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잠언: 구체적 내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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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0-07-26 | 조회수6,410 | 추천수2 | |
[김혜윤 수녀의 성서말씀나누기] 잠언 (5-20) : 구체적 내용 (1-16)
‘지혜의 근원이 야훼임을 명시’
더 이상 맘에 남아있지 않은데 중요한 순간에 항상 기억되고,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 있다. 내 안에 삶의 진리로 각인된 소중한 체험들이 그런 것들이다. 잠언은 평범한 듯 하지만 치밀하고, 단순하고 차분한 듯하지만 의외의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잠언을 만들어온 현인들의 소중한 체험이 절대적 진리로 녹아있기 때문이다. 이번 주부터는 이러한 잠언의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접근해보기로 한다.
1~9장(책의 시작과 지혜시)
이미 강조된 바 있듯이, 잠언 1~9장은 다른 부분에 비하여 비교적 체계적이고 신학적인 내용으로 되어있다. 책 전체의 서론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이 부분은, ① 표제(1, 1) → ② 시작하는 말 (1, 2~7) → ③ 지혜시(1, 8~9, 18)의 삼 단계 구성을 보여준다.
표제(1, 1)
표제는 이 책 전체의 저자를 『이스라엘의 임금,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1열왕 4, 29~34에 의하면 솔로몬이 3000개의 잠언을 지었다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러한 이스라엘의 고유 전통이 잠언의 저자를 솔로몬으로 상정케 한 것이라 추정된다. 그러나 이미 입문에서 언급한 바대로, 잠언의 저자 문제는 매우 복잡하고 다층적인 내막을 품고 있기에 단순한 규정이 불가능하다고 해야한다.
시작하는 말(1, 2~7)
표제에 이어, 이 책 전체의 편찬 동기와 목적이 제시된다(2~4절). 「지혜와 교훈을 터득하고」, 「정직함을 얻으며」, 「현명을 베풀기 위한 것」을 잠언집의 목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이 부분의 마지막 구절(1, 7)은 잠언집 전체의 구심점이라 할 수 있는 구절인데, 모든 「지혜의 근원」을 밝히고 있다.
『야훼를 경외함은 지혜의 근원이며, 미련한 자들은 지혜와 교훈을 업신여긴다』(1, 7).
이러한 잠언 1, 7은 모든 지혜와 인식, 판단의 근거를 하느님에 두는 일종의 신학적 고백이며, 앞으로 전개될 잠언집의 모든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고 하겠다.
지혜시(1, 8~9, 18)
이어 등장하는 지혜시는 지혜로운 삶에 대한 일종의 「교훈 모음」이다. 이 지혜시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① 지혜의 기원과 의인화에 대한 담화(1, 20~33) ② 여러 주제들(악인들과 낯선 여인들, 게으름과 간음에 대한 경고 등: 1, 8~19; 2, 1~9, 18)에 대한 가르침이 그것이다. 다양한 주제가 거론되는 것으로 보아, 이 부분은 일관된 제작과정을 거치지 않고, 여러 시대와 상황, 장소, 사건 속에 점차 형성된 모음집임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1, 7에서 고백되었던 지혜의 근원이 9, 10에 다시 한번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혜의 시작은 야훼를 경외하는 것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깨달음이다』(9, 10).
각각의 교훈들에 대한 내용들 소개는 다음 주에 이어지게 된다.
하느님을 두려워함이란?
지혜의 근본이라고 제시된 「주님께 대한 두려움」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두려움, 공포와는 분명한 차이를 둔다. 하느님을 모든 시간과 공간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주인으로 분명히 인식하기에, 내 삶의 순간 순간을 모두 그분께 의탁하고 순응하겠다는 신학적 자세가 바로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도전과 패기를 미덕으로 삼고, 「지혜」보다는 「지능」을 앞세우는 현대인들에게, 잠언의 이러한 주제는 왠지 수동적이고 맥풀린 자세로 여겨질 수 있겠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삶의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용기는, 그리고 삶의 이치와 진실을 들여다 본 자 만이 가질 수 있는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은, 결코 하느님을 거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음을 깨달을 때 지혜로운 삶은 시작된다.
