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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화] 성서의 세계: 매매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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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1-07 조회수4,886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매매춘(賣買春)

 

 

성서의 매매춘

 

마태오 복음서 1장의 예수님 족보에는 이례적으로 네 명의 여자가 언급된다. 다말과 라합과 룻과 우리야의 아내이다(창세 38장; 여호 2장; 룻기 특히 3장; 2사무 11장). 이들은 두 가지 면에서 놀랍다. 첫째, 이들은 외국인이다(그리스도교 이전의 유다 전통에 따르면 다말도 타국인이다). 둘째, 이들은 한때 또는 오래 저마다의 사정으로 합당치 않은 성관계를 맺는다. 그 가운데에서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여 원하던 자식을 얻는다. 또 라합은 직업 창녀였다.

 

이렇듯이 성서의 사람들이 살던 땅에서도 매우 일찍부터 창녀가 있었다. 매매춘의 형태나 그것에 대한 판단은 문화권에 따라, 또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대부분 적나라하게 전하는 구약성서에서도 자연히 창녀나 매매춘이 여러 번 언급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자료들이 매우 제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천년 이상에 걸친 매매춘의 현상을 시대에 따라 정확히 밝혀낼 수는 없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단편적인 언급들을 모아 대충 그려낼 수 있을 따름이다.

 

 

일반 매매춘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선조 가운데 하나인 유다의 며느리 다말의 행동에서 창녀의 몇 가지 모습을 엿볼 수 있다(창세 38장). 젊은 나이에 자식 없이 과부가 된 다말은 유다의 권고에 따라 친정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유다는 막내아들이 성장하면 수숙혼(嫂叔婚)을 시켜 다말에게 죽은 남편의 후사를 일으켜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대 근동인들의 특이한 이 혼인에 관해서는 이 잡지 1998년 3월호의 ’수숙혼’ 참조). 사별한 남편에게 아내로서 본분을 다하겠다고 작정한 다말은, 너울로 몸을 가리고 큰길 옆, 잘 보이는 곳에 나앉는다. 유다는 이 여자가 으레 창녀려니 생각하고 거리낌없이 다가가 몸을 산다.

 

창녀가 얼마나 많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라합의 경우나 솔로몬의 유명한 재판 이야기(1열왕 3,16-28)에서 볼 수 있듯이, 예리고나 예루살렘 같은 도시만이 아니라, 이렇게 시골 길가에도 있었다.

 

다말은 비상 수단이기는 하였지만, 별다른 심적 또는 외적 어려움 없이 창녀 차림을 하고 나선다. 여호수아서 2장의 라합은 가족들과 한집에 또는 곁에 살며 창녀 노릇을 한다. 이 두 이야기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성서는 일차적으로 매매춘에 관하여 도덕적 종교적 판단을 내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서술한다. 창녀들도 나름대로 사회 또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에 나오듯이, 그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직접 임금에게 재판을 받을 수 있었다. 곧 그들도 기본권을 보장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창녀들이 멸시를 받았음은 분명하다. 야곱의 딸 디나가 다른 부족 청년에게 겁탈당하자, 오빠들이 몰려가서 그 부족을 전멸시켜 버린다. 야곱이 자기의 집안도 이제 몰살될 수밖에 없다고 한탄하자, 아들들은 "우리 누이가 창녀처럼 다루어져도 좋다는 말씀입니까?" 하고 항변한다(창세 34,31). 예수님 시대에는 창녀들이, 로마 식민 통치자들의 하수인이 될 수밖에 없었고 곧잘 부정을 저질러 동족들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하던 세리들과 함께 ’공적 죄인’, 하층 계급 취급을 받게 된다(마태 21,32).

 

다말은 너울을 써서 몸을 가림으로써 창녀임을 표시한다. 그러나 고대 근동에서 너울을 씀은 일반적으로 아버지나 남편에게 소속됨을 뜻한다. 또 하무라비 법전에 따르면 일반 창녀는 너울을 써서는 안된다. 그래서 다말의 차림새에는 분명하지 않은 면들이 있다. 그리고 예레 3,3에는 ’창녀의 이마’라는 표현이 나온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마에 무슨 표시를 한다든지 머리카락을 색다르게 땋는다든지 머리를 특이하게 치장하여 신분을 표시하였던 것 같다.

 

이스라엘 땅의 창녀들은 라합 이야기(여호 2장)에서 엿볼 수 있듯이, 예전의 우리 나라 일부 주막집의 주모나 작부처럼, 나그네에게 숙식과 함께 몸을 제공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집회 9,3에는 창녀를 가리키는 말로 ’노래하는 여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우리 나라 기생과 비슷하였던 것이다.

