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지상 낙원은 어디에 있을까 | |||
---|---|---|---|---|
이전글 | [구약] 성서는 이렇게 읽어야 한다 | |||
다음글 | [구약] 아담에게 짝을 만들어 주신 뜻은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03 | 조회수2,670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구약] 지상 낙원은 어디에 있을까
히브리 백성의 역사 편찬
사람은 누구나 자기 생애에 일어났던 일과 기억에 깊이 새겨진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그런데 각 사람은 자신의 기질과 성격에 따라 그러한 일을 행한다. 어떤 사람은 기분 좋게 그리고 즐겁게 그 일을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엄숙하고 매력적인 어조로 그것을 할 것이고 반면에 또 어떤 사람은 요약적이고 무미 건조한 보고만을 할 것이다.
극히 인간적인 이러한 경향은 많은 민간 설화와 전승이 생겨나게 했고 역사와 역사 편찬의 기원이 된다.
과학적이고 비판적인 역사 편찬이 현대에 실현된 것이라 하지만 그것은 이미 아주 먼 고대에, 사실의 전달을 넘어서, 자료의 수집에 있어서든 그 탐구와 해석에 있어서든 확장되고 완성된 기술을 갖고 출발했다. 사람들은 같은 시대와 환경뿐만 아니라 지나간 시대와 환경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즉 어떤 방식으로든 역사적 탐구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탐구는 자연히 구두 전승과 마찬가지로 기록된 원전에 바탕을 두었는데 역사적 관심이 거기에 있었으므로 고대의 많은 역사적 기술(記述)이 우리 시대에까지 보존되었다. 그러므로 각가지 유형의 수많은 성서 속에 역사적 작품이 없었다면 아주 이상한 일일 것이다. 또한 성서의 역사서 전부가 똑같은 방식으로 역사를 담고 있었다면 더욱더 이상했을 것이다. 수많은 역사서가 12세기에 걸쳐 이루어졌으므로 선천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세기의 차이가 나면 날수록 그만큼 그 작품들이 차이가 난다. 이에 반해 오늘날 누구나 놀라게 되는 것은 한때 성경의 역사서에서 거의 현대적인 역사 편찬을 발견하려고 하였고 그 모든 자료가 현대적인 역사 개념에 따라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성서 해석은 역사서를 탐구하는 데 있지 않고 그러한 책들의 역사적 성격을 탐구하는 데 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성경의 역사서에서 종종 훌륭하고 건전한 역사 편찬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이스라엘 민족은 근동의 발달된 대민족들을 정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 교황 비오 12세는 이렇게 말했다. “근동의 모든 고대 국가들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은 고대성으로 보나 사건의 충실한 진술로 보나 역사를 기록하는 데 있어서 출중하고 비상한 위치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신적 영감의 카리스마와 성서적 역사의 특별한 종교적인 목적으로부터 진리를 추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존중했다.” 계시 헌장 11-12항에도 같은 생각이 되풀이된다.
이렇게 고양된 역사 편찬 유형은 주로 사건이 끝나고 얼마 뒤에 기록된 책들 속에서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상황에서 저자는 그 동시대인들에게 정보를 얻음으로써 사실로부터 가까스로 벗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한편 마찬가지로 분명한 것은 여러 세기 전에 일어났던, 사건과 문헌이 없던 시대의 사건을 충실하고 정확하게 보고하는 일이 저자에게 몹시 힘들었다는 사실이다. 창조, 원죄, 친족 살해, 홍수, 바벨탑에 대한 가장 오래된 사건들을 생각해 보자. 인간이 지상에 나타난 것은 6천 년 전이 아니라 기원전 수십만 년 어쩌면 수백만 년의 일이라는 사실을 과학이 발견해낸 지금 그러한 초기 사실과의 어떠한 접촉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나 이해한다. 그러한 사실들을 기록하면서 저자는 덜 정확하고 오히려 자유로운 역사 편찬 형태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건전한 역사 편찬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저자가 설정하는 목표다. 모든 성서 저자는 자기 작품에 종교적 의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단지 역사를 위해 기록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느님의 행위를 드러내기 위해 역사적 사실에 주목했으며, 그 독자들을 교화하기 위해 기록했다. 어떤 역사서에든 역사적 내용보다 교훈적인 요소가 우세하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역사서의 여러 유형을 구별할 필요성이 있다.그리고 성서에 관한 이러한 일련의 숙고에 있어서, 문학 유형을 신중히 검토한 뒤 현대 해석학이 거룩한 텍스트에서 찾아내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일 것이다.