그러므로, 「쓸모 없는 삶이란 없다」고 하지만,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쓸모 없는 삶이란 분명히 존재한다」. 하느님 두려운 줄 모르고 살아갈 때, 자신의 진실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한번도 귀 기울인 적 없을 때, 그 삶은, 냉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감히 쓸모 없는 삶이라 해도 무방한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4년 3월 7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고통’은 하느님의 또 다른 사랑
원고 준비를 위해 잠언을 다시 읽으면서, 새삼 성서에서 잠언만큼 읽기에 부담 없는 책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우 평이하면서도 직설적인 어조로 되어있고, 삶의 순간 순간을 제대로 살아내기 위한 대안들이 너무도 쉽게 제시되어있기 때문이다. 지난주부터 시작된 서론 부분(1~9장) 고찰을 계속하고자 한다. 잠언의 본문을 함께 읽으면서 따라와 준다면, 이하 소개될 글이 훨씬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가르침
악인들을 조심함(1,8~19)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교훈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부분은 『내 아들아』라는 호칭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특유의 도입구문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지역의 교훈문헌 안에 자주 발견되는 형식인데, 이로써 지혜운동이 시발된 자리가 「가정」이라는 가설이 증명되고 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가르침 중 가장 첫 번째로 등장하는 주제는 「죄인들에 대한 경고」이다. 죄인의 길은 피를 흘리게 하거나(11절), 피를 쏟아 붓게 조장하며(16절), 결국 자승자박으로 끝날 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8~19절).
지혜의 호소(1,20~33)
이어서 등장하는 부분은 첫 번째와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되어있다. 아버지가 주는 교훈 대신 지혜가 의인화되어 등장하기 때문이다. 즉, 지혜가 사람처럼 하나의 인격적 존재가 되어, 자신을 외면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지혜에 대한 의인화는 당시의 현자들에 의해 창안된 특수한 문학적 장치라고 볼 수 있는데, 진리 혹은 지혜를 인격적 존재로 설정함으로써, 그 어떤 문체나 장르보다 역동적으로, 지혜를 「살아있는 것」으로 제시하는 효과를 준다.
사무라이에게 칼은 일종의 「의인화된 또 다른 자아」라는 표현을 읽은 적이 있다. 비단 사무라이뿐일까. 지향하는 일을 제대로 달성하기 위해 무엇보다 요청되는 것은, 마주해야할 사건 혹은 사물 안에 나의 의식을 통합적으로 투영시키는 작업일 것이다. 주체와 대상을 분리하지 않고, 그 대상을 또 다른 자아로 인격화시키는 것, 잠언이 가르치는 최고의 성과를 얻기 위한 기본적 지침이라 하겠다.
두 번째 가르침
지혜의 결실(2,1~22)
이제 어조는 다시 아버지의 권고 형식으로 환원된다. 이 두 번째 가르침은 지혜를 추구함으로써 얻게되는 결과를 제시하고 있다.
그 내용은 대략 두 가지로 정리되는데 1) 하느님께 대한 경외와 2) 삶에 대한 보장이 그것이다.
