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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유대인 이야기61: 건국 - 이스라엘 건국, 또 다른 분쟁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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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5-23 조회수4,671 추천수2

[유대인 이야기] (61) 건국


이스라엘 건국 … 또 다른 분쟁의 시작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독립 선언서가 낭독됐다. 유대민족의 2000년 방랑이 막을 내리는 데는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사진은 텔아비브 박물관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있는 이스라엘 초대 총리 벤 구리온.

 

 

1963년 제3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 감독상 등 7개 부문을 수상한 데이비드 린(David Lean) 감독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는 상영시간이 4시간에 가까운 대작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영국은 수에즈 운하를 둘러싸고 터키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이에 영국은 정보국 소속 로렌스 요원을 팔레스타인으로 파견, 그곳 아랍인들의 힘을 빌려 터키를 공격한다. 로렌스는 기적적으로 전쟁에 이겼고, 아랍 민족으로부터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영웅적 칭호를 받게 된다.

 

이렇게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영국을 위해, 형제나 다름없는 터키에 칼을 겨눴다. 이유가 있었다. 영국이 자신들을 도와주면 팔레스타인에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10월,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 맥마흔(Henr Macmahon)은 이런 약속을 한다.

 

“전쟁이 끝나면 아랍 지역의 독립(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국가 건설 포함)을 돕겠다.”

 

이른바 맥마흔 선언(McMahon Declaration)이다. 딱 한번 한 약속이 아니다. 약속은 이후 10여 차례 이어진 왕복 서한을 통해 거듭 확인됐다. 영국이 이러한 약속을 한 이유는 간단했다. 영국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아랍인들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었다. 결국 아랍인들은 이 약속을 믿고 영국을 위해 싸웠다. 영국이 전쟁에만 이긴다면 자신들은 소원하던 나라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영국은 거짓말쟁이였다. 아랍인들은 영국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철저히 영국에게 속았다. 영국은 신사의 나라가 아니었다. 비신사적인 나라였다.

 

1900년대 초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영토만 3700만㎢에 달했다. 이는 당시 세계 육지 면적의 1/4에 해당하는 수치다. 그 큰 나라가 아랍 민족과 유대인들을 갖고 논다. 아랍인들과 했던 그 약속을 똑같이 유대인들에게도 한다.

 

1917년 11월,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벨푸어(Arthur James Balfour, 1848~1930)가 영국내 유대인 명문가였던 로스 차일드 경(Lionel Walter Rothschild, 1868~1937)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의 정착지를 마련할 것을 호의적으로 숙고하며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이른바 벨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이다. 벨푸어 선언이 나온 배경은 간단하다. 영국은 유대인들의 돈과 기술이 필요했다.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의 막강한 자금력은 대부분 유대인들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유대인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포탄 제조에 들어가는 아세톤의 대량생산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유대인 과학자 하임 바이츠만(Chaim Azriel Weizmann, 1874~1952)이었다.

 

1925년경 미국내 유대인 수는 450만명으로 추산된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부유했다. 당연히 이들은 미국을 움직이는 실질적 힘이었다. 1930년대 말 뉴욕시내 대학 재학생 중 50%가 유대인이었다. 또 미국 전체 대학생의 9%가 유대인이었다. 이들은 대학을 졸업한 이후 정계와 법조계로 진출했고, 미국 사회의 주류가 된다. 이들은 스스로 유대인에게 유리한 법 체제를 만드는 등, 정치 경제 사회를 앞에서 이끌었다. 지금도 전 미국 대학 교수 중 30%가 유대인이다.

 

발명과 과학 분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물론이고 결핵 퇴치의 아버지 셀만 왁스만(Selman Abraham Waksman, 1888~1973)도 유대인이다. 특히 유대인 에디슨(Thomas Alva Edison, 1847~1931)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암흑 속에서 살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문화 부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라디오 텔레비전 영화 등 문화계도 대부분 유대인이 장악했다. 유니버셜, 20세기 폭스, 파라마운트, 워너 브러더스, 콜롬비아 등 유수 영화사는 모두 유대인이 설립하거나 소유하고 있었다.

 

‘벤허’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을 제작, 한때 세계 최대의 영화사로 불렸던 MGM사(‘어흥’하는 사자로고로 유명하다)도 1924년 유대인인 새뮤얼 골드윈(Samuel Goldwyn, 1882~1974)과 루이스 메이어(Louis B. Mayer)가 설립했다. 문화를 장악했다는 것은 유대인의 이해와 관심이 일반 대중에게 그대로 이식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담이지만 미국의 전설적 코미디언 찰리 채플린(Charles Spencer Chaplin, 1889~1977)과 밥 호프(Bob Hope, 1903~ 2003), 그리고 천재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Allan Spielberg, 1946~)도 유대인이다.

 

턱 아래의 움푹 파인 매력으로 1960년대 전 세계 여심을 사로잡았던 영화배우 커크 더글러스(Issur Danielovitch Demsky, 1916~)와 ‘원초적 본능’에 출연한 그의 아들 마이클 더글러스(Michael Kirk Douglas, 1944~)도 유대인이며, 해리슨 포드(Harrison Ford, 1942~), 골디 혼(Goldie Hawn, 1945~), 더스틴 호프만(Dustin Lee Hoffman,1937~), 숀 펜(Sean Justin Penn, 1960~), 스티븐 시걸(Steven Seagal, 1951~), 메릴 스트립(Mary Louise Streep, 1949~)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영화인들이 모두 유대인이다.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유대인을 꼽으라면 한국 전쟁 당시 UN군 총사령관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던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장군을 들 수 있다.

