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예레미야 입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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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2 | 조회수5,297 | 추천수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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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입문
1. “말씀의 사람”과 고독
예레미야서의 저자로 알려진 예레미야 예언자는 스스로를 외톨이로 소개한다. “저는 홀로 앉아있나이다”(15,17). 이 말은 예언자가 자신과 외부 사회의 관계를 묘사하는 전형적 표현이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이해를 받지 못하고 박해를 받았으며, 심지어 그를 두둔하고 격려해 주어야 할 친지들, 특히 가족들에게서조차도 사랑을 받지 못했다(12,6; 20,10). 그는 그들과 함께 혼인잔치에도,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다(16,5-9). 그는 혼인도 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될 수도 없다(16,1-4). 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하며,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에집트로 끌려가다가 타향에서 생애를 마치게 된 그의 무덤을 아무도 찾아내지 못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레미야서에서 예언자의 내적 삶에 관한 매우 풍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예레미야의 고독은 그의 본성과 전혀 관계가 없다. 그의 고독은, 그를 압도하고 갑자기 그에게 몰려와 그의 존재 전체를 채우며 그를 괴롭히고 그의 의지를 온전히 사로잡은 외적 힘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이 외적 힘은 예언자에게 유다 백성 한복판에서 고독을 행동 양식으로 삼도록 강요한다.
이 어찌할 수 없는 힘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어떤 예언자도 예레미야만큼 하느님의 말씀과 그 실천 방안을 철저하게 알리지 못했다.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1,4). 이 말은 예레미야가 자신의 담화를 소개하고 규정하는 통상적인 표현이다(1,2 각주 참조).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었나이다”(15,16). 때로는 이 말씀이 파괴자가 된다. “내 심장이 내 안에서 터지고 / 내 모든 뼈가 떨린다. / 나는 술 취한 사람처럼 / 술에 전 인간처럼 되었으니 / 이는 주님 때문이요 / 그분의 거룩한 말씀 때문이다”(23,9). 예레미야는 “불과 같고 바위를 부수는 망치와 같은”(23,29. 그리고 20,9 참조) 이 도발적인 말씀을 일상적 체험이 따르는 환시에서뿐 아니라(1,11-14 참조), 주님의 천상 어전회의에서도 받는다(23,18.22. 그리고 5,1과 각주 참조). 이 어전회의에 예레미야는 예언자의 자격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게다가 주님께서 직접 말씀을 예레미야의 입술에 담아주시고(1,9) 이 말씀이 고집센 이스라엘 백성을 삼킬 때까지(5,14) 지켜보신다(1,12). 때때로 말씀이 그를 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말씀이 드물게 그를 찾거나, 다시 그에게 내릴 때까지 형벌처럼 그를 오랫동안 기다리게 만든다(42,7). 예레미야의 삶에서 말씀은 해결의 열쇠인 동시에 골칫거리요, 흥을 깨뜨리는 자인 동시에 존재 이유이며, 그 자신과 친지들을 갈라놓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사건의 한복판으로 그를 빠져 들게 만드는 전제군주다.
우리는 여기서 예레미야가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리고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울여야 했던 노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노력의 흔적은 이 책 곳곳에 들어있는 수많은 대화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거기서 예레미야는 예언자로서 자신의 삶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하느님과 격렬한 논쟁을 벌인다. 그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것들은 현대의 주석가들이 ‘예레미야의 고백’이라고 부르는 대목들이다(11,18-12,6; 15,10.15-21; 17,14-18; 18,18-23; 20,7-13.14-18).