천지 창조와 지상 낙원
성서의 첫 페이지들은 만물의 기원과 우주의 창조를 이야기한다. 평소 성서를 읽을 때 첫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하는 사람은 어쩌면 조금도 의미 없이 성서의 가장 오래 된 부분을 읽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서의 첫 장은 가장 오래된 자료가 아님을 주목해야 한다!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시구(詩句)와 리듬의 자유로운 구성으로뿐 아니라 정확하게 숙고된 생각으로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늘과 땅, 물고기와 새, 동물과 사람들을 창조하셨는지를 드러내 보이는 한 편의 시다. 이러한 전망의 중심에 계신 분은 하느님이시고, 창조하시고 쉬시고, 창조된 것이 좋도록 안배하시는 분도 그분이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것이 아주 좋다는 것을 보시고야 쉬시기로 하셨다.
시구는 정확하게 계산된 “저녁과 아침”의 연속, 즉 엿새간의 작업 일(日)과 하루의 휴일로 구분된다. 생각의 배열은 고정된 스케마 속에 분명히 드러나고 그 안에 작업 일이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매번의 작업 동안 하느님께서는 하나뿐인 “위대한 업적”을 이루셨다. 그런데 셋째와 여섯째 날에는 두 가지를 이루셨다. 다시 말해서 6일간의 작업 일은 두 차례의 3일간으로 구성되고, 두 차례의 3일간의 결론이 되는 세번째와 여섯번째 날은 이중 작업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일주일 중 앞쪽 절반 부분의 작업과 두번째 절반 부분을 비교해 보면 작업 일 사이에 완전한 병행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날에 창조된 빛과는 넷째 날의 해, 달, 별이 대응한다. 둘째 날에 이루어진 창공, 위의 물과 아래 물의 창조에는 다섯째 날의 새와 물고기의 창조가 대응한다. 셋째 날의 첫번째 작업인 땅의 창조에는 여섯번째 날의 첫번째 업적인 동물들 즉 “온갖 집짐승과 길짐승과 들짐승”(창세 1,24)의 창조가 대응한다. 저자가 셋째 날에 묘사되어 있는 두번째 업적, 즉 초목의 창조에 여섯째 날의 마지막 업적으로 사람의 창조를 대응시키려고 애쓸 때 스케마는 무너질 기미를 보인다. 그러나 초목이 사람에게 양식으로 이바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하나의 해결을 찾게 되고 관계는 다시 수립된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온 땅 위에서 낟알을 내는 풀과 씨가 든 과일나무를 준다. 너희는 이것을 양식으로 삼아라”(창세 1,29).
병행 현상은 이들 가운데서 두 시리즈를 비교해 볼 때도 드러난다. 첫번째 시리즈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물들 사이의 “분리”를 거의 배타적으로 완수하신다. 첫째 날에는 빛과 어둠이 갈라지게 된다. 둘째 날에는 위의 물과 아래의 물(빗물과 대양)에 의해 창공이 분리된다. 셋째 날은 땅과 바다의 분리를 나타낸다. 첫번째 시리즈에서 완수된 각각의 분리에는 “지배권” 즉 두번째 시리즈에 있는 거주(居住)가 대응한다. 그래서 천체는 빛과 어둠을 지배하고, 새들과 물고기는 창공 아래 대기와 물 속에서 움직인다. “집짐승과 길짐승과 들짐승”(창세 1,24)은 땅에 번성한다.
우리가 말한 많은 것들 가운데 한 가지 사실이 이러한 병행 시리즈에서 분명히 눈에 띈다. 그것은 예술적이고 시적인 그 구성이 말과 소리의 운문(韻文)으로가 아니라 사고와 생각의 운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어떤 역사서의 첫째 장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이것은 순수한 역사 편찬이 아니다. 이것은 역사의 가장 오래된 사건, 즉 창조에 관한 한 편의 시인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처럼 사물의 최초의 신비스러운 시작에 관한 - 협의적인 의미에서 - 역사가 어떻게 기록될 수 있었는지 상상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하느님의 업적이 언급될 수 있었던 자료는 없었다. 그것을 관찰할 수 있었던 증인들도 없었다. 그리고 증인들이 있었다 해도 수천 아니 어쩌면 수백만 세기를 지나 그들의 증언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가 사용한 자료는 창조물 자체였다. 천체는 하느님의 손이 하신 업적을 “일러준다”(시편 19,2). 그리고 살아 있는 자연은 도처에서 창조주의 흔적을 드러낸다. 이성의 도움으로(로마 1,20) 저자는 창조주의 업적이 모든 사물의 역사적 근원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이 시의 6일간은 시간의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저자의 종교적 의도는 독자들의 관심을 휴식의 날로 이끄는 데 있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쉬시기로 하신 일곱째 날로 끝냄으로써 인간이 성스러운 존경심을 갖고 안식일을 지키게 하였다.
