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바룩 입문 | |||
---|---|---|---|---|
이전글 | [구약] 애가 입문 | |||
다음글 | [구약] 에제키엘 입문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2 | 조회수4,236 | 추천수1 | |
파일첨부 바룩입문.hwp [763] | ||||
바룩 입문
바룩서는 칠십인 그리스말 역본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졌다. 예로니모는 히브리인들이 바룩서를 읽지도 않고 지니지도 않았다고 해서 그것을 라틴말로 옮기지 않았다. 따라서 불가타에 수록된 바룩서 번역은 예로니모의 번역이 아니라 옛 라틴말역이다. 칠십인역에서 바룩서는 예레미야서와 애가 사이에 있고 예레미야의 편지는 애가와 에제키엘서 사이에 있다. 그러나 우리말 번역에서는 불가타 전통에 따라 예레미야의 편지를 바룩서의 마지막 장인 6장으로 소개한다. 이 입문에서는 칠십인역의 바룩서 본문을 먼저 해설하고, 그 다음에 예레미야의 편지에 관해서 해설하겠다.
1. 바룩서의 저자
예로부터 이 책의 저자로 불린 바룩은 예레미야 예언자의 비서요 친구이며, 동시에 유다 왕궁의 서기관이었다. 바룩이라는 이름은 히브리말로 “축복받은 이”라는 뜻을 지닌다. 예레미야서는 바룩에 관하여 비교적 상세하게 적고 있다. 바룩은 유다의 명문 출신으로서 마아세야의 손자이며 네리야의 아들이었다. 그의 동기 스라야는 시드키야 임금의 재무대신이었다(예레 51,59). 바룩은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파괴에 관하여 전한 신탁을 글로 적어 유다 임금 여호야킴에게 전달하였다(예레 36,1-21). 그러나 여호야킴은 그 두루마리를 칼로 한 조각 한 조각 베어 불에 살라버렸다. 그러자 바룩은 그 내용을 더 늘린 신탁의 두루마리를 새로 만들었다(예레 36,27-32). 그 다음에 바룩은 호사야의 아들 아자리야에게 친바빌론파로 몰려 예레미야와 함께 에집트로 끌려갔고(예레 43,1-7), 그뒤 바룩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상이 예레미야서가 전하는 바룩의 생애이다. 그러나 바룩서의 저자가 이 바룩과 같다고 보기는 어렵다. 바룩서가 전하는 내용에 따르면 예레미야의 비서인 바룩이 바빌론에서 유배살이를 하며 예루살렘에 남은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이 책을 편집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빌론의 예루살렘 점령과 유배에 관한 그 당시 문헌의 기록과 바룩서 자체의 기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어서 이 책의 저자를 도저히 바룩으로 여기기 어렵게 한다(1,1.2.8.10.12 그리고 14절의 각주들 참조). 더구나 예레미야서에 따르면 바룩은 바빌론에 가서 유배살이를 하지 않고 오히려 에집트로 끌려갔다. 따라서 이 책은 가명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 가명 작품은 저자의 이름이 실제 이름과 다를 뿐 아니라 작품의 상황 설정이나 염두에 둔 독자도 본문의 진술과 다르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바룩서를 읽을 때 부딪히는 가장 큰 어려움이다. 바룩서는 기원전 587년 느부갓네살의 예루살렘 점령과 유배기간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지만, 이 배경을 저자가 살던 시대에 맞추려고 적지 않은 수정을 한다. 역사적 실제 배경과 본문에 묘사된 배경 사이에 차이가 나는 것은 서로 다른 두 시대를 연결시키려는 노력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바룩서를 공간과 시간 안에 제대로 자리매김하고 이 책의 기능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본문이 말하고 묘사하는 내용 뒤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지를 찾아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2. 바룩서의 구조
바룩서는 성격이 다른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네 부분은 전혀 다른 저자의 손과 시대를 거쳐 나왔다. 네 부분의 제목은 역사적 서문, 참회기도, 지혜에 관한 명상, 예루살렘을 위한 권고와 위로이다. 이들은 본래의 언어와 문학양식과 사상 면에서도 서로 다르다. 여기서 자연히 이 책의 편찬 과정에서 어떤 자료들이 이용되었는가, 그 자료들은 서로 어떤 연관과 통일성을 갖는가, 편집의 전반적 기능은 무엇인가 하는 점들이 풀기 어려운 문제들로 떠오른다.