이 다섯 고백에서 예언자는 자신의 고립과 소외, 열악한 주변 환경에 대하여 신랄한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그는 이런 삶의 조건이 어쩔 수 없는 것이며 그 자체가 예언직의 일부라는 사실을 주님에게서 들어 확인할 뿐이다. 한편 예레미야의 다섯 고백만이 예언자 자신과 하느님 사이에 오간 대화의 전부는 아니다. 이 책에는 처음부터 다른 형태의 대화도 나온다. 예레미야가 성소를 받는 장면에서도 대화가 대부분인데, 여기서 그는 아직 나이가 젊다는 핑계를 대면서 말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헛되이 발버둥친다(1,4-10). 그의 예언직을 규정하는 초기 환시들(1,11-14), 그에게 유다 사회에 대한 하느님 심판의 정당성을 인정하게 해주는 대목(5,1-6), 이스라엘을 황폐케 하는 가뭄을 그치게 하려고 헛되이 노력하는 대목(14,1-15,9)들도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대화들을 보면 사람의 말이 하느님의 말씀과 고투하다가 결국 승리하는 쪽은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임이 드러난다. 역사적으로 그 전개 과정이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든지 - 예언 체험을 심리학적으로 탐구해 들어가기란 쉽지 않다 - 이 모든 대화는 예레미야가 줄기차게 몰두한 대상이 하느님의 말씀이었음을 증언한다.
2. 예언직 소명의 진정성
예언자의 실존을 뒤흔드는 모든 문제 가운데 예언직에 대한 확신보다 더 큰 문제는 없다. 사실 예레미야만이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사람은 아니었다. 예레미야서 자체만 보더라도 예레미야와 같은 자격으로 그 곁에서 예언자로서 지위와 특권을 주장하던 사람들의 활동도 소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스마야의 아들 우리야(26,20-24), 아쭈르의 아들 하나니야(28장), 콜라야의 아들 아합과 마아세야의 아들 시드키야(29,21), 그 밖에 수많은 무명의 예언자들(2,8.26.30; 4,9; 5,13.31; 6,13-14; 14,13; 26,7-16; 27,16-18), 바빌론으로 유배 간 예언자들(29,1) 등이 그들이다.
예레미야서 본문을 보면 처음에 이 예언자는 자신의 동료 예언자들과의 관계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행동을 할 뜻이 전혀 없었다(14,13-16; 28,6-9; 29,1 참조). 그는 한번에 그들을 ‘거짓 예언자들’로 분류할 아무런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예레미야의 고독과 관련하여 미묘한 특성을 만나게 된다. 예레미야는 고독을 자초한 적이 없었다. 그는 특정한 몇 가지 윤리적 비판을 제외하고(23,14.17.22; 29,23) 참과 거짓을 구별하고 스스로 참된 예언자라고 여기는 자들 앞에서 자신의 고유한 메시지를 특별히 옹호하는 어떠한 객관적 비판도 내놓지 않았다(28,8은 예외). 예레미야 역시 그의 경쟁자 하나니야처럼 틀릴 수 있다(28,6-9). 하나니야는 당시의 정치와 군사를 책임진 대다수와 견해를 같이하였다(아래 4항 참조).
예레미야가 받은 특별한 소명의 진정성은 그가 자신의 삶 한복판에서 하느님과 얼마나 깊은 관계를 유지하느냐에 달려있다. 하느님께서 그의 메시지에 영감을 불어넣으신 분이라면, 어찌하여 그 메시지에 일관성이 없는가?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파견하셨다면, 어찌하여 그 혼자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혼자서 그 진리를 주장해야 했던가?(여호야킴에 의해 살해된 예언자 우리야 같은 사람도 예레미야를 옹호해 주지 못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에게 임무를 맡기셨다면, 어찌하여 이 예언자는 사람들의 학대를 받아야 하는가? 오히려 사람들은 그를 동료 형제로 또는 자신들의 스승으로 기꺼이 떠받들고 환영해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계시에 적합한 인물이 어떤 모습의 인간으로 드러나는가 하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정신적 갈등을 숨기지 않는다. 자신의 고유한 사명에 관한 한 그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그는 말씀에 충실히 동화되었고 심지어 그 말씀을 “받아먹기까지”(15,16 참조) 하지 않았는가? 그는 늘 완벽한 성실로 살아가지 않았던가? 그는 자신의 동료들뿐 아니라 원수들을 위해서까지 실제로 참 예언자처럼 중개하지(18,20. 그리고 14,13; 17,16 참조) 않았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그는 고독과 적응 불능과 영원한 반동의 슬픈 주인공으로 드러나는가?
