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애가 입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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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2 | 조회수4,368 | 추천수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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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가 입문
1. 책 이름과 역사적 배경
히브리 성서에서는 책의 첫 낱말에 따라 그 책의 이름을 지었다. 이와 관련하여 한자권에서 [애가(哀歌)라 부르는 책의 히브리 이름은 “에카(=`아!; 또는, 어찌하여!)”가 된다. 이 책은 다섯 개의 노래로 이루어졌는데(이에 따라 역시 다섯 개의 장으로 나뉜다), 둘째와 넷째 노래도 이 “에카!”라는 말로 시작한다(이사 1,21와 예레 48,17 참조). 반면에 그리스말 번역에서는 책의 내용에 따라 “트레노이(=`애가)”로 불리는데, 탈무드에 따르면 히브리말에서도 본디 ‘만가’의 뜻을 지닌 “키노트”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라틴말 번역에서도 같은 뜻을 지닌 Lamentationes가 채택되었다. 이후 이 라틴 명칭 또는 그리스 명칭이 라틴말로 음역된 Threni가 서양에서는 전통적인 이름이 되는데, 이것이 히브리 문학 유형이 의도하는 바에 더 상응한다고 하겠다. 이 애가 또는 만가 유형은, 장례식 때 불린 조가(2사무 1,17-27 참조)와 더불어, 국가적 환난에도 적용될 수 있었다.
이 책은 기원전 587년에 바빌론의 임금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성전을 파괴한 사건을 역사적 배경으로 한다. 느부갓네살은 이어서 유다 왕국 국민의 일부를 바빌론에 강제로 이주시킨다(2열왕 25,1-21 참조).
유다인들은 (확실하게는 기원후 6세기부터) ‘아브’라 불리는 다섯번째 달(한 해는 과월절로부터 시작한다)의 9일에 거행되는 기념일에 이 책을 봉독한다(그래서 히브리 성서에서 애가는 유다인들의 다른 주요 축제 때 봉독되었던 룻기/아가/코헬렛서<전도서>/에스델서와 함께 머길로트<‘축제 두루마리’ 곧 축제 오경>의 일부를 이룬다). 그런데 이날은, 기이하게도, 위의 사건만이 아니라 기원후 70년 제2 성전이 로마인들에 의하여 파괴된 것까지도 기념한다.
2. 저자
칠십인역은 유다인들의 어떤 전통에 따라 이 책을 예언자 예레미야의 작품으로 전하는데(그래서 이 번역본과 불가타, 그리고 현대의 많은 번역 성서에서는 예레미야서 다음에 자리하고, 이에 따라 맛예레미야의 애가맜라는 명칭과 함께 불려오기도 한다), 이는 예레미야가 유다의 임금 요시아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가를 지었다고 전하는 2역대 35,25에 기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사실상 애가의 4,20은 예레미야가 유다의 임금 시드키야에 대하여 생각했던 바와는 별로 일치하지 않는다(예레 23,6; 24,8도 참조). 이 밖에도 예레 31,29-30은 애가 5,7에 표현된 응보의 교리를 논박하고 있으며, 예레 37,5-7은 애가 4,17에 나오는 에집트와의 동맹 관계를 공박한다(5,6; 예레 2,18도 비교). 또한 예언자들이 주님께로부터 계시를 더 이상 받지 못한다는 2,9의 말을 예레미야 자신이 한다는 것은 모순일 것이다. 이 2,9의 본문은 애가가 바빌론이 아니라, 팔레스티나 - 예루살렘에서 저작될 수밖에 없었음을 드러내는 징표임을 지적할 수 있겠다(2,10; 4,22; 5,4.8.18도 참조). 바빌론에는 에제키엘의 말을 듣는 일정한 청중이 있었기 때문에(에제 8,1 참조) 그의 존재가 무시될 수 없었다. 반면에 예레미야가 에집트로 도피하는 무리에 의하여 끌려감으로써(예레 43,6), 팔레스티나에는 이제 예언자가 더 이상 없다는, 또는 예언자가 더 이상 주님께로부터 환시를 받지 못한다는 말(2,9)이 나오게 된 것이다. 또한 애가 안에 들어 있는 다섯 개의 노래들이 형식과 기조를 달리하는 것으로 보아 서로 다른 출처에서 유래하는 작품들일 수 있다. 애가는 예레미야의 작품이 아니다. 그러나 저자가 누구인지는 물론이고, 한 사람 또는 한 집단, 아니면 여러 사람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졌는지에 대하여도 확정적으로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3. 문학 양식