가) 역사적 서문(1,1-14)
이 부분은 바룩서가 어떤 역사적 상황에서, 무슨 의도로 쓰여졌는지를 우리에게 밝혀준다. 이 서문은 칠십인역에 친숙한 저자가 그리스말로 직접 편집했는가? 아니면 원래 히브리말을 사용하는 저자가 작성한 것인가? 이 두 가지 가설이 서로 맞서왔으나 나중 가설이 좀더 믿을 만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서문은 바로 이어지는 기도의 머리글 구실을 한다. 특별히 참회기도를 언제 그리고 왜 바쳐야 하는지와, 이 기도가 어떤 전례의 틀을 가지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이 이 서문의 기능이다.
나) 참회기도(1,15-3,8)
이 부분은 고백(1,15-2,10)과 기도(2,11-3,8)로 나눌 수 있다. 이 기도의 그리스말 본문은 여러 성서 구절들을 짜깁기해 놓은 것인데, 본래 히브리말로 편집된 것을 번역한 것 같다. 참회기도는 민족적 고백의 기도로 알려진 한 문학양식에 속한다. 이 문학양식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증언이다(에즈 9,6-15; 느헤 9; 시편 106; 다니 9,4-19). 쿰란 제6동굴에서 나온 문헌들, 특히 ??빛을 내는 천체들의 말??이라는 제목의 전례 문헌에도 이 문학양식이 나온다.
기도의 시작 부분은 다니엘의 기도에 바탕을 두지만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개작한다. 바룩은 특히 예루살렘과 그 무너진 성소에 관련된 다니엘서의 구절들(다니 9,16.17ㄴ.18ㄴ.19)을 삭제한다. 그 대신 유배살이하는 사람들의 상황에 관해 좀더 자세한 기록을 덧붙인다(2,3-5.13.14ㄴ). 이 같은 변형은 바룩의 참회기도가, 예루살렘 성전을 더 이상 향유할 수 없었으며 다니엘서에 묘사된 것처럼 극적인 상황에 처했던, 디아스포라 유다 공동체에서 나왔음을 시사한다. 다니엘서의 민족적 참회기도와 바룩서의 참회기도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연대순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여러 가지 가설이 가능하다. 바룩이 다니엘서의 기도를 직접 빌려왔다는 결론을 내리면 당연히 다니엘서의 기도가 바룩서의 기도보다 시대적으로 앞선다. 그러나 두 민족적 고백의 기도가 다 같이 더 옛 시대의 기도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 바룩 2,17에 나오는 예스러운 사상이 그 좋은 예이다. 이럴 경우 두 책의 저자는 같은 사료를 서로 독자적인 관점과 형태로 편집하여 끼워넣었을 가능성이 높다.
바룩서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부분에 나오는 전례의 기능과 여러 가지 정보들과 당대의 상황, 이를테면 단식과 애도, 성전에서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 예물, 민족적 고백 등은 여기 나오는 전례의 틀이 어떤 민족적 재앙이 지나간 뒤에 백성을 하느님과 화해시킬 목적으로 거행된 참회예식임을 시사한다. 특히 서로 다른 시대의 갈등 상황이 고려해 볼 대상이 될 수 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통치 아래에 있었던 기원전 169년 이후 수년간,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의 예루살렘 점령, 기원후 70년에 있었던 티투스의 예루살렘 함락 등이 바로 그런 상황들이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기원전 169년 안티오쿠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고 그로부터 5년 뒤인 164년에 유다 마카베오가 성전의 예배를 정상적으로 회복시킨 상황이(1,2.8 참조) 이 부분에 사용된 유형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듯하다. 느부갓네살과 그의 아들 벨사살을 위한 중개기도(1,11)는 안티오쿠스 4세와 나중에 안티오쿠스 유파톨이 될 그의 아들을 위한 기도로 생각할 수 있다. 바룩서의 처음 두 부분이 본래 염두에 둔 공동체는 의심할 여지 없이 안티오쿠스 치세 아래에 있었던 디아스포라 유다 공동체였을 것이다. 이 유다 공동체는 대사제 메넬라오스와 같은 헬라계의 혼합주의자들과는 달리 유다의 종교적 전통에 강한 집착을 보였지만, 정치적으로 셀레우코스 가문에 맞서는 군사적 저항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1,11-12; 2,21.24).