하느님의 단호한 응답은 아무런 설명도, 아무런 정당화도 시도하지 않는다. 그의 모든 불행은 하느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것으로서 갈수록 점점 심해질 것이다(12,5). 불만에 찬 하느님의 일꾼은 그분의 말씀이 다시 들리도록 개인적인 노력을 기울이면서 자신의 길을 되찾고 그 길을 성실하게 걸어야 한다(15,19-21). 다른 예언자들과 관련하여, 그들에게 아무런 임무를 맡기지 않으신(14,14-16) 주님께서는 그들의 거짓을 폭로하실 것이다(23,16). 그러나 예레미야 예언자의 영혼을 뒤흔드는 의심들을 없애버리시기 위하여 그분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진정 살아계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구태여 확인시키려 하지 않으신다.
예레미야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자신이 예고한 재앙이 실현되는 것을 볼 것이다. 유다인들은 머지않아 자신들의 운명을 반성하게 될 것이다. 몇몇 정통한 신학자들은 예레미야의 신탁들뿐 아니라 그의 예언직과 관련된 전승들까지도 수집하게 될 것이고 마침내 그를 주님의 진정한 예언자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입문 5항 참조).
3. 몇 가지 전기적 사료
이상의 근본적인 갈등과 비교할 때 이 예언자의 삶과 연관된 외적 환경은 이차적인 관심사로 밀려난다. 또한 이 환경은 그리 잘 알려진 편이 아니며 주어진 자료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결론 또한 대부분 추론일 뿐이다.
1,1에 보면 예언자의 고향은 예루살렘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아나돗이라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그의 집안은 이곳에 토지를 갖고 있었다(32장. 그리고 37,12 참조). 그는 사제 가문 출신이었다. 여기서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가 옛날 솔로몬에 의해 아나돗에 유배된 실로의 사제 아비아달의 먼 후손일 수도 있다는(1열왕 2,26-27) 가설을 끌어내었다. 나아가 조상이 물려준 종교적 전통과, 사라진 북부 왕국과 인접해 있는 지리적 조건은 그의 문체와 메시지 내용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가설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확실한 증거를 제시할 수는 없다.
1,2에 따르면 예레미야는 기원전 626년에 예언자로 부름을 받았는데 아직 나이가 어린 때였다(1,6). 많은 사람들이 이 1장 2절과 6절의 자료를 바탕으로 그가 태어난 때를 기원전 650-645년경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1,2(25,3에 다시 나옴)의 연대가 후대의 전승에 바탕을 둔 것이고 실제로 그가 성소를 받은 연대를 기원전 609-608년으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어떻든 뚜렷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예레미야의 초기 예언활동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가설이 나온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가설들이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622년 요시야의 개혁을 진심으로 환영했고 자신의 설교로 이 개혁사업에 협력했을 것이다(11,1-4 참조). 개혁의 결과로 예루살렘 성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성소들이 문을 닫고 수많은 사제들이 할 일을 잃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예레미야의 친척들이 그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11,18-22 참조). 그러나 나중에 요시야의 개혁이 일시적 효과만 내고 끝나는 것을 보고 실망한 예레미야는 유다인들의 불충실을 강도 높게 비난하였을 것이다.
이런 가설들은 예레미야가 기원전 626년에야 성소를 받았다는 연대기 자료 때문만이 아니라, 이 책이 요시야의 저 유명한 개혁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22,15-16에 약간의 암시가 있다) 그리 큰 확신을 주지 못한다. 또한 11,1-14를 비롯하여 예레미야서 여기저기에 드러나는 신명기적 용어와 사상은 다른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입문 5항 참조). 결국 예레미야의 메시지에 대한 반발은 그를 통해 전파되었을(이 추측이 맞다면) 요시야의 개혁 정책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증언대로 그의 중개를 통한 하느님 말씀의 갑작스런 개입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11,21; 예레미야의 다른 고백들 참조).
