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예루살렘에서의 활동(마르 11,1-12,4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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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0-07-25 | 조회수3,811 | 추천수1 | |
[최혜영 수녀의 성경말씀나누기] 마르코 복음서 (34-39)
제3부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마르 11, 1~16, 8)
이제 예수님과 그 추종자들은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 목적지에 다다른다. 예루살렘은 예수님 적수들의 처소이며 그분을 죽이는 장소로 묘사되는데,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단 한 번 방문한 것으로 보고함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지금까지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움직여왔다면 앞으로는 정점을 향하여 내달릴 것이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의 활동을 마치 사흘 동안에 일어난 것처럼 보도하고(11~13장), 예수님의 수난기(14~15장)와 부활사건(16, 1~8)을 전한다.
성지주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의 마지막 공생활을 기념하는 성주간의 여정을 마르코의 안내를 받으며 떠나보기로 하겠다.
V. 예루살렘에서의 활동 (11, 1~12, 44)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아에 묵으시며 낮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활동하시고 날이 저물면 성밖으로 돌아오신다. 첫째날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을 두루 살피시고(11, 1~11), 둘째날에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을 정화하셨다(11, 12~19). 셋째날에는 말라 버린 무화과나무의 교훈에 대해 설명하시고(11, 20~26), 성전 뜰에서 유다 지도자들과 긴 논쟁을 벌이셨으며(11, 27~12, 37) 몇 가지 훈시의 말씀을 곁들이신다.(12, 38~44)
1. 예루살렘 입성 (11 ,1~11)
해마다 성지주일에 기념하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장엄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과연 역사적으로 어느 만큼 사실적인 사건이었을까? 예수님께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들었다면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눈에 띄었음 직한데, 이 사건 자체에 대한 반응은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구약 성경에 예언된 대로, 메시아의 행차의 빛 안에서 이해하려는 상징적이며 예언적인 서술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후예, 곧 메시아로서 메시아의 왕도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둘을 파견하여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를 가져 오게 하시는데, 과연 분부하신 말씀처럼 아무런 제재 없이 어린 나귀를 가져올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왕이 왕권을 발동하여 아무것이나 마음대로 징발할 수 있는 것처럼(1사무 8, 11~18), 예수님께서는 새끼나귀를 징발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주님이시고 앞일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분이시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즈카 9, 9; 참고 창세 49, 11)
즈카리야의 예언처럼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군주로서 새끼나귀를 타고 오시어 민족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실 겸손한 임금님이시다. 군중들은 임금님께서 행차하시는 길에 자기들의 겉옷과 나뭇가지를 깔고 환호를 한다. 이스라엘의 임금 즉위식을 연상하는 장면이다.(참조 1열왕 1, 38~40; 2 열왕 9, 13)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9~10절)
군중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다윗의 왕정을 세우기 위해서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분, 곧 메시아이심을 고백하면서 ‘호산나’라고 만세를 부른다.
‘호산나’란 말은 원래 유다인들이 순례 대축제일에 부른 소위 할렐시편(시편 113~118장) 가운데 나오는 일종의 청원기도로, “하느님 구원하소서” 또는 “하느님 도와주소서”(시편 118, 25)란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는 군중들의 환호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하늘나라 천사들도 “메시아 예수 만세!”하며 외친다. 이처럼 군중들의 환호성은 온 우주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기를 참으로 바랐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그러나 예수님의 메시아 신분, 곧 참된 왕직은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셨던 십자가상 죽음에서 최종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의 열광적인 환호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시고 당신이 하실 바를 묵묵히 하실 뿐이다.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셔서 그 곳의 모든 것을 둘러보신 다음 베다니아로 돌아오신다.(11절) 이로써 다음날의 성전 정화를 위한 준비가 끝났다. [가톨릭신문, 2006년 9월 3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2. 무화과 나무와 성전 (마르 11, 12~25)
이틀째 되는 날, 성전 정화 사건이 일어나는데 사건 앞뒤로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 저주 이야기가 소개된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와 하느님께 맞갖은 경배의 장소가 되지 못하는 성전이 상징적으로 연결되고,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으로서 하느님 심판을 예고하시는 메시아로 드러난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 (12~14절)
이스라엘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는 지중해성 기후에서 잘 경작되는 무화과, 올리브, 포도나무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작물로 성경 안에 종종 등장한다.