 

방송과 언론 부분을 봐도 유대인 일색이다. CNN과 ABC, CBS의 창업주가 유대인이고 지배 주주도, 그리고 현재 경영인도 유대인이다. 또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와 뉴스위크(Newsweek)의 발행인 캐서린 그레이엄(Katharine Graham, 1917~2001)과 뉴욕 타임스의 아서 슐츠버그(Arthur Sulzberger) 사장이 유대인인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여담이 길어졌다. 어쨌든, 3문장 125단어로 이뤄진 벨푸어 선언이 남긴 후속 파장은 컸다. 유럽 곳곳에서 박해를 받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자신들의 나라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가득했다. 특히 1904년부터 러시아에서 발생한 대학살은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가속화 했다. 벨푸어 선언 당시 8만~10만명에 불과하던 팔레스타인 지역 유대인 수가 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50만명으로 불어났다.

 

팔레스타인 아랍인 입장에서 보면 기가 막힐 노릇이다. 오랫동안 살고 있던 집에 갑자기 모르는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서류 한 장을 내밀며 당장 집을 비우라고 하는 형국이다.

 

영문을 몰랐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이미 용도 파기된) 오래된 서류(맥마흔 선언)를 꺼내 흔들며 절규한다.

 

“무슨 소리야 이곳은 우리 땅이라니까! 영국이 약속했어. 그래서 우리가 영국을 위해 피를 흘렸어! 여긴 우리 집이야. 너희들은 돌아가!”

 

물러설 유대인들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서류(벨푸어 선언)가 있었다.

 

“뭔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너희들과 영국이 어떤 약속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도 이 땅에 나라를 세울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았어. 그러니 집을 비워줘야 겠어.”

 

유대인들은 “해 보라면 해라”며 팔레스타인으로 밀려들었고, 이미 터를 잡고 있었던 아랍인들은 당연히 ‘내 집을 지키기 위해’저항했다.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살 수 있는 지역은 점점 줄어들었다. 혼란이 가중됐다.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는 살해 행위와 폭동이 그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대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야만인으로 간주하며 강력대응 했다.

 

그런데 이때 영국이 또 한번 마음을 바꾼다. 이번에는 다시 아랍인 편을 들고 나선 것이다. 1939년 5월 영국 외상 어니스트 베빈(Ernest Bevin, 1881~1951)은 “팔레스타인 지역 유대인 이주를 제한하고 유대인 국가를 창설하는 기존 정책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영국은 중동지역의 유전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당연히 아랍세계와의 원만한 관계가 중요했다.

 

1차 세계대전 후 국제 연맹의 결의로 팔레스타인 통치는 영국에게 위임됐다.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해서 내키는대로, 마음대로 행동했다. 문제는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이 아닌 자국의 이익을 기준으로 행동했다는 점이다.

 

팔레스타인은 이제 중독의 화약고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영국은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이에서 위험스런 줄타기를 계속할 뿐이었다. 그런 가운데, 팔레스타인 지역은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에 피를 흘리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렇게 사태가 악화된 데는 영국이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때로는 방해했으며, 때로는 눈감아 주는 미지근한 태도를 견지했기 때문이다.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겠다는 적극적이고 확실한 노력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직후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정세 변화를 가져오는 결정적 계기가 생긴다. 1947년 팔레스타인에서의 새로운 삶에 대한 꿈에 부푼 유대인 4500여명을 가득태운 선박 엑소더스호가 팔레스타인의 항구에 들어섰다. 그런데 영국 해군이 이 배를 접수했고 즉시 독일로 추방했다.

 

이 사건으로 국제적 비난이 일게 된다. 그러자 영국은 골치 아픈 팔레스타인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자 했다. 그 결과 유엔 총회는 1947년 11월 팔레스타인 분리를 결정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와 아랍 국가를 동시에 각각 창설하고 예루살렘을 국제 도시화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결정에 유대인 지도부들은 찬성했고, 아랍인들은 반대했다. 영국의 위임 통치가 끝나는 날은 1948년 5월 15일로 결정됐다.

 

유대인들은 환호했다. 한반도에서 북한이 남쪽에 전기 송출을 중단한 그 해 그 날이었다. 1948년 5월 14일 금요일 오후, 다비드 벤 구리온(David Ben-Gurion, 1886~1973)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우리 민족의 권리에 입각해, 또 유엔 결의에 따라 우리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설립하는 것을 선언한다. 이제 우리들의 나라는 이스라엘로 불릴 것이다.”

 

반주 없이 국가를 부르고 선언문 전문을 읽기까지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1900여년의 방랑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독립 선언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 이튿날, 이집트와 트란스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아랍군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했다. 무력으로라도 이스라엘 건국을 무효화하고, 유대 민족을 공중 분해시키겠다는 의도였다.

 

유대인과 아랍의 전쟁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아랍 연합군이 우세해 보였다.

 

[가톨릭신문, 2010년 5월 23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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