우리로서는 아무리 그것을 얻으려 해도 예레미야의 초기 예언활동에 대해 불충분한 자료만을 입수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대신 그의 생애 마지막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서는 이 책의 뒷부분에서 상당히 자세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기원전 608년에 극도로 악화된 상황을 맞아 예레미야는 성전 어귀에서 설교하는데 그 장면이 26장에 잘 나와있다(7,1-8,3 참조). 기원전 605-604년에 그는 자신의 기억 속에 간직한 신탁들을 바룩을 통하여 처음으로 두루마리에 적게 하였는데, 그 글이 몇몇 청중이 모인 자리에서 읽혀진다(36장). 기원전 594년 그는 다른 예언자들과 토론을 벌이고 조금 뒤에 바빌론에 끌려간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는데, 이 편지는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의 정신적 쇄신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다(29장).
기원전 588-587년 예루살렘이 포위된 기간에 예레미야가 시드키야 임금과 그 신하들과 겪은 갈등, 그리고 이 도성이 함락된 뒤 살아남은 자들 가운데서 펼친 그의 활동상은 32-35장과 37-44장의 본 내용을 이룬다. 우리는 이런 갖가지 정보가 아무리 자세하다 하더라도 이를 바탕으로 예언자의 전기를 작성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본문 안에서 이런 정보들을 연대기순으로 정확하게 배열할 수도 없다. 이 정보들은 가장 어려운 역사의 현장을 체험한 한 민족과 더불어 고뇌하며 살았던 한 예언자의 실존 안에서 말씀이 어떤 형태로 활동했는지를 밝혀주는 실례들일 뿐이다.
4. 여러 해에 걸친 말씀의 봉사직
처음부터 예레미야의 봉사직을 특징지었던 고독은 특이한 종교적 체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고독은 그에게 맡겨진 메시지의 내용에서 나온 결과이다. 이 메시지는, 유다인들이 공동체를 부정하고 창조까지도 철저하게 부정하는 상황과 끊임없이 마주치게 만들었다(4,23-26). 모든 것의 긍정이나 부정은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수용이나 거부에 달려있었다. 이 점에서 그의 고독은 정치적 차원을 갖는다. 그의 고독이 지속되고 유다인들이 그의 말을 계속 거부하는 한 그는 우주적 재앙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생존자가 될 것이요, 반대로 그의 말을 듣는 청중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재앙은 비켜가거나 적어도 늦추어질 것이며 사람들은 새로운 삶의 형태와 만나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의 껄끄러운 메시지는 근본적인 결정을 명령조로 요구한다. 대부분의 다른 예언자들처럼 그에게도 말씀은 인간의 삶 전체에 영향을 주는 인격적 특성을 지니는 동시에 통교의 매체가 된다.
예레미야의 봉사직을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겠다.
가) 첫 번째 시기는 소명에서 기원전 605년 가르그미스 전투까지이다. 요시야가 다스릴 때 유다는 처음에 번영을 누리는 안정 시대를 맞는다. 아시리아는 주변 국가들에 대한 폭정을 그치고 유다는 폭넓은 독립을 누리게 된다. 이를 계기로 요시야는 영토를 넓히고 온갖 종류의 개혁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가 죽자 왕국은 몇년 지나지 않아 에집트인들에게 지배당하게 되는데 그 속박이 그리 무겁지는 않았다. 한편 유다 전체는 요시야가 전사한 므기또 전투(2열왕 23,29 참조) 이후 몇년 동안 점차 기울어져만 갔다.
