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하느님과 논쟁을 벌인 사람 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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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03 | 조회수2,550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구약] 하느님과 논쟁을 벌인 사람 욥
예언 메시지의 목적
구약성서 가운데 ‘아가’는 유난히 짤막한 책이나 동시에 매우 중요한 책이다. 그것은 자연과 사랑에 대한 목가적인 노래다. 풍성한 꽃과 초목 사이에서, 영양, 비둘기, 온갖 종류의 동물들을 배경삼아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서로를 추구하고 영원한 행복을 약속한다.
유다 전승은 그토록 표현력이 풍부하고 생생한 이 책을 솔로몬 왕의 작품으로 돌렸다. 왜냐하면 그의 이름이 거기에 자주 나타나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용과 상상력의 풍부함이 이스라엘의 왕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왕을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도 그 저자가 솔로몬 외에 다른 사람일 수는 없다고 믿었다.
우리 시대에는 아가가 절대적으로 솔로몬 시대에, 즉 기원전 970~922년 사이의 작품일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이 기원설에 대해서 의심이 증가되고 있다. 비록 몇 가지 상세한 대목들이 기원전 9~8세기를 생각하게 하지만, 훨씬 많은 지적들은 그 책이 바빌론 유배 이후에 구성되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책의 양식은 페르시아와 그리스적인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으며, 저자는 페르시아와 그리스 지배 이후에, 즉 기원전 4세기 후반이나 3세기 초에 살았다.
그러나 어떤 자료들은 참으로 9~8세기와 관련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에 아가에 다른 고대 노래들이 인용되었다고 보기 쉽다. 따라서 책 전체는 그보다 후대에 편집된, 오래 되고 새로운 노래의 모음이다. 아마도 같은 수집자가 일정한 수의 노래를 구성했거나 혹은 적어도 고유한 기준에 따라, 예를 들면 종종 후렴을 끼워 넣음으로써(아가 2,7; 3,5; 8,4 참조) 세분했을 것이다. 그는 또한 책의 내용과 의도를 부각시키기 위해 정해진 스케마에 따라 모음을 정렬하고 적용시킨 것으로 보인다.
노래의 노선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첫째는 상호간의 경탄과 솟아나는 람을 묘사한다(1,2; 2,7 참조). 그리고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만남이 묘사되어 있고, 동시에 곧 둘에 의한 사랑의 증명이 암시된다(5,2; 6,11 참조). 결론은 사랑하는 두 사람의 기쁨을 말하고(6,12; 8,4 참조) 상호 헌신과 충실 속에서의 사랑의 봉인(封印)에 대해 말한다. 따라서 점차적으로 증가되는 묘사가 있고 마침내 정점에 도달하는 개념의 발전이 있다.
그러나 아가의 의도를 찾아내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 성서의 모든 책이 사람을 넘어서 하느님도 저자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모든 성서가 하느님의 의향을 지니고 있다, 쉽게 말해서 초자연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추론을 해야 한다. 여하튼 아가의 어느 부분에서도 초자연적인 뜻에 대한 분명한 암시가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독자 자신이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
어떤 해석자들은 더 높은 의도를 일부 일처의 결혼 권장에서 찾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의 생각대로라면 아가는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결혼을 하느님의 권유를 빌어 이상으로 제시했어야 하고, 따라서 이스라엘에 여전히 일반적인 일부 다처주의를 단죄했어야 한다.
그러한 설명과 부딪히는 큰 어려움은 아가에서 일부 일처의 결혼에 대한 이상이 희미하게 암시된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좀더 선의를 갖고 다음의문맥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포도원이 있어요. 솔로몬 임금님, 당신께서는 일천 세겔을 거두어 들이셔요”(아가 8,12). 만일 저자가 일부 일처의 결혼 교리를 유포시키고자 했다면 그것을 더욱 분명하게 정형화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거의 한 마음으로 아가 전편을 통해서 하나의 교리 혹은 정신적 가치를 찾는다. 신랑과 신부의 형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사랑하는 관계에서 취한 언어로 다른 사랑, 즉 그분의 선택된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선택된 사람들의 사랑이 은유적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본다. 구약의 사고의 흐름으로 보아 선택된 사람들은 히브리 민족이고, 모든 히브리인은 신랑과 신부의 형상을 쉽게 이해했다. 호세아 시대부터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불충실을 엄하게 꾸짖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께 한 고유한 약속을 깨뜨렸고, 간음으로 자신의 신랑을 버리고 다른 신들의 등 뒤로 숨어 버린 신부였다. 모든 예언적 설교는 다음과 같이 비탄이 섞인 초대로 끝맺었다. “이스라엘아, 너의 신랑에게로 돌아오라. 너의 하느님께 돌아오라.”
그러한 개념의 결과로서 아가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면서,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이 숭고한 사랑을 의도한다. 이제 불충의 비난은 사라지고 오로지 충실하고 영속적인 계약의 바람과 기쁨만이 표현된다. 아가는 유배에 이어지는 시대, 즉 이스라엘이 완전한 일신론으로 야훼만을 경배했던 때의 노래가 분명하다. 아가는 모든 예언적인 설교의 종착점과 결론인 셈이다. 예언자들의 목적은 달성되고 놀라운 아가에서 즐거운 반성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전망에서 아가가 주로 신부에 대해 다룬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그분의 선택된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노래다.