예수님께서 시장하신 차에 무화과 열매를 기대하고 가까이 가셨는데, 잎사귀만 무성하고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 것을 보시고 저주를 내리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많은 독자들이 당혹스럽게 느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유일한 기적 이야기인데 왜 하필 자연물에 대한 저주이야기일까? 그것도 제 철도 아닌 때에 말이다.(13b절)
“포도나무에 포도가 하나도 없고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하나도 없으리라. 이파리마저 말라 버릴 것이니 내가 그들에게 준 모든 것이 사라지리라.”(예레 8, 13; 참고 미카 7, 1)
아무래도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메시아로서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구약성경 말씀에 빗대어 하신 말씀이리라.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실망이 허기짐으로 나타나고, 제 때가 아니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미 회개의 시기를 놓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말라버리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지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수 있는 위력을 갖고 계심을 상징한다.
성전을 정화하심 (15~19절)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고 믿었던 지극히 거룩한 처소로서 최상의 예배 장소였다. 그런데 온갖 상행위로 떠들썩한 모습과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는 모습은 옛 예언자의 질타를 떠올리게 한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이사 56, 7)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예레 7, 11)로 만들어 버렸다.”(17절)
예수님께서 상인들을 쫓아내시고 상과 의자를 둘러엎으시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이 혁명가이셨다느니 예수님께서도 폭력을 행사하셨다느니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성전정화의 상징성을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는데 사용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성전정화가 이루어진 성전 마당, 이방인의 구역은 명실공히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된다. 세말에 가서 성전은 기도하는 곳이 되고 올바른 제사를 드리는 곳이 되리라는 예언자들의 말이 이루어진 것이다.(말라 3, 1~5; 즈가 14, 20~21) 예수님은 모든 민족이 함께 모여 기도할 수 있는 성전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시는 메시아이시다.
성전의 주인으로서 권위 있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탄하는 군중을 보고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 두려움을 느끼고 그분을 없앨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머지않아 예수님께 성전 모독죄가 적용되어 최고의회에서 심문을 받게 될 것이다.(마르 14, 58)
말라버린 무화과나무와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 (20~25절)
다시 이야기는 무화과나무 사건을 상기시키면서 신앙과 기도와 용서의 위력에 대한 가르침과 연결된다. 각각 따로 전해져 오던 예수님의 토막 말씀(단절어) 셋(22b~23, 24절, 25절)이, 22b~23절과 24절은 ‘믿다’라는 동사로 연결되고, 24절과 25절은 ‘기도하다’는 동사로 연결되고, 25절에서는 ‘용서하다’는 동사로 연결되어, 신앙과 기도와 용서의‘위력’이 얼마나 큰지를 나타내는 연쇄어 구문을 만들어 준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마음 속의 의심을 몰아내고 하느님께 전적인 신뢰를 가능하게 한다. 기도는 이 신앙의 표현으로써, 기도하며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하느님의 용서를 체험한 사람만이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을 갖게 되며, 기도할 때만이 우리는 이웃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의 위력으로 뿌리째 말라버리는 것처럼 하느님을 등지고 불신하는 이스라엘은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6년 9월 10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3. 예루살렘에서의 논쟁 (마르 11, 27~12, 44)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 활동지역이었던 갈릴래아에서 적수들과 논쟁을 벌였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2, 1~3, 6)
이제 공생활 후기에 속하는 예루살렘에서의 초기 활동 안에서도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과 벌이는 논쟁과 대담 다섯 가지와 한 가지 비유가 전해진다. (11, 27~12, 37)
예수님 권한에 대한 논쟁을 시작으로(11, 27~33) 포도원 소작인들의 비유(12, 1~12) 주민세에 대한 대담(12, 13~17) 부활에 대한 논쟁(12, 18~27) 첫째 가는 계명에 대한 대담(12, 28~34) 다윗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12, 35~37)이 나오고, 이어서 율사들을 조심하라는 충고(12, 38~40)와 가난한 과부의 헌금(12, 41~44)과 관련된 말씀이 전해진다.
