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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하느님을 찬양한 백인대장(루카 23,44-4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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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3 조회수4,916 추천수0

[성서의 인물] 하느님을 찬양한 백인대장(루가 23,44-49 참조)

 

 

예수는 십자가형 집행 장소인 해골산이란 뜻의 골고타 언덕에 도착했다. 병사들을 지휘하던 백인 대장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어서 죄수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형을 집행하라."

 

백인대장(centurion)은 백 명의 병사들을 지휘하는 로마의 고급 장교이다. 총독 빌라도의 판결 명령을 받아 형을 실제로 집행하는 책임자는 백인 대장이었다. 백인 대장은 부하들에게 십자가형을 집행하도록 명령하고 모든 과정을 모두 상세히 기록해야 했다.

 

로마의 십자가형은 당시에 가장 극악한 범죄에 대한 로마 최고의 형벌이었다. 그런데 이 십자가형은 주로 하류계층에게만 적용되었고 상류계층은 주로 참수형에 처해졌다. 따라서 십자가형은 노예들에 대한 전형적인 처벌이었고, 정치적인 분쟁을 진압하기 위한 시범적인 처형의 방법이었다.

 

십자가형을 받는 죄수에게는 십자가형 이전에 심한 고문이 가해졌다. 일반적으로 채찍질, 눈을 빼서 불에 태우는 것, 불구로 만드는 것 등이 행해졌다. 십자가형의 고통은 몸의 체중이 두 손바닥에 박힌 못에 매달려지기 때문에 살이 찢겨 많은 피를 쏟고 통증이 말할 수 없이 심하다. 또한 가슴으로부터 팔에 이르는 근육들이 극도로 팽창하여 호흡장애를 일으킨다. 십자가에 달린 죄수는 숨을 내쉴 수가 없어 근육에 산소 공급이 되지 않고 심한 경련을 일으킨다. 이런 증세를 조금이라도 참으려고 죄수가 몸을 위로 치켜올리려 할 때마다 체중은 발등에 꽂힌 못에 의지하므로 그 고통은 가중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십자가형은 인간이 만들어낸 최악의 처형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는 처형 방식은 로마에서도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도 로마인은 이 형벌을 속국의 백성을 길들이기 위한 도구로 종종 활용했다. 그래서 예수 시대의 유다인들은 이 형벌제도를 점령자 로마인들이 자신들을 위협하는 사형제도로 알고 있었다.

 

백인대장에게는 이처럼 참혹한 십자가형을 집행하는 것도 자신의 일상적 업무일 뿐이었다. 사람은 보통 처음에는 충격적인 것도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반복될수록 적응하기 마련이다. 백인대장은 아주 가까이서 예수의 십자가형을 집행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백인대장은 예수를 지켜보면서 참으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우선 빌라도가 십자가에 처형을 판결한 다음 공공연하게 물을 가져다가 군중 앞에서 손을 씻었다. 그 행동은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백인대장은 최고 책임자의 이상한 행동이 자꾸 떠올랐다. 더 이상한 것은 처형을 당하는 예수의 태도였다. 예수는 채찍과 조롱과 모욕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저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있었다.

 

백인대장은 예수라는 인물에 자꾸 흥미를 가지게 했다. 사람이 큰 고통에 직면해 있을 경우 불안스럽고, 솟구쳐 오르는 많은 의심과 회의를 억누를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그 고통이 해소될 여지를 발견하지 못하면 아주 빨리 절망감에 휩싸이게 된다. 절망감과 환멸은 인간적으로 보자면 아주 평범한 현상이다. 백인대장은 바로 이런 식의 경우를 지금까지 십자가 밑에서 늘 체험하곤 했었다.

 

그러나 예수는 전혀 달랐다. 물론 처형을 무척 고통스러워 했지만 처형을 당하는 태도는 다른 죄수와 전혀 달랐다. 십자가 위에 달려 있는 예수에게는 어떤 증오나 미움을 볼 수 없었다. 마치 죽음의 예식을 장엄하게 치르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몹시 고통스러워 하던 예수가 숨을 급하게 몰아 쉬었다. 그리고 예수는 마지막으로 얼굴을 들어 울부짖었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예수의 이 마지막 기도는 백인대장에게는 이제껏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그 순간에 하신 말씀이었다.

 

백인대장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고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 사람이야말로  죄 없는 사람이었구나."

 

백인대장은 예수의 기도 소리를 듣고 하느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다. 백인대장은 인간이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고 고귀한 품위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인간적인 능력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는 여태까지 수없이 많은 죄수들의 마지막을 지켜보았지만 예수만큼 큰 충격을 안겨 준 사람은 없었다. 그는 인간의 삶에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백인대장은 자신의 인생에 예수라는 인물이 깊이 들어와 있음을 깨달았다.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죽음 앞에서 나타난다. 우리도 죽음의 마지막 말이 하느님께 대한 찬미의 기도라면 얼마나 좋을까.

 

[평화신문, 2002년 7월 14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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