 

다말이 창녀 노릇을 하여 임신한 사실이 드러나자, 집안 식구들에 대한 사법권을 가지고 있던 가부장 유다는 화형(火刑)을 언도한다. 이는 창녀짓이 아니라 간음을 저지른 벌인데, 후대에는 돌을 던져 죽이는 것으로 대체된다(신명 22,22-24). 아무튼 매춘에 대한 규정과 벌이 점점 강화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딸을 창녀로 내놓아서는 안된다(레위 19,29). 시집간 여자가 숫처녀가 아니었음이 드러나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신명 22,20-21). 사제는 창녀와 혼인할 수 없고(레위 21,7) 사제의 딸이 창녀짓을 하면 화형을 받는다(레위 21,9). 지혜문학에서는 간음을 훨씬 더 많이 경계시키지만, "창녀는 깊은 구렁이고/낯선 여자는 좁은 우물이다."라는 말처럼(잠언 23,27) 매춘부를 조심하라는 교훈도 더러 나온다(잠언 29,3; 집회 9,3.4.6). 이러한 규정과 권고가 십분 실행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적어도 동족의 여자와 관련된 매매춘을 제한하거나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전(神殿) 매매춘

 

앞에서 본 창세기 38장에서 다말은 ’신전 창녀’라고도 불린다. 어떤 학자들은 인도에서 유래한다고 보기도 하는데, 이집트와 팔레스티나를 비롯한 고대 근동의 많은 민족의 신전에는 창녀, 그리고 남창(男娼)이 있었다. 이들은 사제들과 함께 신전의 이를테면 정식 직원이었다. 다말이 신전 창녀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점잖게 부르느라고 이 이름을 쓴 것으로 보인다. 사실은 일반 창녀와 신전 창녀의 구분이 때로는 모호하기도 하였던 것 같다. 신전에서 행해지던 매매춘에서 일반 매매춘이 나왔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고대인들에게도 아기의 탄생, 그리고 생명을 탄생시키는 성행위는 성스럽고 신비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거기에다 고대 근동의 많은 민족은 사람과 집짐승과 자연의 풍요와 다산이 남신들과 여신들의 성적 관계에 달려있으며, 이러한 신들의 ’창조적’ 성관계를 인위적으로 촉진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곧 신들, 지방마다 다르지만 가나안 땅에서는 특히 바알이라는 남신과 아세라라는 여신에게 봉헌된 여자들과 남자들이 신전에 참배하러 온 사람들과 성행위를 함으로써, 신들도 서로 똑같은 행위를 하여 사람과 짐승과 자연에 풍요와 다산을 가져다 주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전 매매춘은 본디 일반 매춘과는 의미와 의도가 다르다. 다른 한편으로는 돈이나 물품을 받아서 신전 운영 비용으로 쓰기도 하였던 것 같다.

 

하무라비 법전에 따르면 때로는 부모가 자식들을 이러한 목적으로 신들에게 봉헌하기도 하였다. 그리스의 유명한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바빌론의 모든 처녀가 시집가기 전에 얼마 동안 신전 창녀로 봉직해야 했다고 전하는데, 이는 상당히 왜곡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신전 매매춘은 본디 제어할 수 없고 때로는 적대적이기까지 한 자연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이 생존을 보장하고 촉진시키려는 엄숙한 의도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신전에는 제사에 쓰이는 술이 늘 있고, 또 이러한 풍요다산 의식에 인간의 음욕이 가미됨으로써, 신전에서는 흔히 일반 매춘보다도 더 난잡하고 방탕한 장면들이 펼쳐졌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스라엘인들이 광야에서 살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원주민들의 문화와 종교를 보고 여러 면에서 놀란다. 그 가운데에서 이 풍요다산 의식이 가장 큰 놀람을 자아낸다. 그 놀람은 이율배반적 자세로 펼쳐진다. 광야에서 엄격하고 절제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인들은 가나안인들의 이러한 퇴폐적 종교 의식에 강력한 혐오감을 느낀다. 야훼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그들에게는 종교적으로도 그러한 의식과 사상이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다. 반면에,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인간적으로 이 ’성(性) 축제’의 유혹을 받는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도 주님을 버리지 않으면서 이 물질적이고 성적인 의식을 수용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가나안 종교의 형태는 야훼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역겨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율법은 이를 금지한다(신명 23,18-19).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은 곧잘 인간적 종교적 나약성으로 그 ’역겨움’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리하여 이와 관련된 이스라엘 종교의 역사는 혐오와 유혹, 배척과 수용의 역사가 된다. 이러한 이중성의 결과를 예컨대 유다 왕국 요시야 임금의 종교 개혁을 전하는 열왕기 하권 23,4-14에서 잘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신앙의 온전성과 순수성을 훼손시키는 이러한 우상 숭배적 의식을 예언자들도 강력하게 단죄하고 나선다(예레 2,20; 에제 23,37-45; 호세 2,15 등).

 

매매춘이 이렇게 종교적 배경과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용어들이 곧잘 비유적으로 쓰이기도 한다. 곧 한 분뿐이신 야훼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행위, 배우자를 배신하고 간음하는 것과 같은 하느님께 대한 불충, 곧 우상 숭배와 우상 숭배적인 행위가 또한 매매춘이라는 것이다(민수 25,1-2; 판관 2,17; 예레 3,6; 호세 4,12 등).

 

지금도 일반 매매춘, 그리고 옛날과 형태는 다르지만 ’종교적 매매춘’이 계속된다. 제거하려는 움직임과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끊임없이 교차된다. 그리하여 매매춘은 늘 인간에게, 인간 공동체에 여러 면으로 도전이 된다.

 

[경향잡지, 2000년 3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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