바로 이 기간에 예레미야는 완전히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도록 강력하게 요청받는다. 매우 도발적인 용어를 사용한 운문 신탁으로 그는 북쪽에서 일어난 불가항력적인 군대가 쳐들어와 유다 전역과 예루살렘을 초토화시킬 것이라고 단정한다(4-6장 참조). 이 무자비한 군대는 패배자들이 너무 늦기 전에 하느님께 돌아오지 않는 한 그들에게 어떤 희망도 남겨놓지 않는다. 예레미야는 자기 동족에게 회심을 촉구할 책임을 맡았지만 그들이 회개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이 백성은 자기네 길만을 너무 고집하고 그들이 세운 체제가 언제나 변함없이 유지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18,18; 8,8 참조). 유사시에 그들은 최후의 피난처요 세속의 힘이 미치지 못할 성전에 피신하면 되는 줄로 여겼다(7,4.10 참조).
예레미야는 계층별로 백성을 심문한 결과 그 명백한 증거에 승복해야 했다. 백성 전체가 잘못된 길로 빠져 들고 있다. 억압하는 자들도 억압받는 자들도, 착취하는 자들도 착취당하는 자들도 모두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5,1-6 참조). 이제 멸망을 피할 수 없다.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이 그 피부색을 바꿀 수 있겠는가? 표범이 제 얼룩을 지울 수 있겠는가? 그처럼 악에 젖어 사는 유다인들이 선을 행할 수 있겠는가(13,23)?
백성은 예언자의 통렬한 메시지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언자의 생각이 그들에게는 너무 추상적이고 현실과 거리가 멀다. 현실은 완전히 검은 것도 완전히 흰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의 메시지는 하느님에 대한 전통적인 가르침과도 맞지 않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는 가까운 분, 친밀한 분이시다(23,23 참조). 믿기지 않는 내용이 담긴 두루마리를 한 조각 한 조각 침착하게 찢어 불에 태우는 여호야킴 임금의 행동은 예레미야의 설교가 첫 번째 시기에 완전히 실패로 끝났음을 그대로 보여준다(36장).
나) 두 번째 시기는 기원전 605-587년, 곧 느부갓네살의 즉위부터 예루살렘의 파괴까지이다. 이 시기는 예레미야의 예언직 수행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시기로 평가된다. 적군의 침략과 관련된 그의 예언들은 갑자기 현실로 나타난다. 바빌론 임금은 자신의 군대로 여러 차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휩쓸었고 그 도상에 있는 작은 나라들을 자신의 뜻대로 통제하기로 마음먹었다. 거기에 장애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유다의 독립이었다. 이런 형편인데도 유다의 정치를 책임진 자들은 국제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백성의 지도자들 대다수가 유다의 정치적 독립을 결연히 선택하였다. 그들은 언제나 바빌론을 근동의 패권 다툼에서 멀리 떼어놓으려는 에집트와, 바빌론의 진출로 위협을 느낀 주변의 약소국가들과 동맹을 맺고자 하였다. 이런 정책은 유다의 통치자인 다윗 왕가가 중심이 되어 펼쳐 나갔다.
그러나 일부 지도자들은 느부갓네살 제국의 속국이 되어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행사할 희망 속에서 유다가 바빌론을 종주국으로 받들 것을 제안하였다. 예레미야서 덕분에 우리는 친바빌론파의 여러 거물급 인사들이 누구인지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예레미야의 강력한 보호자인 아히캄(26,24),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그 지방의 통치자로 임명된 그의 아들 게달리야, 예레미야가 자신의 신탁을 기록으로 남길 때 결정적 도움을 주었던 네리야의 아들 바룩 등이 그들이다. 마지막에 언급된 인물 바룩에 대해 어떤 이들은 그를 예레미야의 단순한 비서로 생각하려고 한다. 말하자면 예언자가 자신의 임무를 원활히 수행하려고 고용한 일종의 속기 필경사 정도로 여긴다. 그러나 바룩은 유다 왕궁의 재무대신이었던 그의 동기 스라야처럼(51,59 참조) 나라의 관료로 서기관직을 맡고 있었다. 바룩의 특별한 위치는 사람들이 그를 친바빌론파의 우두머리 중의 하나요 예레미야의 신탁을 부추긴 자로 여긴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43,3).