다) 지혜에 관한 명상(3,9-4,4)
참회기도에 이어 지혜에 관한 명상이 나온다(3,9 각주 참조). 이 대목의 본문은 유배살이하는 백성의 불행이 무엇 때문인가 하는 질문으로 시작되며 그 대답은 지혜문학의 고유한 용어들로 이루어진다.
이 지혜에 관한 명상은 유다 지혜 사상사(思想史)의 전환기에 자리잡혀 있다. 유다의 보편적 지혜 사상은(잠언 8,17.31)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정의할 수 있다(욥 28,28; 시편 111,10; 잠언 1,7; 9,10; 15,33). 때로는 지혜가 선민 이스라엘이 유일하게 소유하고 있는 율법과 동일시되고(4,1; 집회 24,8-12), 때로는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이로 나타나기도 한다(잠언 8,22-31; 집회 24,9. 그리고 바룩 3,32-35; 3,32의 각주 참조). 그러면서도 지혜는 사람들 사이에 거처한다. 이 마지막 개념이 신학적으로 발전하여 지혜를 메시아와 동일시하기에 이른다(1고린 1,24; 2,6-9; 요한 1,14). 지혜를 율법과 동일시하고, 창조사업과 관련하여 하느님의 동업자와 사람들 사이에 거처하는 메시아로 보는 사상은 바룩서에서 하나로 모아진다(4,1과 3,38을 비교). 지혜를 율법과 동일시하는 사상은 그리스말 본문에서 더욱 뚜렷이 눈에 띈다. 지혜를 메시아와 동일시하는 사상도 그리스말 본문에 함께 나타나지만, 이 사상은 특히 바룩 3,38의 라틴말역에 더 잘 드러나 있다. 옛 라틴말역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지혜를 야곱에게 맡기신 뒤에야 “땅위에 그가 나타나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라틴말 본문은 여기서 “그”를 남성 단수 3인칭으로 표현한다. 이와는 달리 그리스말 본문에서는 “그”를 지혜를 가리키는 여성 단수 3인칭으로 표기하고 있다. 라틴말 본문의 이 작은 변경은 지혜에 관한 개념 전체를, 지혜와 율법의 동일시에서 지혜와 메시아의 동일시로 이동시키기에 충분하다(3,38 각주 참조). 그리하여 교부들도 이 구절을, 그리스도의 육화를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바오로 사도도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처음 두 장에서 바룩서의 이 대목을 이용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바룩서의 지혜에 관한 명상이 집회서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까닭에 이 대목의 연대를 기원전 2세기로 잡을 수 있겠다. 그러나 더 정확한 연대는 밝히기 어렵다. 이 대목의 언어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지만 원래 그리스말로 작성되었으리라고 보는 것이 무난할 것 같다. 이 대목을 바룩서의 다른 부분과 통합시키는 문제는 만족할 만한 답을 얻어내기 어렵다. 어떤 사람들은 이 대목을 속죄의 날에 선포된 설교로 이해할 것을 제안하였다.
라) 예루살렘을 위한 권고와 위로(4,5-5,9)
이 부분에도 또 다른 문학 유형이 나타난다(4,5 각주 참조). 그것은 격려와 위안의 시로 되어있는데 제2이사야서의 문체와 매우 가깝다. 원문이 히브리말이었는지 그리스말이었는지를 밝히는 문제는 앞 부분에서와 똑같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직후에 편집된 솔로몬의 열한 번째 시편이 바룩서의 이 부분에 가장 가깝다. 그리고 두 문헌을 비교해 보면 바룩서의 이 대목이 솔로몬의 시편보다 오래되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시대적 배경을 유배살이 초기로 잡고 정치적으로 이민족들과의 화해로 기울어졌던 역사적 서문과 참회기도와는 달리, 이 대목의 본문은 이민족의 지배에 대해 적대적이고,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이 곧 돌아올 것임을 전제한다. 따라서 이 대목의 본문은 처음 두 대목의 본문들과 전혀 다른 시대적 상황과 분위기에 속한다. 그 본문은 기원전 63년 이전, 아마도 기원전 2세기 후반 어느 시점에, 셀레우코스와 관계를 멀리하고 하스모네아 가문의 정치적 군사적 성공으로 용기를 얻게 된 디아스포라 유다 공동체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예루살렘을 위한 권고는 별 어려움 없이 참회예식의 틀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4,20 각주 참조). 이 대목은 결국 이스라엘의 민족적 탄원에 하느님께서 신탁의 형식으로 응답하신 것이라 하겠다.
