이 망하기 전 마지막 임금 여호야긴의 손자로서, 페르샤 정부로부터 권리를 위임받은 고등 판무관인 세스바쌀을 계승한 즈루빠벨도 들어있었다.

 

이 사람들의 권위 아래 예루살렘과 이 거룩한 성읍 주변을 재건하려고 노력한 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부류들로 혼합된 집단이었다.

 

가. 유배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에즈 2; 느헤 7). 이들은 주로 유다와 시므온과 베냐민 지파 사람들로서 이들 가운데에는 사제들도 많았다. 이들은 황폐하고 노략질당한 지역에 재입주하는 데에 곤란을 겪게 된다.

 

나. 본국에 남아있던 유다인들. 이들 가운데에는 이스라엘의 신앙에 충실한 사람들도 틀림없이 있었지만, 귀향자들의 종교적인 열성을 이해하지 못했던 우상숭배자들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유배자들의 땅에 자리를 잡고 살아야 했었는데, 귀향한 그들에게 재산권을 양도할 용의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종교적이고 사회적인 분열을 제3이사야서의 많은 구절들에서 볼 수 있다.

 

다. 이방인들. 유배 기간 동안에 많은 이방인들이 유다 땅에 정주할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오기도 하고(60,10; 61,5 참조), 어떤 이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온으로 귀향할 때 따라오기도 하였다(60,9; 66,20 참조). 점점 수가 많아진 이 이방인들이 하느님의 백성과 얼마나 동화될 수 있었는가가 문제이다.

 

라. 디아스포라에 남아있는 유다인들. 이들이 멀리 떨어져있기는 하지만(57,19 참조) 이들을 위해서도 귀향길이 준비되어야 했다(57,14; 62,1). 그리고 이들은, 주님께서 이미 모아들이심으로써 특권을 받은 이들 외에, 그분께서 다시 모아들이고자 원하시는 이들이다(56,8).

 

예언자는 이렇게 상이한 구성 요소들로부터 일치되고 거룩한 백성을 다시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네 가지 큰 난관에 부딪친다.

 

- 늦어지는 구원에 의해서 야기되는 희망의 위기.

- 끈질기게 계속되는 타락, 곧 우상숭배.

- 여러 정황들에 의해서 발생한 분열 곧 동포들 사이의 미움.

- 상이한 부류들의 결합으로 증가된 위험, 곧 이방인들에 대한 멸시.

 

희망의 위기는 귀국자들이 절감했던 실망감에서 온다. 예루살렘의 성벽은 파괴되어있는 채로 남아있어야만 했다. 그것은 느헤미야 시대에 가서야 재건된다(기원전 445-433). 성전은 공사 초안만 잡혀있을 뿐이었고, 예전의 성전보다 그나마 덜 아름답게라도 지어진 것은 시간이 더 흐른 뒤인 기원전 520년에서 515년 사이였다. 생활 여건을 보더라도 외적으로는 일종의 경쟁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들, 내적으로는 고국에 남아있던 사람들의 방해 때문에 좋지 않았다. 이러한 괴로움 속에서 거의 절망 상태에 빠진 열성 신도들은 늦어지는 구원과 전혀 움직이지 않으시는 것 같은 주님과 관련해서 그분을 끊임없이 비난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불평을 잠재우기 위해서 제3이사야는 일면 구원이 도래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죄악을 드러내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구원의 틀림없는 원천인 하느님의 성실성을 재확인한다.

 

예언자는 이 밖에도 거짓 신들에게서 도움을 찾는 우상숭배자들을 회개시키려고 한다. 이들은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 성전 매춘, 부정한 동물들을 제의에 사용하는 것(65,4; 66,3.17 참조), 강신술(65,4), 이른바 멜렉-몰록 신(57,9) 또는 갓과 므니와 같은 신들을 경배하는 것과(65,11) 같은 타락한 종교 의식에 빠져있었다. 이러한 탈선을 교정하기 위하여 예언자는 두 가지 증거를 들어 위협한다. 곧 구원을 베풀 수 없는 거짓 신들의 무능과, 그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참되신 하느님의 권능이다.

 

하느님과의 계약을 파기하는 자는 동시에 자기 동포들과의 계약도 깨는 자다. 그래서 이 유다인들 사이에 실제로 분열이 일어난 것이다. 주민들을 수탈하는 지배자들이 있고(56,8-57,1) 이웃들을 약탈하는 자들이 있다. 또한 상호 부조의 거절과 폭력, 정의의 거부와 임의로 동포를 제명하는 행위 등도 보게 된다. 예언자는 이러한 중죄들을 엄하게 고발하고, 이것들이 참다운 경신례와 부합하지 않음을 드러낸다(58장 등).