예수님의 권한 논쟁 (11, 27~33)
예수님께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시비를 걸어온다. 이들은 앞으로 예수님을 처형하는데 앞장 설 최고의회 의원들로 예루살렘 성전 신심을 대표하는 종교지도자들이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성전의 제사들을 통하여 죄의 용서를 베풀어 주신다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하였으며, 누가 그 권한을 주었느냐고 따져 묻는다.(28절) 예수님의 행동은 성전에 대한 전권(全權)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곧바로 답하지 않으시고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인지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를 묻는다.(29~30절) 예수님의 활동은 세례자 요한의 대중적인 참회운동과 노선이 같은 것으로, 방법면에 차이는 있었지만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죄의 회개와 믿음을 촉구함으로써 하느님의 심판에 대비하도록 한 것이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성전 중심의 종교 생활이 아니라 역동적인 ‘하느님의 다스림’을 선포하고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도록 초대하였다.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그들이 빠진 모순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대답을 회피할 수밖에 없다.(31~33a절) 그들은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포도원 소작인들의 비유 (12, 1~12)
수석사제와 율법학자와 원로들에 대한 비판의 말씀이 이번에는 비유 말씀으로 소개되어,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마음이 완고한 백성에게는 깨달음이 없다는 것을 상기시킨다.(이사 6, 9~10; 마르 4, 11~12; 8, 18)
포도원 소작인들의 이야기는 엄밀히 비유라기보다 우화라고 할 수 있겠는데, 비유 양식이 한 가지 뜻을 전하기 위해 일상적인 소재로 자연스럽게 꾸며지는 이야기인데 비해, 우화는 여러 가지 뜻을 전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꾸며져 이야기의 흐름이 매우 어색하다.
어떤 포도밭 주인이 소작인들에게 세를 놓고 멀리 떠났는데, 포도 철이 되어 도조를 받으려고 여러 차례 종을 보낸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매질하거나 상처를 입히고 모욕을 주고 죽이기까지 한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상속자인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게 되는데 사악한 소작인들이 아들마저 죽이고 말았으니 그 주인이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라는 이야기다.(12, 1~9)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사 안에서 예수님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상기하게 된다. 하느님(=포도밭 주인)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예언자들(=종들)을 보냈으나 이스라엘 지도자들(=악한 소작인들)이 이들을 함부로 대하여 고통을 당하거나 숨지게 하였고, 마침내 예수님(=사랑하는 아들)을 보냈으나 그마저 죽게 하였으니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심판하시고, 하느님 백성(=포도밭)을 교회(=다른 사람들)에 맡기시겠다는 말이다.
포도원 소작인들의 비유 이야기에 첨가된 성서 인용구(시편 118, 22~23)도 같은 맥락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집 짓는 이들(=이스라엘 백성과 그 지도자들)이 내버린 돌(=십자가의 예수님)처럼 버림 받고 죽게 되겠지만, 하느님의 구원 섭리로 모퉁이(=새로운 구원공동체)의 머릿돌(=부활하신 그리스도)이 되셔서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이끌어 가시리라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비유의 말씀들이 자기들을 향한 단죄의 말씀임을 알아차리고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하지만 군중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그대로 두고 떠나간다.(12절) [가톨릭신문, 2006년 9월 17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황제에게 바치는 주민세에 대한 대담(12, 13~17)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르 12, 17).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어쩌면 이렇게 멋진 답을 하실 수 있었는지 예수님의 지혜에 감탄하게 된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이번에도 예수님께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을 시켜 질문을 하게 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한껏 치켜세운 후,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하는지 바치지 말아야 하는지 묻는다.(14절)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을 간파하시고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15b절)며 정곡을 찌르신다. 그 질문에는 함정이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식민 통치자인 로마제국에 주민세(인두세)를, 그것도 꼭 로마 은화 데나리온으로 바쳐야 했는데, 화폐 한쪽에는 황제의 흉상과 함께 “티베리우스 황제, 신적인 아우구스투스(황제의 존칭)의 아들 아우구스투스”란 말이 새겨져 있었다.
한편 로마 황제의 통치를 반대하던 사람들이 서기 6년 갈릴래아 출신 유다를 중심으로 열혈당을 결성하여 납세 거부 운동을 일으키고 하느님의 통치를 이룩하려고 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주민세를 바쳐야 한다고 대답하신다면 민족 배반자로 낙인찍힐 수가 있었고, 주민세를 바쳐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신다면 로마제국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로 당장 고발당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며 유다인이 처한 정치적 현실을 분명하게 인식시키신다. 유다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화폐에 황제의 흉상이 새겨졌기 때문에 ‘황제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은화를 황제에게 바쳐 마땅하다. 이로써, 황제의 권력은 유한하고 상대적이라는 뜻이 은연중에 표현된다. 그러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17b절)는 말씀은 절대적인 하느님의 주권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이 대목은 무엇을 ‘하느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구체적인 실천을 달리할 수 있다.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인간은(창세 1, 27)은 ‘하느님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르 12, 30)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황제에 대한 충성과 하느님께 대한 충성은 절대적으로 차원을 달리한다.