욥과 하느님의 논쟁
거의 모든 민족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언어도 성서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인정된 사실이다. 우리는 히브리적 개념과 표현을 빌어 쓰고 우리의 생각을 성서적 예로 설명하며 종종 구약성서의 인물에게 눈을 돌린다. 그리고 우리가 아주 흔히 지명하는 인불 가운데 하나가 욥이다. 우리는 ‘욥의 메시지’에 대해서, 즉 불운한 욥에 대해서, 거름더미 위의 욥에 대해서, 그의 인내에 대해서, 불쌍한 욥에 대해서 말한다. 이런 모든 표현들은 같은 이름의 책에서, 특히 앞의 두 장에서 비롯한다.
사실 일반적으로는 그 서두로만, 즉 욥의 정의와 부, 사탄에 의한 시험, 불운과 비참에서의 그의 인내, 무엇보다도 다음의 유명 한 구절에서 생략된 체 드러난, 그의 체념만으로 42장으로 된 이 책을 알고 있다.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 가시니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욥기 1,21) 많은 사람들은 그 책의 에필로그도 알고 있고 욥이 원래의 축복을 되돌려받았다고 이해한다. 그렇게 욥은 역경 속에서 인내의 모범이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로 성서의 욥기인가? 이러한 이미지가 흔히 부각되지 않고 있는 42장 전체의 내용에 상응하는가? 책 전체를 읽은 사람이라면 그것을 부인할 것이고 오히려 욥을 아주 참을성이 없는 사람, 하느님과 논쟁을 벌인 사람 그리고 고통에 시달려 어째서 그러냐고 하느님께 항의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이 논쟁에서 책의 저자는 본연의 투쟁, 거의 모든 사람들의 투쟁을 표현했다. 그의 의도는 독자로 하여금 몹시 인간적인 문제, 즉 고통의 문제에 관해서 반성하게 하는 데 있다.
저자는 문제를 자기 나름대로 예리하게 제시하고자 하면서 처음의 두 장에 욥의 모습을 지극히 의로운 사람, 바로 이 때문에 또한 몹시 부유한 사람 - 하느님께서 선에 대해 보상해 주시기에 - 으로 그린다. 이 의로운 사람은 외딴 곳에 멀리 떨어져 사는 - 국경 지방에 거주하는 - 것으로, 시대적으로는 옛날에 사는 - 모호한 과거 속에 사는 - 것으로 제시된다. 왜냐하면 가까운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잘못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 예외적인 의인을 내려치는 재앙이 묘사되어 있는 반복구와 후렴은 모든 독자가 쉽게 깨닫는 묘사의 인위적인 특성을 아주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러한 도입이 역사적인 자료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욥은 성서 역사에서 ‘고통받고 인내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졌다.
오늘날은 욥기의 처음 두 장이, 그 책의 주요한 내용 즉 하느님과 인간의 토론에 대한 준비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이해하고 있다. 서언에 상응하여 욥은 자신에게 닥친 뜻밖의 재앙을 받을 만하지 않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천명할 수 있다. 이 사실은 그에게 단지 한순간에 머리 속에 타오르는 확신일 뿐 아니라 왜 내가 그토록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치명적인 문제이다. 욥은 하느님의 정의의 순간을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바로 하느님은 정의로 우시고 선에 대해 보상하시며 단지 악을 벌하실 수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확신하는 사람이므로, 그의 마음에서 그 투쟁이 인다. 이 투쟁으로 억제된 그는 쓰디쓴 비탄을 드러내며 하느님과 논쟁을 시작한다.
그러자 욥의 친구 셋이 그를 만나러 온다. 처음에 그들은 엄청난 비애 때문에 낙담에 휩싸여 침묵을 지킨다. 그 뒤 친구의 비극을 이해한 그들 셋은 모두 세 가지 긴 담화로 고통에 대한 그들의 관점을 설명한다. 그들 역시 하느님께선 단지 악을 벌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원칙으로부터 그들은 욥이 무언가를 양보하도록 몰아붙이려고 애쓴다. 그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인정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욥은 어떤 식으로든 이 양보에 굽히려 하지 않는다. 친구들의 세 가지 설명이 각각 있은 뒤 그는 새롭고 원기 왕성하게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한다. 욥의 말은 게다가 친구들의 말들과 마찬가지로 논리 있게 귀결이 나지 않는다. 논쟁 중에 아무도 다른 사람의 논거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 생각을 자유로이 전개하며, 무고를 고발하고 증명하는 식으로 그들은 계속해서 서로 충돌한다. 온갖 고발 뒤에 욥은 더욱 공격적이 되고, 마침내 하느님 친히 땅에 내려오시어 문제를 결정해 주시라고 도전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욥에게 나타나 선다. 그분은 욥의 세세한 비탄에 직접 들어가시지 않고 욥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관한 그분의 섭리에 대해 그 지극히 시적인 찬가로 암시하신다. 그리고는 이 모든 일이 있은 뒤에 섭리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 그에게 물으신다. 그러자 욥은 고통의 신비를, 그것이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침묵 속에 받아들인다. 그는 하느님 자신인 선비 속에 숨어 버린다.
욥기는 일종의 지혜서다. 역사를 다루려는 의도는 없고 고통에 관해서 인간이 반성하도록 하려는 의도를 지닌 책이다. 인간에게 자신의 고통을 침묵 속에 견디라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그에 대한 최종적인 정의는 하느님의 신비 속에 감추어 있기 때문이다. (L’uomo mo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1년 11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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