 

이스라엘 동포에게조차 흔히 이런 식으로 대한다면, 대관절 이방 손님들에게는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외국인들과 관련해서 이사야서 56-66장은 여러 가지 자세를 드러낸다.

 

- 어떤 구절들은 악을 고집하는 나라들은 파멸하리라고 말한다(63,3-6; 64,1과 66,15-16.24 참조; 여기에다 59,18의 후반부와 첨가문으로 여겨지는 60,12를 보탤 수 있다).

 

- 다른 구절들은 이방 민족들이 예루살렘을 섬기리라고 말한다(60,3-11.13-17; 61,5-9; 62,2-8; 66,12).

 

- 그러나 가장 흥미를 끄는 문제들은 이방인들을 하느님 백성의 품안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관련해서 제기된다. 이 비유다인들은 자기들이 격리될 것을 두려워하지만(56,3), 이사 56-66장의 신탁들은 이들에게 매우 밝은 전망을 펼쳐보인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곤경에 빠진 어떠한 유랑민이라도 도와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58,7), 이 밖에도 회개한 이방인들을 자기네 성전으로 맞아들여야 하고(56,3-7), 그들에게 사제직을 양도할 것까지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66,21).

 

3) 하느님의 모습

 

하느님의 이러한 요구 사항들이 표현되는 것을 들으면서, 우리는 제3이사야가 그린 하느님의 모습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가 있다.

 

주님께서는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시며(64,3) 영원한 분이심을(57,15) 제3이사야는(제2이사야는 길게 강조하는 반면에 짧게) 상기시킨다. 그분께서 창조주이심을 이 예언자는 되풀이하지만 제2이사야보다는 드물게 말한다. 그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음을 알고 있으며(66,2) 나아가, 이는 특기할 사항으로서, 그분께서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창조하실 것임을 덧붙인다(65,17; 그리고 66,22도 참조). 그는 다른 구절들에서는 하느님께서 회개자들의 마음에서 찬미가(57,19) 흘러나오게 하시고(이 역시 하느님의 창조 행위이다), 그리고 새로운 예루살렘을(65,18) 창조하신다고 분명히 말한다.

 

만물의 창조주로서 주님께서는 만물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그분께서 이방인들을 위하여 당신 백성에게 어떠한 보편적 수용의 자세를 명하셨는지 보았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자에게 영감을 주시어, 당신 백성에게 개인적인 책임감을 강조함으로써 보편주의를 장려하도록 하신다. 어떠한 구분도 없이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이 똑같이 선택된 백성에 소속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써 확실하게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성실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불경한 자들도 있다. 이스라엘인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구원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받지 못한다면, 이스라엘인이 아니라는 사실도 더 이상 그 구원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 요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모든 사람들을 당신에게로 부르신다(56,7; 66,18).

 

그러나 모든 민족들이 모여오는 것은, 아직도 그 특권이 존속하는 이스라엘의 도움으로 이루어져야 할 바이다.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분”께서는(57,15) 계속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으로 남아계신다(60,9.14에서 두 번 이렇게 불리신다). 물론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야곱이, 제2이사야서에서는 17번 나오는데 반하여, 56-66장에서는 한 번도 이렇게 불리지 않음이 사실이다. 그리고 배신한 자들에 대립되는 충실한 이들을 부르기 위해서 선택된 용어가, 제2이사야서에서는 단수로 쓰여지면서 선택된 민족을 가리키는 데 반하여, 제3이사야서에서는 항상 복수로만 사용됨도 또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밖의 다른 표현들은, 야곱과 유다의 후손들이고(65,9) 모세에 의해서 인도된 민족이며(63,11-12) 전세계 종교의 중심이 되도록 예정된 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하느님의 민족, 그리고 그분의 몫이요 그분의 상속자인 민족에 대한 하느님의 우선적인 애정을 상기시킨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온 세상을 향한 사명 수행을 준비시키시면서, 유일하고 참된 아버지로서(63,8.16; 64,7) 절대적으로 성실한 당신의 사랑과(65,16) 전적으로 모성적인 정성을(66,13) 증언하신다. 동정으로 가득하신(63,9) 하느님께서는 백성이 저지른 죄악을 잊어주시고 그들을 낫게 해주시면서 용서까지 해주신다(57,16-18; 64,8). 당신의 친구들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당신의 영광과 영화를 부여하시면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구원자”로서 도움을 주시고,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며 다시 모아들이신다. 이 일을 하시면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정의”, 곧 인간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흔들림없이 지켜오신 당신의 약속들에 대한 절대적인 성실성을 드러내신다. 이미 제2이사야서에서 보았던 이러한 주제들에 대해 제3이사야는, 이방인들이나 이스라엘인을 막론하고, 악인들에게는 어김없이 불리하고 선인들에게는 유리하게 수행되는 하느님의 심판을 덧붙인다. 사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서만 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벌하시기 위해서 그와 함께 법정에 들기도 하신다. 그리고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심판하시는 그분의 보편적인 판결은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것이 된다(66,16.24).

