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물] 베드로를 궁지에 몰아넣은 여종(마태 27,69-75 참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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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1-03 | 조회수3,917 | 추천수0 | |
[성서의 인물] 베드로를 궁지에 몰아넣은 여종(마태 27,69-75 참조)
예수는 대사제와 원로들이 보낸 무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들은 칼과 몽둥이를 들고 험악하게 예수를 붙잡았다. 예수가 체포되는 과정에 제자들은 모두 도망쳐버렸다. 그런데 베드로는 멀찍이서 예수를 뒤따라갔다. 대사제 관저의 마당에는 종들이 불을 쬐며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베드로는 살그머니 관저에 들어가 사람들 사이에 섞였다. 한밤중이라 주위는 어둠으로 깜깜했다. 예수께서는 안채에서 원로회의 심문을 받고 있었다.
"아니 이 밤중에 왜 이렇게 난리야?"
"예수라는 사람이 관저에 끌려왔다는데 보지는 못했어. 그 사람이 지금 안에서 심문을 받고 있다고 그러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은 왜 체포됐는지 아나?"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아나. 그러나 예수를 대사제 나리께서 몹시 싫어하는 것만은 분명해."
마당에 있는 종들은 예수가 결박 당해 대사제 관저로 끌려 온 이유를 자세히 알지 못했다.
"좌우지간 예수라는 작자 때문에 오늘 밤은 잠은 다 잤네 그려."
대사제 관저의 종들은 단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할 뿐 다른 생각은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은 다만 밤잠을 설치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귀찮을 따름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심문이나 그 결과에 대해서는 도대체 관심이 없어 보였다. 바로 이런 사람들 사이로 베드로가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그는 옷에 얼굴을 깊숙이 묻고 가슴을 졸이며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붙잡혀간 스승을 볼 수도 없고 일의 진전을 몰라 답답했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없어 마당에 그냥 걱정스럽게 서성일 뿐이었다. 바로 그때 대사제의 여종이 베드로에게 다가왔다.
"아저씨, 당신도 저 나자렛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 맞죠?"
갑작스런 여종의 물음에 베드로는 깜짝 놀랐다. 주위의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베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당신 무슨 소리요? 도대체 무슨 얘길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네" 하며 베드로는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그리고 베드로는 슬그머니 문 쪽으로 몸을 피했다. 그런데 여종은 다시 베드로에게 다가와서 얼굴을 한참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더 큰소리로 소리를 쳤다. "아무리 보아도 맞네. 체포된 사람과 한 패거리가 맞아. 당신 분명히 예수와 함께 다닌 적이 있죠?"
여종이 이렇게 외치자 베드로도 더 큰소리로 부인했다. "아니 이 아줌마가 아니라는데 웬 말이 많아? 당신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냐? 똑바로 보고 이야기하라고… 원 재수가 없으려니까." 그리고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권력의 주변에서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들은 개처럼 냄새를 잘 맡는 능력이 있다. 자신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주인으로부터 보상도 받고 칭찬도 받으려고 무진장 애를 쓴다. 권력에 몸 붙여 사는 사람들은 정의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이기적인 이득만을 위해 행동할 뿐이다. 그들은 권력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도 않는다. 또한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상황이 바뀌면 주저 없이 자신의 태도를 바꾸는 기회주의자들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강한 자의 편에 서 있는 것이다.
대사제 관저의 여종도 바로 권력의 하수인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권력의 맛을 즐긴다. 때로는 무자비하게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자신의 권력의 영역도 끊임없이 확장하려고 노력한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무자비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대사제 관저의 여종은 예수의 일행을 체포하는 것이 주인에게 충성을 보이는 절호의 순간이라는 것을 잘 알고있다. 그녀에게는 동정심도, 측은한 마음도 없이 오직 관심은 오직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궁지에 빠진 사람을 더 짓밟아 버리려고 달려들기도 한다.
우리 자신도 정의와는 상관없이 권력의 편에서 부화뇌동 한다면, 또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이의 고통을 못 본체 한다면 여종의 어리석은 삶을 재현하는 셈이다. 대사제 관저의 여종 같은 이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람의 유형이다. 또한 다름 아닌 우리의 숨겨진 모습이기도 하다.
[평화신문, 2002년 6월 16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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