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여호수아서: 용기를 갖고 힘을 내어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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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03 | 조회수3,595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구약] 여호수아서 : 용기를 갖고 힘을 내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힘을 내고 용기를 가져라. 너를 통해 내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려가리라. 두려워하지 말라.” 바로 여호수아 1장 6절과 신명기 31장 7절이 결합된 이 아름다운 응송은 - 옛 사순 제4주일 전야에 불렀다 - 여호수아서의 요지를 알려준다. “용기를 갖고 힘을 내어라!” 40년 동안의 사막 체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깊은 변화를 가져왔지만, 무력하고 용기를 잃은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다. 이제 백성들은 정복과 승리에서 용기와 확신을 얻고 여호수아의 인도를 따른다.
여호수아서는 모세오경과 연결되어 있다. 모세가 후계자에게 남긴 두 가지 중요한 임무 즉 약속된 땅의 정복과 아직 땅을 분배받지 못한 10개 지파(민수 32,33 참조)에게 그들의 몫을 주는 일이 여호수아서에서 성취되고 있기 때문이다. 1-12장은 가나안 왕들에 대한 여호수아의 전투와 승리를 이야기하고, 13-22장은 여호수아가 늙어서 요르단 서쪽에 정착하여 10개 지파에게 땅을 나누어주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23-24장은 여호수아의 마지막 훈계와 죽음, 장례식을 다루고 있다.
여호수아서는 하느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시겠다던 약속을 성취하셨다는 하나의 결론일 뿐 아니라, 또 하나의 시작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정치적 발전을 기술하고 있는 구약성서의 첫 번째 책이기 때문이다.
선택된 백성들의 역사는 본래 예언적이다. 이방인들의 역사와는 다르다. 바로 사람들 가운데 하느님의 왕국을 설립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은 자신들의 행복과 영광만을 위해 노력할 뿐이다. 이방인들의 역사는 그들 눈으로 보기에 기회와 행운과 운명으로 점철된다. 그래서 소경이 소경을 이끄는 것처럼 그들을 인도해 주는 점장이와 예언자들을 믿는다. 반대로 하느님의 지혜는 하느님의 뜻을 가장 잘 전달해 줄 예언자들을 선택한다. “야훼께서는 나와 같은 예언자를 동족 가운데서 일으키시어 세워줄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신명 18,5). 우리는 모세의 이 예언이 바로 “그 예언자”(요한 6,14; 7,40; 사도 3,22)라고 불리는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음을 본다. 유다 학자들은 유다 역사의 전시대를 살았던 예언자들이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집회 46,1)로부터 시작되며 사무엘, 다윗, 엘리야 등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이 때문에 유다교 정경은 여호수아서, 사무엘서, 열왕기들을 역사서로서가 아니라 예언서로서 분류하고 있다.
그러므로 첫 예언자인 여호수아는 마지막 예언자인 예수를 주목하게 한다. 예수란 말은 여호수아의 히브리 표현으로 실제 같은 말이며, “하느님은 해방하신다”, “하느님이 능력을 주시다”는 의미이다. 그 이름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예언이다. 즉 여호수아의 인도로 약속된 땅을 정복했다는 것은 정치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영적 해방이며, 그 참의미가 그와 같은 이름을 주님이 취하였을 때 나타난다는 것을 예시한다. 천사가 요셉에게 알린다 :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마태 1,21).
하느님께서는 세 차례나 여호수아를 일깨우신다 : “용기를 갖고 힘을 내어라”(1,6.7.9). 여호수아가 맡은 사명의 성공 여부는 신념과 신앙에 달려 있다. 꼭 그대로 사도들도 세상을 이기기 위해 여행을 떠나면서 “성령으로 가득 차서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되었다”(사도 4,31).
여호수아가 예리고에 보낸 두 정탐원은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 예수께서 세상에 보낸 두 사자 즉 율법과 복음에 주목케 한다. 창녀 라합은 정탐원들을 맞아들이고, 예리고가 멸망할 때 이방인의 교회를 상징하는 그녀의 가족들을 구하게 된다. 그녀는 안전을 보장하는 표로 창문에 진홍줄을 매단다. 이 진홍줄은 정화시켜 주는 물을 만들 때도 발견된다(레위 14장). 이 징표의 의미는 명백하다. 털실은 이스라엘과 메시아를 상징하는 양으로부터 얻어지고 진홍색은 곤충(연지벌레)의 피로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라합의 창문에 매달린 진홍줄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마태 26,28) - 이방인, 창녀, 죄인 등 - 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의 구원 능력의 보편적인 표지이다.