다른 제3의 제안은 완전한 자유를 얻기 위해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극단적 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다. 에집트와 동맹을 맺어보았자 나중에 다시 그들의 속국이 되고 말 것이다. 그들을 ??자유파??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실패할 경우 완전히 멸망하거나 아니면 바빌론의 정치제도에 합병될 것을 각오한다.
예레미야도 어쩔 수 없이 정치적 논쟁에 휘말려 들었다. 그의 입장은 매우 분명하였다. 그는 바빌론의 패권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그가 기회에 따라 행동하는 정치적인 인물이어서가 아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의 패권 안에서 하느님의 의지를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였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는 유다가 독립된 강국으로서 정치와 종교의 이중 통치 질서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부성적 사랑에 충실하게 응답하는 백성으로 남아있는 것이었다(3,22-4,4 참조). 또한 그분께서는 이 백성이 마음으로부터 정의를 수호하고 화목하게 살아가기를 바라신다(5,1-3; 22,13-17; 23,5-6 참조).
예레미야와 독립파들 사이를 구별하는 기준은 후자가 주님에게 소중한 가치를 모두 경멸한다는 데 있다. 특히 임금이 주범이었다(22,13-17).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국가를 없애버리기로 작정하신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하느님께서는 바빌론 제국 한복판에서 완전히 새로운 계획을 마련하신다. 그분께서는, 한때는 심판의 대상이었으나 이제는 변화된 공동체, 자신의 영광을 찾지 않고 오히려 모든 이의 안녕을 돌보고자 하는 공동체를 창조하고자 하신다. 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다른 이의 행복을 자기 행복의 조건으로 삼는다(29,5-7). 이 공동체는 마침내 조상들의 나라로 행복하게 돌아온 뒤에, 옛날 주님과 맺은 계약을 더욱 심화시켜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에 더 이상 어떤 중개 계층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31,31-34). 이 메시지는 이미 3,15와 23,6에도 나온 것으로서 이 대목에 보면 주님께서는 당신께 온전히 성별된 사람들을 통하여 당신 백성을 인도하신다.
다) 세 번째 시기는 기원전 587년, 곧 예루살렘의 함락 이후부터 시작된다. 사람들은 이 시기를 별로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데 그것은 바빌론 유배자들이 전체 유다 인구의 일부 계층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그대로 본국에 남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데서 온다. 버려진 이 대중은 크게 세 가지 경향으로 분류된다. 게달리야를 중심으로 한 친바빌론파는 바빌론의 보호 아래 나라를 재건하고자 했다. 예레미야도 이 부류에 속하였다. 두 번째 부류는 양심의 가책에 매이지 않고 행동하는 이스마엘이 이끌었는데 이들은 암몬 임금에게 의존하면서 폭력을 사용하여 독립을 쟁취하려고 하였다(41,1-10 참조). 세 번째 부류는 카레아의 아들 요하난이 이끄는 것으로서 에집트에 망명하기를 원하였다. 이 망명길을 말리는 예레미야의 신탁에도 아랑곳없이 그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실천에 옮겼고 이 과정에서 예레미야를 인질로 끌고 갔다. 예레미야의 흔적은 이 에집트 망명길에서 끊어지고 만다.
5. 예레미야서의 형성과 구조
예레미야서의 구조는 비교적 단순하다.
1,1-25,14: 유다를 거슬러 한 예레미야의 신탁과 행동 26,1-45,5: 이스라엘과 유다를 위한 구원의 신탁, 그리고 예레미야의 예언직에 관한 기록 46,1-51,64(25,15-38의 서문 포함): 이방 민족들을 거슬러 한 신탁 52,1-34: 2열왕 24,18-25,30에서 빌려온 역사적 문헌(몇 가지 새로운 자료가 첨부됨), 예루살렘의 함락을 다룸.