다섯 개의 노래로 이루어진 애가의 처음 네 개는 ‘알파벳 노래’이다(시편 9-10; 25; 34; 37; 111; 112; 119; 145; 잠언 31,10-31 참조). 곧 각 노래의 절 수는 22개로 되어 있고, 각 절은 22자에 달하는 히브리 알파벳의 철자 순서에 따라 시작한다. 그러나 첫째와 나머지 세 노래의 알파벳 순서에는 약간 다른 점이 있다. 곧 첫째 노래는 현재 우리에게 전해진 알파벳 순서를 따르지만, 2,3,4장에서는 이와는 달리 페( )가 아인( ) 앞에 자리하고 있다. 이는 저작 당시 알파벳의 순서가 유동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리고 셋째 노래는 이른바 3중의 알파벳 노래이다. 곧 이 3장에서는 각 절이 세 줄로 되어 있는데(우리말 번역에서는 여섯 행), 각 줄이 모두 알파벳 순서에 따라 같은 철자로 시작하는 것이다(예컨대 1,2,3절은 모두 히브리 알파벳의 첫 글자인 알레프< >로 시작하고, 4,5,6절은 둘째 글자인 베트< >로 시작한다). 그리고 5장은 비록 알파벳 노래는 아니지만 앞의 노래들처럼 22개의 절로 이루어짐으로써 알파벳의 자수와 절수를 일치시키는 형식에 부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알파벳 시 형식은 암기를 수월하게 하고, ‘A에서 Z까지’라든가 ‘처음부터 끝까지’라고 말하는 바와 같이, 주제가 충분히 다루어졌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반면에 외형적 양식에 맞추어야 하는 필요 때문에 내용의 전개에 있어서는 일정한 제약을 받는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주제와 관련해서는, 첫째와 둘째, 그리고 넷째 애가에 ‘정치적 조가(弔歌)’라는 유형의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이 노래들은 개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가의 형식으로 시온(그리고 이를 통하여 예루살렘 및 이스라엘 민족 전체)을 한 여인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형식 속에 성전과 수도의 파괴, 그리고 국가의 멸망이라는 정치적 내용이 전개된다. 그러나 이 ‘정치적’ 노래들은 이른바 세속적 영역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을 향한 기도로 나아간다. 다섯째 노래는 시편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공동 탄원기도 유형에 속한다. 반면에 한 개인의 노래로 여겨지는 셋째 애가에는 한 남자가 서술되는데, 그의 여러 가지 면이 고통받는 예레미야를 생각하게 한다. 자기 나라의 고난을 몸으로 고스란히 나타내는 예언자의 특징들을 이용함으로써 백성 전체를 이 예언자를 통하여 묘사한 것일 수 있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다른 네 개의 노래들에 대한 가장 오래된 해석으로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노래가 다른 네 개의 국가적 공동 애가들 사이에 자리하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4. 저작 시기
애가에 실린 노래들의 작가 불명성과 다양성은 동시에 저작 시기의 문제를 안고 있다. 명확한 저작 순서에 대하여 확정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어쨌든 모든 노래는 기원전 538년 유배가 종료되기 이전의 것들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둘째와 넷째 노래에 들어 있는) 여러 세부 사항들은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 사건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첫째 애가는 기원전 597년의 첫 강제 이주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2열왕 24,10-17 참조).