3. 칠십인역 바룩서의 통일성
위에서 살펴본 내용에 따르면 바룩서는 예루살렘 출신 유다인들에게 참회예식을 거행하도록 격려하는 디아스포라 유다 공동체의 기록이다. 가장 오래된 처음 두 부분은 기원전 164년의 사건들과 동시대 또는 바로 그 다음 시대에, 메넬라오스파와 마카베오파 사이에 정치적으로 중도 입장을 취한 디아스포라 유다 공동체에서 나온 것 같다. 이와는 달리 이 두 부분에 덧붙여진 네 번째 부분은 유다의 독립으로 생겨난 시대적 분위기에서 나왔음에 틀림없다. 지혜에 관한 부분은 그 출처를 정확하게 밝히기가 어렵다. 그러나 한 사람이 계속 말하는 일관된 문체를 이유로 이 부분을 기꺼이 ‘예루살렘을 위한 권고와 위로’에 연결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바룩서는 전체적으로 기원전 2세기 후반에 결정적인 꼴을 갖춘 듯하다.
바룩서는 그 본문의 꼴을 보면,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생긴 단절을 공인하는 내용으로 시작하여 둘 사이의 화해로 끝난다. 단절에서 화해로 바뀌는 과정은 먼저 중개자의 도움을 받아 죄악에 관해 반성하고, 그 다음에 율법과 동일시되는 지혜에 관해 명상하는 순서로 진행된다. 그리고 이 진행 과정은 한 동작처럼 연결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바룩서의 통일성은 그 전례적 기능에 있다. 바룩서는 아마도 참회를 위한 단식일의 안내서처럼 읽혀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실제로 현실에 적용시킬 수 있는 전례 독서로 자리잡은 것은 기원후 2세기 이후였을 것이다. 이를테면 기원후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추모하는 단식일에 이 책이 읽혀졌을 법하다. 유다 전승, 특히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와 미쉬나는 기원전 587년 바빌론의 예루살렘 함락과 기원후 70년 로마의 예루살렘 점령이 똑같이 다섯째 달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랍비 문헌에도 기원후 70년 이후에 속죄하려고 단식을 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데, 이 단식예식의 원래 형태는 이미 즈가 7,3; 8,19에 암시되었다. “사도헌장”(V,20,3)도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의 파괴를 추모하는 기념일에 바룩서를 읽었다고 증언한다. 이처럼 바룩서가 참회를 위한 단식일에 읽혀졌다는 가설을 뒷받침해 주는 증언들은 많다. 가톨릭교회의 전례에서도 바룩서가 읽혀진다. 특히 바룩 3,9-15.32 - 4,4는 부활 성야 독서의 일부로 채택되었다.
4. 예레미야의 편지
예레미야의 편지는 번역본에 따라 애가 다음에 나오기도 하고 바룩서 다음에 나오기도 한다. 이 편지는 바룩서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지만, 불가타에서는 이 편지가 바룩서 6장에 나온다. 오리게네스에 따르면 “애가와 편지를 포함한 예레미야서”는 히브리말 경전 22권 가운데 하나이다(에우세비오, 「교회사」 6,25 참조). 오리게네스와는 달리 예로니모는 이 편지를 위경으로 여겨, 불가타에는 이 편지의 옛 라틴말 번역을 옮겨놓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가) 본문의 구조와 내용
본문의 서두는 이 글이 예레미야가 보낸 편지의 사본임을 밝힌다. 이 편지의 수신인들은 바빌론에 유배살이하러 떠나는 사람들이다. 문학 유형으로 볼 때 이 글은 서간이라기보다는 설교로 분류해야 마땅하다. 그 전반적 내용은 우상숭배를 배척하는 데 역점을 두는데, 예레미야서와 제2이사야서와 맥을 같이하고(이사 44,9-20; 예레 10,1-16. 그리고 이사 40,19-20; 41,6-7; 46,1-9 참조), 그 사상이 궁극적으로는 지혜서(13-15장)와 바오로 서간(로마 1,18-32)에까지도 이어진다.
