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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유대인 이야기18: 맞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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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6-06 조회수3,525 추천수1

[유대인 이야기] (18) 맞수


가나안 정복 전쟁서 만난 다윗과 골리앗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가나안 남쪽 해안에 정착하면서 유대인들은 중대한 위기에 봉착하게 됐고, 이 위기감은 왕정 도입으로 이어진다. 사진은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갈등을 벌이는 가자지구의 모습. 가자는 고대 릴리스티아 사람들이 건설한 도시 중 하나다.

 

 

지금까지의 상대와는 그 격이 다르다. 유대인들이 모처럼 맞수다운 맞수를 만났다. 단순한 선의의 경쟁자로서의 맞수가 아니다. 맞수라기보다는 악연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어울릴 지도 모른다. 악연도 이런 악연은 없다.

 

‘필리스티아’로 불리는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것이다. 오늘날 팔레스티나는 바로 이 필리스티아에서 유래한다. 고대 유대인들은 필리스티아 사람들과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치렀고, 30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지역에 여전히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사악 시기부터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살고 있던 필리스티아 사람들(창세 26,1 참조)을 옛 성경에선 ‘블레셋 사람들’이라고 번역했다. 훗날 다윗과 싸우는 블레셋 거인 장수 골리앗이 바로 필리스티아 사람이다.

 

한 민족의 역사는 때때로 예기치 않은 맞수 민족을 만날 때 새로운 물줄기를 탄다. 뒤에서 이야기 하겠지만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등장은 유대 역사를 크게 바꾸는 촉매제가 된다.

 

여기서 필리스티아 사람들에 대해 알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래야 유대인들의 역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고향은 크레타 섬이다. 크레타 섬은 오늘날 그리스 최남단에 위치한 섬으로, 기원전 3000~2600년 경 유럽에서 가장 먼저 문명을 꽃피운 곳이다. 역사가들은 이 문명을 미노아 문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기원전 1500년경 크레타 섬에 큰 지진이 발생했고, 찬란했던 문명도 함께 스러졌다.

 

이때 미케네인 이라고 불리는 그리스 본토 거주민들이 크레타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고, 새롭게 미케네 문명을 열게 된다. 유명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영웅들이 바로 이 미케네 사람들이다. 이들은 훗날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 갈대바다를 건너는 그 즈음에 소아시아의 맹주 트로이를 침략해 승리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미케네 민족 중 일부 분파(고대시대에는 이들을 바다 민족이라고 불렀다)는 이후 크레타 섬을 떠나 이집트를 침략했다. 하지만 이집트의 영웅, 람세스 2세에 의해 실패하고, 다시 여러 갈래로 나눠 동부 지중해 연안 해안 곳곳에 정착한다. 이때 가나안 남쪽 해안 평야 지대에 정착한 이들이 바로 필리스티아 사람들이다. 오늘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갈등을 벌이는 가자지구도 고대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도시를 건설한 곳 중 하나다.

 

그런데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발을 들여놓고 정착하는 시기가 묘하다. 유대 민족 입장에서는 아직 가나안 정복을 미처 다 끝내지도 못했는데 엄청난 맞수를 만난 것이다. 좁은 지역에서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두 민족이 만났으니 충돌이 일어날 것은 당연했다.

 

문제는 필리스티아와 유대민족의 군사력의 차이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유럽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던 크레타 섬에서 온 민족답게 당시로서는 최신식 무기인 철제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당시 청동제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다윗이 필리스티아 장수 골리앗을 대적할 때 돌팔매를 사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철제 무기를 사용하는 골리앗에게 청동제 무기로 어설프게 덤벼드는 것 보다는 돌팔매가 더 유용했을 것이다. 물론 유대 민족에게도 희망은 있었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해양 민족이었던 만큼 해상 전투는 뛰어났지만, 육상 전투에는 상대적으로 익숙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쨌든 유대인 입장에서는 호락호락하게 가나안 땅의 지배권을 필리스티아 사람들에게 내어줄 수 없는 처지였다. 가나안이 어떻게 정복한 땅인가. 200여년 가까이 전쟁을 통해, 수많은 피와 희생을 통해 간신히 손에 넣은 땅이다.

 

유대인으로서는 아직도 가나안에 산재해 있던 다양한 민족들로부터 확실한 복종을 받아 놓지 못한 상황이었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을 격퇴시키지 못한다면 가나안 지역에서 어렵게 확보한 우위성이 흔들릴 수 있었다. 만약 유대인들이 조금이라도 밀리는 눈치를 보인다면 지금까지 고개 숙이고 복종하던 민족들이 모두 등을 돌릴 수도 있었다.

 

필리스티아는 유대인들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문제는 필리스티아가 지금까지 가나안 정복전쟁을 통해 만났던 상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산이었다는 점이다. 엄청난 힘을 자랑하던 판관 삼손도 그 벽을 넘지 못했다.

 

삼손이 필리스티아 사람들에게 포로로 잡혀 죽자, 삼손을 따르던 ‘단 지파’는 해체됐다(판관 18,1-31 참조). 삼손 시대 당시 이미, 유다 지파는 필리스티아에 종속되어 있었다(판관 15,11 참조).

 

더 이상 밀려서는 곤란했다. 민족 전체가 필리스티아 사람들 발아래 놓일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제 유대인들은 새로운 정치체제를 생각해낸다. 보다 강력한 지도 체제가 필요했다.

 

지금까지 유대 민족 12지파는 외부에서 적이 침략해 들어 왔을 때만 일시적으로 판관이라는 지도자 밑에서 동맹을 맺고 싸웠다. 물론 전쟁이 끝나면 동맹은 다시 흐지부지됐다. 사실 이 동맹 체제도 그리 굳건한 것이 아니었다. 지파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 일도 있었다(판관 19,1-21,25 참조). 이렇게 느슨한 동맹 체제로는 강한 왕의 지휘 아래 일사분란하게 전쟁을 치르는 필리스티아를 대적하기 어려웠다.

 

이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항구적으로 통치하고 전쟁을 지휘해줄 왕을 요구하게 된다. 필리스티아의 등장으로 인해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춘 왕정을 도입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불필요하지만, 만약 맞수 필리스티아 사람들의 가나안 이주가 없었다면 유대 민족의 왕정은 나타나지 않았거나, 혹은 그 시기가 늦춰졌을 것이다.

 

최초의 왕은 벤야민 지파 출신, 사울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가톨릭신문, 2009년 6월 7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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