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불확실한 예언들의 성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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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05 | 조회수3,159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신약] 불확실한 예언들의 성취
예수의 족보에 나오는 다섯 명의 여인
일반적으로 전통과 고귀성을 표시하는 족보는 윗대로 올라가면서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다른 선조들의 이름을 그 시조(始祖)에 이르기까지 열거한다. 때때로 계통은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후손에 이르기까지 열거하여 내려오기도 하는데, 성서는 흔히 크고 중요한 사건을 소개할 때 영웅의 족보로 - 때로는 윗대로 올라가면서 때로는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 시작한다. 사실 선조들의 계통은 분명히 영웅에 대한 보증을 뜻한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족보의 남성 이름 곁에 그 배우자까지 기억하기가 몹시 어렵고, 언제나 완전하게 일련의 여성 갈래를 기록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곧 이해된다. 성서의 환경에서는 게다가 여성의 인격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성은 성서의 족보에서 단지 드물게만 기억된다. 성서는 단 한 번 여성에 대한 족보(유딧 8,1-3)를 밝히는데, 그것도 그녀의 남성 선조들의 이름만을 기억할 뿐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첫 번째 복음서의 서두에서 예수의 족보에 들어 있는 몇 명의 여성 이름을 발견하는 것은 아주 주목할 만한 상황이 된다. 마리아가 마지막에 요셉 곁에서 기억되고 이 두 사람 사이에 현존하는 관계가 특별하게 부각되는 사실은, 예수의 처녀 출생에 대한 마태오의 이야기에 지극히 적절하고 필요한 배경을 드러낸다. 그러나 족보의 앞 부분에 네 명의 여성이 지명되는데, 이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는 구약 성서에서 그녀들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다면 사정은 더욱더 알 수 없게 된다. 어째서 이 네 명인가?
예수의 족보에 나오는 첫 번째 여인 다말에 대해서 창세기(38장)는 그녀가 유다의 맏아들 에르와 결혼하였다고 이야기한다. 에르가 죽은 뒤에 자식 없이 남게 된 과부 다말은 레위법에 따라서 유다의 둘째 아들 오난과 결혼하였으나 그 역시 자식을 남기지 않고 죽었다. 셋째 아들이자 죽은 이들의 막내 동생을 남편으로 맞이하지 못하리라 생각한 다말은 빈틈없는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창녀로 가장하여 홀아비가 된 그녀의 시아버지 유다가 자기와 결혼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해결은 레위법에 따른 것이다.
두 번째로 등장하는 여인은 여호수아기(2,1-21)의 창녀 라합으로, 그녀는 이스라엘의 정탐원들을 환대하였고, 예리고의 왕으로부터 그들을 찾아내라는 명령을 받은 추적자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해 냈다. 그 도시가 함락되자 이 여인은 보호받았고,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섞여 살도록 허락받았다.
세 번째 여인으로는 모압 여자인 룻이 거론되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그녀는 자신의 조국과 신(神)을 포기하고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갔다(룻기 1,16-22). 그녀는 (이방인으로서) 하느님의 백성 안에 받아들여졌다.
네 여인 중 마지막은 솔로몬의 어머니 바쎄바이다. 그녀는 복음서에서 “우리야의 아내”로 묘사되고, 이로써 다윗의 간통과 용감한 헷(히타이트) 사람에 대한 살해가 암시된다(2사무 11장).
네 명의 여인과 관련 있는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흔히 복음서 저자가 그리스도의 선조들의 범죄 형태와 그 죄에 대해서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해석을 하는 사람은 흔히 바쎄바의 간통과 룻의 타종족과의 결혼 그리고 라합과 다말의 창녀 신분을 강조하려 한다. 죄인들을 위해 보상하려고 온 사람에게 길은 사람들의 죄를 통해 준비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견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네 여인을 한꺼번에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온당치 않다. 다말은 유다와 관련해서 완전하게 그 권리가 있었고 유다는 그것을 알았다(창세 38,26). 룻은 그녀에게 바쳐진 책 속에서 이상적인 여인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라합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넘어간 뒤에 더 이상 창녀가 아니었다. 오히려 여기서는 네 여인의 공통점, 즉 외국인과의 연결이라는 특징이 부각된다. 라합은 예리고의 가나안 여인이었고 룻은 모압 여인, 다말은 거의 확실히 아둘람에서 유래했으며, 바쎄바는 그녀의 남편과 같이 헷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마태오에 의해 언급되는 그리스도의 족보의 다른 모든 여인들은 이스라엘 여인들이었다. 이 네 명은 바로 이방인들도 구세주가 오시는 데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보여 주려고 거론된다. 히브리인들과 이방인들을 통해 오신 분은 이미 족보 속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해 운명지어져 있는 것이다.