부활에 대한 논쟁(12, 18~27)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부활에 대한 논쟁을 걸어온다. 복음서에서는 주로 바리사이와의 논쟁이 나오는데, 부활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바리사이들도 부활을 믿고 있었기에 예외적으로 사두가이와의 논쟁이 다루어진다.
사두가이들은 모세오경만 성경으로 인정하였기에 죽은이들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부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수혼법(嫂婚法)을 논거로(신명 25 ,5~10) 일곱 형제가 한 여자와 혼인하였다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것이냐고 묻는다.(19~23절) 후사(後嗣) 없이 남편이 죽으면 시동생과 혼인하여 대를 잇는 관습이 있었던 이스라엘의 수혼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현대의 독자들은 그 예가 좀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실은 우리도 종종 이와 비슷한 질문을 하게 된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부모님 나이보다 훨씬 늙은 모습의 나를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나?’ 혹은 ‘재혼한 경우 이전의 배우자와 어떤 관계로 만나게 될까’ 하는 등등. “사람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25절)
우리 중에 아무도 부활을 체험한 사람은 없지만, 부활 후의 세상은 이승의 연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세상이 될 것임에 틀림 없다. 더 이상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천사와 같은 영적 존재가 될 터이니 이 세상에서의 존재방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12, 26b~27)라는 말씀을 상기시킴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영원하신 분, 인간과의 계약에 충실하신 분이심을 선언한다.
그분을 섬긴 믿음의 성조들은 하느님과 함께 이미 하늘에서 복된 삶을 누리고 계실 것이고 장차 부활해서는 더욱 복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영원히 살아 계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삶을 믿는다. 바로 이것이 부활신앙이 아니겠는가? [가톨릭신문, 2006년 9월 24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첫째 가는 계명(마르 12, 28~34)
우리는 앞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후 종교지도자들과 논쟁을 벌이신 장면을 보아왔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하여(11, 27~33),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은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에 대하여(12, 13~17), 사두가이들은 ‘부활’에 대하여(12, 18~27) 논쟁을 걸어왔다.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리기 위한 것이었으나 결말은 한결같이 예수님의 승리로 끝난다.
이제 율법 학자의 질문으로 논쟁은 모두 끝이 나는데(12, 34b절) 그는 지금까지의 과정을 쭉 지켜본 증인의 역할을 하며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께 호의를 보인다.(12, 28a절) 그의 질문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당시 유다 땅에서는 모두 613개의 계명이 통용되고 있었는데, 그 중 248개는 단순명령이고 365개는 금지명령이었다.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6장 4~5절을 인용하여 대답하신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29~30절)
유다인들이 매일 아침과 저녁에 바쳤던 이 신앙 고백문에는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분만을 섬기겠다는 믿음이 담겨 있다.
특히 헬라 지역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살면서 유일신 신앙을 다짐하였는데, ‘마음(감성)과 목숨(생명)과 정신(이성)과 힘(능력)’을 다하여, 곧 ‘전존재’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31절)
첫째 가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둘째는 이것이다”라고 답변하는 것은 분명 어색한 일이지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별할 수 없는 하나의 계명으로 보고 있음을 시사한다.
레위기 19장 18절에서 따온 이 계명은 사람이 사회적인 관계에서 취해야 할 자세를 종교적인 차원으로 정의 내리고 있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밖에 다른 이가 없다’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32~33절)
예수님의 대답에 맞장구를 치는 율법 학자의 말은 언뜻 보기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반복하는 듯하지만 이번에는 신명 4, 35을 인용하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한 문장에 넣음으로써 두 가지 계명을 좀더 분명하게 하나로 만든다.
또 하나의 특징은 사랑이 제물보다 낫다고 말함으로써 종교의식에 대한 비판을 덧붙인다.