이제 그들은 약속된 땅을 갖게 된다는 큰일을 목전에 두고, 중대한 의식들을 치르게 된다. 길갈에서의 할례와 가나안에서의 첫 과월절 의식이다.
예리고는 맏배로서 하느님께 봉헌되었다. 가치있는 모든 것들은 전리품으로 취하지 않고 야훼의 금고에 넣어졌다. 유다 지파의 아간이 전리품을 훔쳐 금지령을 어긴 결과 그는 돌무더기가 되어버렸고, 이는 하느님의 은총의 보물을 거룩한 땅에 묻어버린 일부 유다인과 나중에 “그 거룩한 곳과 백성”(요한 11,48)을 지키기 위하여 메시아 예수를 거부한 유다인을 상징한다. 아간의 죽음과 창녀 라합의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종말에 성취한 대혁명 즉 상속자들이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고 매춘부와 세관원들이 받아들여지는 것에 주목케 한다(마태 8,12; 21,31 참조).
두번째 성읍인 아이를 정복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으로 폭력을 사용한다. 아이 성 주민들은 전멸당했다. 그리고 뒤이어 다섯 왕들과 북쪽의 왕들도 모두 칼로 죽였다. 이 전면적인 살육 전쟁은 백인들이 사실상 나머지 인류를 상대로 지난 3세기 동안 벌여온 식민전쟁과는 전혀 다르다. 백인들은 식민지 정복 동안 인간성을 말살하고 수단껏 착취해 왔다. 여호수아의 전쟁은 우상숭배와 죄악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최근의 유적 발굴은 이스라엘이 정복했던 당시의 가나안 문화는 도덕적으로 하위문화였으며 완전히 타락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사원매춘과 어린이를 제물로 바치는 행위들이 공공연히 벌어졌다. 여호수아에 의해 그들이 전멸당한 것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죄악이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논증이 된다. 죄악의 대가는 죽음이다.
여호수아의 팔레스띠나 정복은 그 궁극적인 목적이 하느님 나라 설립에 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빨리 그 땅의 견고한 곳을 발판으로 삼아 제단을 세워야 했다. 폭력과 타락으로 손상되지 않은 것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의미에서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세웠다(8,31). 한 분이신 하느님, 하나인 나라, 한 백성, 하나의 제단, 하느님 나라의 이 기본적인 원리가 요르단 동쪽에 사는 지파들이 따로 제단을 만들면서 무너지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동쪽의 지파들이 이 제단을 다른 신에게 봉헌할 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의당 야훼 앞에 나아가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는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가나안 정복 후에 여호수아는 모세로부터 아직 그들 몫을 받지 못한 지파들에게 추첨을 통해 땅을 분배시켜 준다. 추첨은 하느님의 은총을 의미한다. 두번째 땅의 분배는 율법에 의한 전통적인 분배 방법을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의 분배를 분명히 예시하고 있다.
실수로 살인한 사람을 위해 “도피성”을 선정한 것은 매우 뜻깊은 의미가 있다. 율법에 따르면(민수 35,33), 무죄한 사람의 피는 땅을 더럽힌다. 만일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면, 그 책임은 대사제에게 달려 있다. 대사제가 죽어야만 살인자는 자신의 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 대사제의 죽음은 그 부정한 땅을 속죄시켜 준다. 우리는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여주는 안내판을 발견한다.
마지막 2장(23-24장)에서, 여호수아는 하느님의 사랑이 모든 백성들의 마음에 새겨지도록 계약을 갱신한다. 백성들은 선택해야 했다. 조상들의 하느님을 섬길 것인지, 아니면 아모리인들의 신들인지. 그들이 조상들의 하느님을 섬기기로 결정했지만, 참 예언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배신을 미리 본다. 또한 동시에 예수와 그분의 가족 즉 교회의 충절을 본다. (Pathways in Scripture에서 강동성 편역)
[경향잡지, 1988년 7월호, 다마수스 빈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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