칠십인역에는 이방 민족들을 거슬러 한 신탁이 25,13 바로 다음에 이어진다. 이 배열은 본문 두루마리의 더욱 원초적인 상태를 시사한다. 왜냐하면 다른 여러 예언서들(이사 1-39; 에제키엘서; 하바꾹서; 스바니야서)도 이방인들을 거슬러 한 신탁을 이스라엘을 거슬러 한 재앙의 신탁과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의 신탁 사이에 놓는 삼분법 구조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넷으로 크게 구분한 각 부분에는 소단위 신탁들과 문헌들이, 비슷한 주제나 표상에 따라 한데 모여있다. 예를 들어 22,11-23,8에는 다윗 가문에 관한 신탁들이, 23,9-40에는 예언자들에 관한 신탁들이, 그리고 30,1-31,40에는 새 이스라엘의 재건을 알리는 문헌이 모여있다. 그 밖에 2장, 4-6장, 14,1-15,4 등의 본문은 최종 편집에 앞서 수집된, 예레미야의 육성이 담긴 문헌들로 보인다.
예레미야서의 첫 부분(1-25장)과 관련하여 바룩이 기록하고 여호야킴이 없앴으나 나중에 더욱 긴 형태로 재작성한 두루마리의 이야기는 주석가들의 특별한 연구 대상이 된다. 이 두루마리는 기원전 605년 이전에 선포한 위협적 신탁을 포함했을 터인데 그 내용이 십중팔구 현재의 예레미야서 1-25장에 한데 모아진 자료에 삽입되었을 것이다. 주석가들이 온갖 지혜를 동원하여 이 본문들의 성격을 밝히고자 하였지만, 서로 모순되는 연구 결과들을 내놓게 되었고, 일치된 견해를 얻어내는 데 실패하였다. 현재로서는 ‘최초의 두루마리’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포기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문제가 복잡한 이유는 1-25장의 운문 신탁들이 산문과 교묘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운문 신탁들은 대부분 예레미야에게까지 소급되는 원초적인 문헌인데 반하여 산문은 예레미야가 죽은 뒤, 유배 기간 동안에 저작활동을 벌인 신명기적 편집자들의 용어와 신학 사상을 반영한다. 이 편집자들은 예레미야서뿐 아니라 ‘전기 예언서들’이라 부르는 구약성서 책들을 집대성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사람들이다. 운문과 산문이 뒤섞인 이 장들을 모두 예레미야의 육성 문헌으로 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후대의 편집자들에 의해서 다듬어진 예언자 자신의 신탁들을 재현하는 것으로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예레미야서의 두 번째 부분에는 예레미야의 직무 수행에 관한 기록들이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바룩이 지은 것으로 본다. 사람들이 바룩을 이 기록의 저자로 생각하는 이유는 거기에 나오는 정확한 정보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사건들을 직접 눈으로 본 증인의 기록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이 기록은 바룩에게 개인적으로 전하는 신탁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 기록을 바룩이 직접 지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완전히 확실한 것은 아니다. 저자 바룩은 아마도 예레미야와 함께 에집트로 갔는지 모른다(43-44장 참조). 43,6에 따르면 바룩은 전에 친바빌론파의 우두머리였다. 이 사실 때문에 그가 예레미야와 함께 에집트로 강제 이주당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겠다.
바빌론 유배 초기부터 수많은 소책자, 단편 문헌, 여기저기서 모은 기록들, 그리고 예레미야와 관련된 몇 가지 구두 전승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 모든 자료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낸 사람이 바로 무명의 편집자이다. 우리는 이 편집자의 신원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가필과 수정, 신명기적 문체를 바탕으로 한 해설 등으로 본색을 드러낸다. 특히 신명기적 문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데 예레미야서의 거의 모든 장에서 눈에 띈다. 기원전 6세기 후반기는 이스라엘 안에서 문학과 신학 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시기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수많은 문헌들을 수집하고 해석하며 그것들을 모아 낱권의 책으로 엮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운명에 대한 더욱 깊은 성찰과 이해를 얻게 되었을 것이다.
[출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새번역성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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