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십자가 아래서 신앙 고백하는 백인대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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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3 | 조회수5,006 | 추천수0 | |
신약성서의 인물 : 십자가 아래서 신앙 고백하는 백인대장
우리가 신앙으로 고백하는 주님은 단순히 영광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을 통해 승리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살아 계신다. 예수님 당시 죄인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가장 지독한 고문의 방법이며, 인간성을 파괴하는 가장 혹독한 방식이었다. 십자가에 못박은 처형 방법은 처음에 페르시아에서 유래하였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땅을 경건한 지역, 즉 신의 축복을 받은 곳이기에 죄인을 경건한 땅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런 이유로 죄인을 십자가에 매달았고, 죄인이 죽어 몸이 완전히 부패하거나 새들의 밥이 될 때까지 그래도 두었다. 이처럼 가장 잔혹한 처형 방식이었던 십자가 형벌은 신성한 땅을 보호하기 위해 비롯된 것이다.
로마에서 이 형벌은 살인범, 약탈범, 탈영범, 반란자 그리고 배반자에게 적용되었다. 로마에서는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에게 죽음의 고통을 더 심하게 주지 위해, 몸을 기둥에 기댈 수 있도록 만들어졌던 작은 발판을 아예 부수어 버렸다. 또한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가 빨리 죽지 않을 경우, 죄수의 뼈를 부러뜨려 죽게 하였다. 사형집행이 끝나면 사형 집행인은 사형이 문제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그 집행을 명령한 자에게 보고해야 했다. 빌라도에게 사형 언도를 받은 예수님의 죄목은 체제 반란 괴수죄로서 오늘날로 보면 체제 전복을 꾀하는 위험한 인물로서 사회에서 완전히 경리시키는 국가 보안법에 의한 사형 선고인 것이다.
예수의 사형을 집행하는 데 있어 백인대장은 모든 집행 과정을 감독 관리할 책임이 있었다. 그는 반복되는 사형 집행 현장에서 늘 반복되는 과정을 보아야 하였기에 사형수들의 태도에서 그들의 행동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백인대장은 죽음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와 담담한 표정으로 죽음을 맞이하였던 이를 보았다. 형리들은 사형 선고를 받은 이들에게 먼저 심한 채찍을 가한다. 그런 다음 다른 사람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십자가를 지게 하여 예루살렘의 좁은 골목길을 통해 형장까지 질질 끌고 간다. 사형수는 거의 초죽음이 되어 형장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길 도중에 지쳐서 넘어졌을 때, 백인대장은 형장에 다다르기 전에 벌써 죽었는가 하는 의구심에 키레네 사람 시몬에게 골고타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도록 강요하였다.
백인대장은 그의 직책과 업무상 아마도 매우 특이한 기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는 사형을 집행하도록 명령을 내려야만 하였고, 잔혹한 고문이 가해지는 그 자리를 지켜보아야 했으며, 그러면서도 그런 잔인한 일들을 모두 질서정연하게 집행해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형언도에 대해 그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같은 민족인 유다의 대사제들과 유다인들이 예수에 대해 그토록 유죄 판결을 받도록 유도하였고, 재판관인 빌라도는 아무런 죄목을 찾지 못하고 고민을 하였는지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마태 27,24)라는 말을 남기고 사형 언도를 내려야 했는지 백인대장에게는 의구심만 컸을 것이다.
백인대장은 십자가에 처형되는 죄수가 자신의 인간성을 박탈당하고, 상상을 초월한 고통에 신음하며 죽어갈 경우 거의 대부분 자신의 품위와 마지막 자존심마저 팽개쳐 버린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신을 저주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의 외침인 "남을 살리면서 자기는 살리지 못하는구나! 어디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나 보자. 그렇게만 한다면 우린들 안 믿을 수 있겠는가"(마르 15,31-32) 것을 그저 침묵 속에서 바라보고 있었고, 같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던 죄인의 구원을 베풀었던 그 다정함을 백인대장은 보았던 것이다.
또한 백인대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라는 말씀을 듣고 무척 당황하였다. 예수께서는 가장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죽음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자비로운 손길이 자신을 떠나지 않았음을 확신하고, 자신을 죽음으로 몰았던 이들을 용서하였다. 예수님은 죽음 직전 최후의 진술인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가 23,46)라는 말씀을 남기면서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었다.
백인대장의 생각으로는 예수님의 이런 말씀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으면서 하실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이 말씀들을 분명하게 들었고, 이 말씀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마치 뒤통수를 크게 맞은 것과 같은 느낌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이제 하느님을 받아들인다. 그는 지금까지 권력의 하수인으로서 백성들을 피 흘리게 하는 일을 하였다. 그는 죄수를 다루면서 온갖 폭언과 잔인한 행동과 증오만을 일삼았다. 그런데 사형 집행장에서 백인대장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복음, 즉 기쁜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것도 그가 늘 하던 피 흘리는 일 중에서, 즉 나자렛 사람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고통을 안겨주던 그 와중에서 복음을 듣게 된다. 그 복음은 예수께서 마지막까지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와 인간의 모든 잘못에 대한 용서였다. 이방인이었던 그는 예수의 잔혹한 십자가 죽음을 보면서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마르 15,39)라는 신앙 고백을 하였던 것이다.
백인대장의 신앙고백은 단지 십자가에서 영웅적으로 죽어간 사람에게 감탄하여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고백이 결코 아니다. 그의 신앙고백은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백인대장 자신 안에서 생명으로 살아있다는 완전한 바꿈을 갖도록 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죽은 것이 아니라 아직도 계속 살아 계시다는 고백인 것이다. 나자렛 사람 예수는 주님으로 당신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힘으로 살아 계시다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 분은 당신을 증거하는 사람이, 일상적인 삶 뿐 아니라 고통을 겪는 그 순간에도, 아니 죽음에 처한 그 순간에까지도 당신을 따른다면 당신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고 보증하신다.
백인대장의 신앙고백은 무력하고 죽음을 당하신 처절한 모습의 주님을 올바로 이해하는 인간의 비참한 바닥에서 올라오는 굳건함을 갖는다. 그는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믿음에 대한 이해인 좋은 것과 궂은 것 모두가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철저한 신뢰를 갖도록 십자가 아래서의 고백인 것이다. 백인대장은 십자가 아래서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바뀌었다. 험난한 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모습을 가진 그는 자신의 욕망을 버리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 과거에 평탄한 길을 가면서 자신을 채웠던 욕망에서의 즐거움을 버릴 수 있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험난한 길에 있을 때 자신의 욕망을 버리는 일에서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있음을, 자신의 욕망만을 채웠을 때 마음이 옹졸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백인대장이 고통의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통해 자신의 욕망에서 벗어나 모든 것에서 즐거움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다시 한번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였으면 한다. 지금 이 순간 고통과 방황이라는 말이 평탄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험난한 길을 갈 수 있도록 용기와 희망이라고….
[인천가톨릭대학교 김일회 신부님께서 신학교 홈페이지 성서신학 자료실에 올려주신 자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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