꿈속에서의 지시
예수의 유년기 이야기는 마태오와 루가 복음에서만 발견된다. 그것은 기쁜 소식, 즉 예수의 설교를 앞서는 이야기다. 그것은 준비의 장들이며 일종의 예비 역사를 제공한다. 그러나 현재에는 바로 이 장들이 특별한 관심을 끌고 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신자들 사이에서도 그 내용에 대해 의심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내용은 지나치게 기적적인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그들은 “전설”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비역사적으로 진술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추론이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예수의 공생활에서도 기적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도, 부활에 대한 이야기조차 부정할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다른 이들은 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 더욱 신중하다. 그들은 이야기되는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이야기하는 수법, 즉 사실들이 소개되는 방식을 고려한다. 문학적인 표현에 대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야기하는 수법이 좀더 깊이 생각하도록 이끌기에 확정된 이야기 요소에서 저자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냐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그러한 경우 확실성은 감소되나 사실들이 부정되진 않는다.
이를 입증하는 예는 하느님과의 접촉에 대해서 마태오가 제공하는 묘사에서 발견된다. 처음의 두 장에서 그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다섯 번이나 묘사하고, 그때마다 통지가 꿈속에서 주어진다. “요셉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에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고 일러 주었다”(마태 1,20). 그것은 요셉 개인에게만 주어진 알림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의 천사가 일러 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마태 1,24).
아기를 경배한 동방의 박시들이 헤로데에게 돌아오라는 제의를 받았을 때,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꿈에서 지시를 받았다”(마태 2,12). 여기서는 천사에 대해 말하지 않고 꿈속에서 있었던 하느님과의 접촉에 대해서만 말한다. “박시들이 물러간 뒤에 주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어서 일어나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에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알려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하고 일러 주었다”(마태 2,13). “헤로데가 죽은 뒤에 주의 천사가 에집트에 있는 요셉의 꿈에 나타나서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이미 죽었으니 일어나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 하고 일러 주었다”(마태 2,19-20). 성지로 돌아오는 길에 요셉은 위험을 무릅쓰고 유다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자 꿈에 - 그러나 천사로부터가 아니다. - 갈릴래아로 피신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마태 2,22).
숙고해 보면 하느님과의 접촉이 영적인 계획 위에서 실현된다는 것을 누구나 이해한다. 즉 하느님의 영이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고, 이를 위해 하느님은, 비록 필연적은 아닐지라도, 외적인 도구를 이용하실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영적인 접촉을 묘사하게 될 때는 거의 자연스럽게 어떤 외적인 것, 예컨대 목소리 혹은 발현을 도움으로 청하게 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혹시 마태오도 하느님과의 접촉을 묘사하기 위해 어떤 정해진 형태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하고 질문해 보는데 그런 경우에 그는 고대에서 많이 사용되던 수단인 꿈을 선택했을 것이다. 아니면 하느님 친히 계시의 방식을 선택하시고 관습에 적용시키심으로써 이 고대의 수단을 이용하셨을까?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적으로 다른 일을 이야기하는 루가의 예비 장들에서 하느님과의 접촉은 다소 외적인 방식으로 제시된다. 즈가리야에게 분향 제단 오른쪽에서 천사가 나타난다(루가 1,11). 여섯 달 뒤 같은 천사가 나자렛의 작은 집으로 동정녀 마리아를 찾아간다(루가 1,26). 성탄날 밤에 한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고(루가 2,9), 천사들의 무리가 ‘영광송’을 노래한다(루가 2,13). 어떤 방식으로도 천사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나 - 사람 같았을까? 단지 빛의 찬란함이었을까? - 루가가 사람과 같은 모습을 보았다는 인상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루가의 이러한 놀라운 태도를 마태오의 고유한 방식과 비교해 볼 때, 두 명의 저자 모두가 그들의 고유한 진술 방식대로 하느님과의 접촉을 우리에게 제시한다는 가정이 생겨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문자상으로만 이해해야 하는지, 모두가 문자 그대로 일어났는지 묻게 된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에 관해서, 전체 작품 가운데 단지 두 개의 장만 가지고 확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예비의 장은 전체 작품의 일부이다. 계속되는 마태오의 복음에서는 천사들이 실제적인 모습으로 발견된다(마태 4,11; 28,2-7). 루가 역시 그의 작품을 계속해 나가는 가운데서 밤의 발현을 다룬다(사도 16,9; 18,9). 따라서 두 명의 저자 모두는 비록 그들의 표현 형태를 선택하지만, 역사적인 사건에 근거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대로 이루어졌다”
로마의 살라리아 가(via Salaria)에 있는 프리쉴라(Priscilla)의 카타콤바에는 작지만 유명한 벽화가 보존되어 있다. 팔에 아기를 안고 있는 한 어머니를 양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예언자의 초상이다. 어머니와 아기 위에는 별이 걸려 있다. 이 프레스코 벽화 하단부는 오래 전에 낡아서 소실되어 버렸다. 로마 시대 카타콤바의 수많은 성서적인 표현들 가운데서 이 초상은, 비록 명기되어 있지는 않지만, 분명히 동정 성모와 그분의 천상 아기를 가리킨다. 별은 메시아적인 품위의 표이고, 예언자의 형상은 그의 예언에서 바로 동정 성모를 암시하는 이사야를 나타낸다. 이 옛 그림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구약 성서의 메시아적 예언을 어떻게 읽었는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에서 유다인 독자들에게 예수를 구약의 완성으로 드러내고자 한 더 오래 된 마태오의 복음에 집착하였다. 마태오는 게다가 예수의 모습이 조금밖에 메시아적이지 않은 경우에, 즉 그분의 수난 순간과 그 이해할 수 없는 유년기에 메시아적 약속을 특별한 방식으로 암시하고 있다.