정치적 및 종교적 대환난이 가져온 물리적/도덕적 불행 속에 겪어야 하는 슬픔, 하느님으로 하여금 당신의 백성을 멸망시키도록 강요한 지금까지의 죄스런 행실에 대한 회개,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께 대한 믿음의 체험 등은 성서의 이 책에 비극적 미를 부여하고, 이러한 특수한 상황에 연계되어 있으면서도, 모든 시대를 통하여 현실적인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이다.
5. 내용
애가는 예루살렘의 몰락을 애도한다(1,1.4; 2,8; 5,16). 이 성읍은 눈물 속에(1,2.16; 2,11.18; 3,48-51), 탄식속에(1,4.8.11.21.22), 고통 속에(1,5.12; 3,32), 폐허 속에(1,4.13.16; 4,5; 5,18), 수치(1,8)와 기아 속(1,11.19; 2,12.19; 4,4.5.8-9; 5,6.10)에 잠겨 있다.
예루살렘은 자기에게 귀중한 존재들을 상실하였다. 아이들(1,5.20; 2,4.11.19.20.22; 4,4.10), 처녀들(1,4.18;2,10.21; 5,11), 청년들(1,15.18; 2,21; 5,13; 5,14), 원로들(1,19; 2,10; 4,16; 5,12.14), 사제들(1,4.19; 2,6.20; 4,16), 예언자들(2,9.20), 그리고 임금들(1,6; 2,2.6.9; 4,20; 5,12)을 잃어버렸다.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의 신성한 것들, 곧 성전(1,4.10; 2,1.4.6.7.20)과 축제 때 경신례를 거행하는 공동체(1,4.10; 2,6.7.22) 역시 속화되고 더럽혀졌다.
고통 속에서,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고통 덕분에,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은 주님께 대한 반항, 항거, 거역, 불순종과 패륜(1,5.8.14.18.20.22; 2,14; 3,39.42; 4,6.13.22; 5,7.16) 곧 자신의 죄악을 인식하고 이를 고백한다(3,42; 5,7.16).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당신의 손으로 무겁게 내리누르신다. 이는 물론 (도합 20번 이상이나 언급되는) 적들의 손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느님의 손(1,14)일 따름인 것이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악을 철저히 배격하신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신다. 이것이 그분의 진노(1,12; 2,1.3.6.21.22; 3,43.66; 4,11), 분노(2,4; 4,11), 격노(2,2; 3,1), 불(1,13; 2,3-4; 4,11)로 서술된다.
그분께서는 죄인들에게 일종의 적의 모습을 취하신다(2,4-5; 3,1-18.43-45). 고통을 내리시고(1,5.12) 먹구름으로 뒤덮으시며(2,1), 사정없이 쳐부수시고 도살하신다(2,1-8). 그래서 그분께서는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신 것으로 여겨진다(1,16). 그러나 동시에 가까이 계시면서(3,57) 들으시고(3,56.61) 직접 보시며(1,9.11.20; 2,20; 3,50.59-60.63; 5,1) 기억하신다(5,1).
인간은 그분께 의지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의롭고(1,18; 3,34-36) 전능하시며(3,37-38; 5,19), 약속하신 당신의 자애에 충실하시고(3,32) 구원을 베푸시며(3,26.58), 위로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고(1,16) 좋으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3,25), 당신의 다함 없는 모성적 자비를 아침마다 새롭게 베푸시기 때문이다(3,22-23).
죄의 결과인 불행은 그 나름대로 지고의 은혜이기도 하다. 그것은 겸손한 고백,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회개, 그러나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이루겠다고 장담할 수 있는 회개가 아니라(3,40), 하느님만이 인간 안에 이루실 수 있는 회개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주님, 저희를 당신께 되돌리소서, 저희가 돌아가오리다(5,21).”
[출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새번역성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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