모든 제사의식보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사상은 구약성경에서도 흔히 발견되는데, 이 대목에서 다시 한번 ‘사랑’이 핵심적인 것이고 ‘제사’가 주변적인 것임을 확인시킨다.
이로써 유다교식 제사와 그리스도교식 사랑의 가르침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중요한지 논쟁이 펼쳐졌던 헬라 유다계 그리스도 교회의 입장을 드러낸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충실히 실천하면 굳이 유다교식 제사를 바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a절)라고 파격적인 칭찬의 말씀을 하신다.
이제까지 토론의 주제가 율법이었는데 갑자기 하느님 나라가 등장한 것은, 예수님 자신이 율법(토라)보다 뛰어난 존재로서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통해 이 세상에 힘차게 뚫고 들어온 하느님의 주권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 나라는 율법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유다 땅에서 활동하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느냐는 문제이다.
이제 예수님은 더 이상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성전에서 가르치시게 된다.(35, 38절) [가톨릭신문, 2006년 10월 1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다윗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마르 12, 35~37)
메시아(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아들)에 대한 논의가 성경 해석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35절)
앞서 종교지도자들과의 논쟁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문제를 제기하시고 스스로 그에 대한 답을 주신다. 예수님의 논지는 그리스도가 다윗보다 우월하신 분인데, 어떻게 그분을 ‘다윗의 아들’이라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 의하면 메시아는 다윗의 아들이시다.(2사무 7, 12~14; 이사 11, 1; 예레 23, 5; 에제 34, 23; 37, 24) 그러나 예수 메시아는 다윗의 아들 이상이시다. ‘다윗의 자손(아들)’이라는 존칭은 이승의 예수님을 가리키는 데는 그런대로 알맞지만 부활하여 성부께로 가신 예수님을 가리키기에는 불충분하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율법학자의 견해를 반박하기 위해 다윗이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찬양한 시편의 노래를 상기시킨다.(시편 110, 1)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36절)
이는 시편의 저자로 알려진 다윗왕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메시아가 하느님의 오른쪽에 좌정하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이로써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신원과 정체가 확인된다. 그분은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주님이신 분, 곧 ‘하느님의 아들’이시다.(사도 2, 33~36; 로마 1, 3~4절)
율법 학자들의 위선에 대한 비판(12, 38~40)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라고 당부하시며 그들의 행동을 비판하시는 말씀을 들으면, 어찌나 구체적이고 신랄한지 도무지 피해갈 여지가 없다.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즐기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39절)
혹시 우리의 처지가 이런 모양새는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 같다. 당시 율법 학자들은 기도를 하거나 판결을 내릴 때 긴 예복을 입었는데 경건해 보이려고 다른 사람보다 성구갑도 넓게 만들고 옷단의 술도 길게 늘어뜨리고 다녔다고 한다.(마태 23, 5) 옷매무새가 마음의 상태를 표현한다고는 하지만, 마음이 딴 데 있으니 안팎이 다를 수밖에 없다. 백성들을 위해 봉사하기보다 그들에게 대접받으려는 그들의 명예욕이 훤히 드러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40절)
과부는 가난한 이를 대표한다. 지도자들이 가난한 이를 돌보는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난한 이들의 재산을 등쳐먹는 행위가 된다.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돌봐야 하는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서 경건한 체 기도만 길게 한다면 그것은 위선이다. 율법학자들의 위선적인 태도가 거짓 신앙인의 표본으로 제시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들의 책임이 더 큰 만큼 그들에 대한 단죄 또한 엄중할 것이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12, 41~44)
예수님께서 군중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양을 보고 계시다가 가난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을 불러 그녀의 선행을 칭찬하신다.
렙톤은 그리스 돈 가운데 최소단위 동전으로 보잘것없는 액수였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이스라엘 여자들이 모이는 ‘여자 구역’이 따로 있었고 거기에 헌금함 열 세 개가 놓여 있었다. 헌금은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그분께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지 않은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43~44절)
가난한 과부의 관대한 마음이 앞서 율법 학자들의 위선적인 태도와 크게 대조를 보인다. 가난한 과부의 선행이 제자들을 위한 특수교육으로 제시되는 것은 그녀가 참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0절)는 계명을 누구보다 철저히 실천함으로써 제자 됨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 추종은 어떤 보상이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께 속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가톨릭신문, 2006년 10월 15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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