바룩서 6장에 나오는 이 편지의 본문은 후렴처럼 반복되는 권고를(4. 14. 22. 28. 39. 44. 51. 56. 64. 68절) 기준으로 나누어진다. 그러면서도 전체 구조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서론(1-6절) 다음에 나오는 본론의 첫 번째 부분은 우상들을 무기력하고 썩어 없어질 피조물로(7.26절), 경멸해야 할 예배 대상으로(27-32절), 무능한 존재로(33-39절) 단죄한다. 두 번째 부분은 같은 내용을 순서를 바꾸어 다시 소개한다. 곧 우상들에 대한 헛된 예배(40-44절), 우상들의 특성(45-51절), 그것들의 무력함(52-57절) 순으로 소개한다. 세 번째 부분은 우상들을 쓸모있는 도구들과 자연 현상과 야생 동물들에 비교하면서 우상들이 열등함을 강조한다(58-68절). 마지막으로 편지의 본문은 우상들을 허수아비와 가시덤불과 주검과 비교하면서 그것들은 전혀 쓸모없고 무기력하며 썩어 없어질 것들이라고 결론짓는다(69-71절).
나) 친저성과 원문의 언어
이 편지가 예레미야서와는 다른 정보를 제시하고(2절 참조) 예레미야 예언자 이후 시대에 나온 글들을 이용하며, 히브리말 성서 정경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저자를 예레미야로 생각할 수 없게 한다.
이 편지에 사용되었을 원래의 언어와 거기에 언급된 우상들의 정체에 우선적으로 착안하여, 어떤 사람들은 이 편지를 헬라 유다교에서 나온 그리스말 문헌이라고 주장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바빌론의 유다 공동체를 수신인으로 삼아 히브리말로 쓴 원문을 후대 사람이 바빌론의 우상숭배를 셀레우코스 시대의 우상숭배와 비교할 목적으로 번역하였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원문이 그리스말로 쓰여지지 않았음을 주장하려고, 잃어버린 히브리말 원본의 번역자가 히브리말을 오해하거나 잘못 읽은 사례들을 논증으로 제시하려 하였지만, 이 논증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6,11.30.71 각주 참조). 특히 69절의 내용이 칠십인역에는 없는 예레 10,5의 히브리말 본문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편지의 원문이 히브리말로 쓰여졌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이용된다. 히브리말 원문이 있었다면 이 원문의 그리스말 번역은 기원전 1세기 이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쿰란 제7동굴에서 발견된 이 편지의 파피루스 사본 단편은 그리스말 본문의 가장 오래된 증언이다(43-44절 참조). 이 사본의 연대는 기원전 100년경으로 추정된다.
다) 역사적 배경
우상들에 대한 세부 묘사와, 경신례와 사제직에 연관된 기록들에는 우상숭배를 혐오하는 외부 사람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이것들은 대부분 예레미야서나 이사야서의 자료들을 이용한 것이지만 몇몇 기록들은 저자가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작성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기록들은 비교적 정확한데, 특정한 경신례 분위기를 묘사한 것처럼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주석가들은 이 기록들이 셀레우코스 시대에 부흥된 바빌론의 경신례를 전제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기록들에서 논쟁 요소를 제거하고 자세히 본문을 살펴보면 바빌론 경신례와 관련된 여러 가지 예들을 발견할 수 있다. 신의 몸단장(12절)은 ‘입 세척’ 예식을 암시하고, 희생 제물을 팔아 이득을 챙기는 사제들의 행위(27절)는 우상에게 동물의 기름진 내장을 바친 다음에 사제들이 서로 희생 제물의 몫을 나누어 가지던 관습을 암시한다. 바빌론의 최상 신 벨은 마르둑과 같다. 액운을 쫓는 사제들은 질병의 악령을 벨의 힘으로 몰아낸다고 주장한다(36절). 마르둑은 치유의 신일 뿐만이 아니라 정의의 신(13절), 전쟁의 신(14절), 행운의 신(34절), 비의 신(52절)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30`-31절에 언급된 수레 행렬과 애도 예식은 새해 축제의 첫 번째 행사를 언급하는 것 같다. 새해 축제에서 마르둑과 그의 하급 신의 상들은 수레에 얹혀 신전 내부에서 나와 도성 밖으로 행렬해 나아간다. 신이 도성에서 사라짐은 고통의 상황을 뜻하는데, 그가 개선하여 돌아오면 고통은 끝난다. 그 밖에, 여사제직이나(28-29절) 경신례적 간음과(10.42-43절) 관련된 요소들은 전투와 사랑의 여신 이쉬타르 숭배를 암시한다. 단, 예레미야의 편지에서는 사랑의 여신으로서의 이쉬타르 숭배만 부각된다. 