 

사랑에 성실하시고 구원에 능하시며 심판에 틀림이 없으신 이러한 하느님 앞에서 인간들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분을 배척하면 불행을, 그분을 받아들이면 행복을 선택하는 것이 된다. 하느님을 받아들임은 회개와 기쁨에 찬 찬미만이 아니라, 동시에 열성적인 순종도 전제로 한다. 제2이사야가 주님에 대한 “경외”를 단 한 번만 말하는 데 반해(50,10), 제3이사야는 이를 세 번 또는 네 번에 걸쳐 되풀이한다(57,11; 59,19; 63,17). 에즈라서와만 공유하는 독창적인 특징으로서,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황송하여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라고 자기의 청중들에게 촉구한다(66,2-5). 이렇게 하느님을 섬김은 도덕적으로 선한 품행을 불러일으키고 또한 커다란 경신례적 성실성을 요구하게 된다. 제3이사야서에서 성전은 12번, 거룩한 산은 5번 언급되고, 이 밖에도 경신례적 행동들을 가리키는 용어들은 매우 많다(안식일이 3번, 그리고 사제직, 제단, 희생제물, 단식 등). 제3이사야에 따르면 도덕과 종교는 불가분의 것들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자기 이웃을 사랑한다고, 그리고 자기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주장함은 공허한 것이 될 뿐이다.

 

 

5. 성서 전통 속의 이사야서

 

결국에 가서 이사야서는, 그것을 구성하는 모든 부분들을 통틀어 유일한 작품으로서 예언서들의 경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후 이 책은 새로운 역사를 겪게 된다. 쿰란에서 이사야서의 여러 단편들과 (쿰란의 주요 수사본이라 불리는) 이사야서 전체의 두루마리가 발견되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자신들을 참다운 이스라엘, 그리고 성실한 “남은 자들”로 여겼던 에세네파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있어서 이사야서 전체가 하나의 기획서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쿰란의 주요 수사본과 함께 가장 오래된 성서 수사본이 복구되었는데, 이는 유다인 성서전승가들에 의해서 전해진 마조라 본문보다 천년 이전의 것이다. 마조라 본문과 비교할 때 쿰란의 수사본은 단순히 철자법상의 문제들만이 아닌 수많은 변형들을 지니고 있는데, 본문의 뜻을 밝히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들은 아래 번역의 각주에 명시될 것이다. 이사야서가 유다인들에게 불러일으켰던 관심은 칠십인역이라 불리는 그리스어 번역본에도 나타난다. 이 역본에는 가끔 번역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번안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히브리어 본문과는 다른 본문들이 나타난다. 그러면서도 칠십인역은, 번역 원본인 히브리어 본문에 접근할 수 있는 길 하나를 열어주고, 이 번역본이 만들어진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다 공동체가 수행한 이사야서의 재독(再讀)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증언해준다는 면에서 유익하다.

 

이사야서 특히 그 제2부 및 제3부(40-66장)는 시편과 함께 신약성서에서 가장 자주 인용된다. 그 가운데 일부는 명백한 직접 인용문들이고 나머지는 쉽사리 알아볼 수 있는 차용문들이다. 임마누엘의 탄생을 예고하는 이사 7,14가 마태 1,22-23에서 되풀이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비유에 의한 가르침은 청중들의 마음을 무디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복음사가들이 말하는데(마태 13,14; 마르 4,12), 이는 이사 6,10의 본문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포도밭이나 모퉁잇돌과 같은 이사야서의 중요한 이미지들은 신약성서에서도 자주 나온다. 또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입술만에 의한 예배(마태 15,8과 이사 29,13), 종말의 시간을 묘사하는 그림에 나오는 것으로서 천체들이 빛을 잃는다는 것(마태 24,29와 이사 13,10), 그리고 가지와 그루터기, 특히 주님의 종과 관련된 주제들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사야서로부터 출발해서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새로운 약속들과 임박한 심판 앞에 놓여있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신들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이사야서가 성화(聖畵)와 그리스도교 찬미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겠다. 여러 대성당의 정면 현관, 신심 서적 속에 들어있는 삽화들, 그리고 많은 성가들이 각자 제 나름대로 이사야서를 되풀이하여 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역사상, 이사야서라는 이 하느님의 특별한 증인보다 계시를 더 적절하게 표현하고 신앙을 더 많이 불러일으킨 책도 그리 많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출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새번역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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