창세기의 첫째 장에 있는 하느님의 창조 업적에 대한 시적 보고서 다음에는 제2장과 제3장에서 한층 더 확대된 다른 창조 이야기를 읽게 된다. 이 두번째 이야기는 시적이지 않다. 오히려 구성과 편집에 있어서 원시적이다. 그렇지만 몹시 다양하고 풍부한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원시적인 그 형태 때문에 이 이야기는 첫번째 장에 있는 이야기보다 더 오래 된 것으로 간주된다. 아마도 한때는 이 이야기로 창세기가 시작되었을 것이고. 훨씬 지나서야 현재 제1장에 있는 시적 묘사가 서문으로 앞에 놓이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성서에 있는 창조 이야기가 이중으로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두 이야기는 단지 그 외적인 형태 때문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목적과 내용 때문에 더 구별된다. 첫째 장은 하늘과 땅의 창조로 시작하고 여섯째 날인 마지막에 가셔야 사람이 등장하게 히는 데 반해, 둘째 장은 즉시 사람으로 시작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 우선적으로 고려되며, 창조는 폭 넓게 기술되고 또한 때때로 상세하게 제시된다. 그래서 예를 들면, 여자는 남자보다 훨씬 늦게 출현한다.
이 두번째 기록에서 땅은 풀이나 나무도 없고 동물도 없는 벌거벗은 평원으로 묘사된다. 이 평원의 진흙으로 사람을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드실 때에야 하느님은 사람을 위해 동산 - “낙원”이란 이름은 아주 뒤늦게 붙여진 이름이다 - 을 마련하셨다. 그리고 사람이 동산으로 옮겨진 뒤에 하느님은 진흙으로 땅의 동물과 하늘의 새를 빚으셨다. 모든 것은 전적으로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다.
사람은 모든 것의 중심이었지만 자신은 고독한 것으로 묘사된다. 왜냐하면 어느 곳에서도 적절한 조력자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첫번째 여자와 만나는 일을 준비하는 데 따르는 특별한 염려와 그 첫번째 인류 한 쌍의 모험에 대한 관심이 표명된다. 그래서 첫번째 장의 시적 해설이 우주의 창조라 불릴 수 있는 반면에 두번째 장의 제목은 인간의 창조, 더 낫게는 인간 행복의 창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인간은 그의 용모나 외형에 따라 소개되지 않는다. 진흙으로 그가 빚어졌다는 것은 단지 뒤에 올 진술에 대한 예비일 뿐이다. 그에게 주어진 크나큰 선물은 그의 생명이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조건이다. 생명은 코에 불어넣어진 숨으로써 곧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온 반면에, 행복의 단계는 오히려 환경으로, 즉 “보기 좋고 맛있는”(창세 2,9) 온갖 초목으로 그리고 “그곳 낙원에 있는” 사람과 그의 생명의 동반자에게 전적으로 주어진 동물들로 지적된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선물이나 가장 큰 선물은 하느님 자신이다. 그분은 사람과 함께 동산을 거니시는 분으로 제시될 만큼 지속적으로 사람과 함께 계신다.
우리는 이 모든 세부 사항을 인간의 내적 행복의 상징으로 보아서는 안되는가? 말할 나위 없이 하느님과의 접촉은 무언가 내면적인 것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은총”이라 부르는 것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생명의 동반자와 풍성한 자연은 인간에게 크고 본질적인 행복을 주고, 내적 조건을 가리킨다. 묘사는 오히려 외적인 것만을 고려하고자 하는 인상을 주지만 그 의도는 내적인 것을 상징과 비유로 설명하려는 데 있다. 이야기는 단지 하느님께서 낙원 안에 인간을 행복한 상태로 창조하셨다는 걸을 말하나, 이 이야기로써 하느님께서 인간 자신 안에 행복과 낙원을 창조하셨음을 의도하고 있다. 저자가 무엇보다도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고, 이것이야말로 그가 고대 자료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참되고 올바른 개념 안에서 찾아내었던 역사 자료이다.
그래서 지난 여러 세기 동안 독자들이 이 장을 협의의 역사로 삼고 마치 엄밀한 역사적 과학적 진술을 대하듯 모든 것을 있는 순서대로 배열하고자 한 것은 하나의 손실이었다. 예컨대 지도 위 어느 곳에서 낙원을 찾으려 했던 것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낙원의 행복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창조 업적이 특히 목표로 삼은 것은 이것이고, 여기서 오히려 유혹, 타락 그리고 유혹에 대한 승리를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0년 2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