이 첫 번째 가설에서 이 편지의 히브리말 본문은 바빌론의 디아스포라 유다 공동체가 부흥된 바빌론 종교의 어떠한 혼합주의에도 휩쓸리지 않게 하려고 그들에게 보내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편지에 나오는 우상들의 성격을 규명할 때 바빌론과 느부갓네살(1-3절), 또는 갈대아인들(40절)의 언급에 지나치게 매달려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언급들은, 이 편지의 저자를 예레미야로 가정하는 것과 똑같이, 이 편지의 배경을 가상의 역사적 지리적 틀, 곧 바빌론의 유배살이 안에 자리잡게 하려고 저자가 삽입한 요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번째 가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곧 편지의 논쟁적 요소는 시리아나 페니키아의 경신례를 공격하려고 생겨났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닷과 아쉬다롯의 숭배를 떠올릴 수 있다. 수레 행렬은 특별히 옛 시리아 동전에 자주 나타난다. 더 후대에 나온 사모아 루치안의 증언에 따르면(시리아 여신, 6), 아도니스의 죽음과 부활을 경축하는 예식들이 비블로스의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거행되었다. 이 예식들은 장례 때에도 거행되었다. 예식 참가자들은 머리를 밀었고 흔히 경신례적 간음이 곁들여졌다. 물론 이런 견해들은 가설의 범위를 넘어서지는 못한다. 그럴지라도 이들은 편지 안에서 우상과 맞서 형성된 헬라 유다 사상(특히 솔로몬의 지혜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의 몇몇 논쟁적 요소들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준다(17.45-47.59-67절). 이 두 번째 가설은 편지의 원문이 히브리말로 쓰여졌건 아니건 관계없이 이 편지가 그리스 시대에 시리아나 페니키아의 유다 공동체들을 겨냥하여 쓰여진 것으로 전제한다.
라) 작성 연대
마카베오 하권(2,1-2)은 예레미야에 관한 문헌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문헌에 따르면 예레미야가 유배자들에게, 화려한 치장을 하고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우상들의 모습에 현혹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이 언급이 예레미야의 편지에 대한 암시라면, 이 편지는 기원전 2세기 후반 이전에 쓰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어떤 이들은 이 편지 2절과 예레 29,10 사이의 차이에 주목한다. 이들은 전자가 후자의 “칠십년”을 “일곱 세대”, 곧 280년으로 바꾼 것은 일종의 현실 적용을 가리키는 표지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편지의 저자가 살던 시대는 유배의 시작이 기원전 586년(또는 597년의 제1차 예루살렘 침공)에 일어났으니 이로부터 일곱 세대를 헤아리고 난 기원전 4세기 말엽(306년 경)이 될 것이다. 이상 두 가지 가설의 논증들은 저마다 취약점이 있긴 하지만, 이를 바탕으로 편지의 작성 연대를 기원전 4세기 말에서 기원전 2세기 중반 이전으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마) 문체
편지의 저자는 자기 선임자들처럼 논쟁 무기로서 냉소적 문체를 사용한다. 그는 자신의 논점을 날카롭게 하려고 우상숭배자들이 우상의 형상과 신성 자체를 혼동한다고 믿기를 좋아한다. 그는 우상들이 아무리 신성시된다 할지라도 그것들의 환영은 숭배자들의 눈에 무기력한 존재로 남아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짐짓 모르는 체한다. 실제로 저자의 우상숭배에 관한 날카로운 비판은 그런 비판의식을 견지하는 신학에 바탕을 둔다. 편지에서는 이 신학이 암시될 뿐이지만 여기에서 그 개요를 재구성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우상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기능과 특성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하느님에게서 발견된다(특히 33-37절과 52-53절의 부차적인 언급들을 참조). 만들어지고(7.45-46절) 썩어 없어질(19.23.54.71절) 우상들과는 달리 유다인들의 하느님께서는 창조됨 없이 영원히 계시는 분이시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우상들은 피조물의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대비된다. 우상들은 수없이 많지만 하느님께서는 한 분뿐이시다. 우상들은 생명이 없지만 그분께서는 살아계신 분이시다. 우상들은 감옥처럼 신전 안에 갇혀있지만 하느님께서는 공간의 제약 없이 어디에나 계신다. 우상들은 능력이 없어 사람들의 요구나 관심사를 채워주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섭리하시며 스스로 충만을 완전하게 누리시는 분이시다. 결국 편지의 저자가 논쟁의 무기로 사용한 이방신들의 부정적 묘사는 이스라엘의 초월자 하느님과, 그분의 창조와 섭리의 활동을 새롭게 긍정하는 구실을 한다.
[출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새번역성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