어쨌든 복음서의 모든 독자의 눈에는 예수의 유년기에 관한 이야기에서 마태오가 흔히 반복적으로 구약 성서의 예언을 환기하는 것이 눈에 띈다. 약혼자가 임신 상태에 있는 것을 발견하는 요셉의 문제는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태 1,23)는 이사야 예언의 증언으로 해결된다. 유다인들의 새로 나신 왕을 어디서 경배할 수 있겠느냐는 박사들의 질문에는 “유다의 땅 베들레헴아, 너는 결코 유다의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영도자가 너에게서 나리라.”(마태 2,6)는 미가의 예언으로 응답된다. 요셉이 아기와 그 어머니를 에집트로 피난시킬 때는 “내가 내 아들을 에집트에서 불러내었다.”(마태 2,15)는 호세아의 예언이 완성된다. 헤로데에 의해 저질러진 유아 학살 뒤 베들레헴의 어머니들이 그들의 품안에서 죽은 아기들 때문에 눈물 흘릴 때는 “자식 잃고 우는 라헬, 위로마저 마다는구나!”(마태 2,18) 하는 예레미야의 진술이 실현된다. 그리고 유년기 아야기의 마지막은 일반적인 예언자들의 말로 예수의 나자렛에서의 감추어진 삶을 가리킨다. “그를 나자렛 사람이라 부르리라”(마태 2,23).
이렇게 예수의 유년기의 모든 사건들은 거의 구약 성서의 예언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예언적인 성취로 소개할 수 없었던 사실들이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빠져 있다는 인상을 갖는다. 반면에 언급된 사실들은 단지 예언적인 기대에 부응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의 첫째와 둘째 장의 진정성이 흔들리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어린 시절의 예수에 관한 수많은 의심들이 더욱 깊어지는 것은 아닐까?
마태오 복음의 첫번째 두 장에 대한 더욱 통렬한 불신의 표는 대체로 이런 소리다. 마태오는 사실에 대한 묘사를 한 것이 아니라 구약 성서의 예언대로 이해하거나 변형시켰다는 것이다. 즉 그는 기대한 대로 사건들을 상상하고 따라서 그것들을 예언의 완성처럼 묘사한다는 것이다. 켁(Kec)과 영(Young) 같은 저자들은 그들의 책 “신약 성서의 세계”(Il mondo del Nuovo Testamento)에서 마태오가 “예언이 정당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사실들을 바꾸었다.”고 단정한다.
실제로 첫 번째 장들에서 사용된 이야기 수법을 고려해 볼 때 역사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없는 일들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역사적이지 않은 묘사를 순전한 환상으로 부인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하물며 문제가 되는 두 장의 모든 부분에서 모든 역사적인 성격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마태오에 의해 예언의 완성으로 소개되는 모든 사건들에 대해서 - 우리가 그 경우를 비판적으로 고려하고자 한다면 - 더욱 개인적이고 엄밀한 규범으로 회상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대부분의 경우에 인증(引證)되는 예언들이 이례적이고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많은 것은 사실 히브리 백성이 그 기대의 근거로 삼는 널리 알려진 예언들 가운데서 발견되지 않는다. 분명한 이유는 이스라엘이 그 “나름의” 메시아를 기대했지, 마태오가 묘사하는 “구세주”를 기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오의 메시아는 세속적언 기대와는 전혀 다르다.
그런데 마태오에 의해 인용된 예언들을 연구해 보면, 그것들에 의해 조명된 사실들, 특히 에집트 피신과 나자렛에서의 드러나지 않는 삶이 놀랍게도 낯설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대하지 않았던 사실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 위해 마태오는 자기 자신과 백성을 위해 그 “이례적인” 메시아적 예언들을 찾아냈다. 그것으로 그는 사실을 예언에 배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언을 사실에 맞추어 나갔다.
따라서 첫 번째 그리고 피상적인 만남에서 의심과 불확실함을 낳는 예언들은 성숙한 숙고를 거친 뒤에 진리의 샘을 드러낸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2년 4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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