즉 지혜를 찾는 대가로 아들은 하느님께 대한 경외를 알게되고(2,5), 이를 통해 축복이 내려진다(7~22절). 하느님은 지혜를 추구하여 당신을 경외하는 법을 깨달은 이에게 그의 삶을 도와주시고(7절), 행로를 보살피신다(8절). 현명함과 슬기가 그를 지키고(11절) 사악한 친구들로부터 구하시며(12~15절), 『반지르르한 말을 하는 낯선 여자에게서 그를 구하신다』(16~19절). 낯선 여자에 대한 경고는 단순히 문자적 의미를 넘어서서 보다 광범위한 기능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즉 낯선 여인이란, 그들에게 익숙해온 하느님의 길과 상치되는 제반 모든 것을 의미한다. 낯설고 어색해 경계심을 유발시키지만 동시에 넋을 온통 빼앗아버릴 정도의 호기심을 갖게하는 모든 사물, 사람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가르침
지혜와 주님께의 경외(3,1~12)
다시 『내 아들아』로 시작된 세 번째 가르침은 하느님의 계명을 『목에 묶고 마음에 새길 것』(3,3)을 강조한다. 하느님을 경외할 때만이 몸이 치유되고 활력을 얻기 때문이며(7~8절), 모든 재물과 소출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때에 재화의 축복이 주어지기 때문이다(9~10절). 지난번에 살펴본 욥기의 신학과 같이, 잠언에서도 하느님이 주시는 고통은 바로 인간에 대한 또 다른 사랑임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늘 옆에 있기에 잊기 쉬운 것들
늘 곁에 있기에 그 존재를 인식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공기, 물, 가족, 잠언이 말하는 지혜가 바로 그런 것들이다. 삶이 권태롭거나 무미건조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지혜, 행복, 사랑이 내 곁을 떠나서가 아니라 내가 그것에 너무 익숙해져 쉽게 만나지 못하는 탓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건 결국 소중한 것과 작별한 이후라는 것, 삶이 가지는 또 하나의 한계이며 비극은 아닐는지…. [가톨릭신문, 2004년 3월 14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지혜 찾음’이 곧 행복인 이유 제시
언젠가 다른 지면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독자들을 위해 다시 한번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스도교는 일반사회에서 통용되는 의식과 관습의 매력과 한계를 직시하고, 이를 역행함으로써 구원과 해방을 제시하는 종교이다. 예를 들어, 세속사회의 패러다임에 의한다면 「뱁새는 황새를 따라가야」만 한다. 뱁새는 뱁새라는 구차한 자신의 배경과 본질에서 치열하게 빠져나와 주변인들로부터 사랑과 칭송을 받는 환상적 존재, 즉 황새가 되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물질지상주의, 외모지상주의라는, 일종의 「자생적 사대주의」가 일종의 「트렌드」로 인식되고 있는 우리 사회는 이러한 잘못된 허상을, 보장된 삶을 살기 위한 가장 안전한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고등종교는 뱁새가 어느 날 갑자기 황새가 되는 기적과 요행을 부추기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는 오히려 뱁새는 뱁새대로 황새는 황새대로 자신의 본질을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행복과 현재적 처지를 연대시키는 가장 합리적 길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지혜문학 잠언이 지향하는 지혜와 행복은 이러한 관점과 맥을 같이 한다. 자신의 고유성을 실현시키는 것에서부터 구원과 행복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 가르침(3,13~26)
『행복하여라』라는 특수 구문으로 시작하는 이 가르침은 지혜와 슬기를 찾은 사람의 행복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행복하여라』(히브리어: 아쉐레 / 그리스어: 마카리오스)로 시작되는 양식은 이미 고대 근동에서 자주 사용되던 특수 양식으로 구약성서 뿐 아니라 신약성서에서도 가끔 등장하는 문형이다(마태 5장 산상설교 참조). 본문은 지혜와 슬기가 은이나 순금, 산호보다 좋고, 그 어떠한 귀중품에도 비길 수 없음을 표명한다(14~15절). 본문은 계속하여 지혜를 찾음이 행복인 이유를 제시하는데(16~20절), 21절에서는 다시 『내 아들아』라는 호칭을 적용함으로써 주위를 환기시키고, 이어 신중함과 현명함에 대한 권면을 부각시킨다. 신중함과 현명함은 영혼에 생명이 되고 목숨을 아름답게 하며(22절), 안심하고 인생을 살 수 있게 한다.
더욱이 지혜를 찾은 이는 『갑작스러운 공포 앞에서도』, 『파멸 앞에서도』(25절)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데, 주님께서 그들의 보증인이 되시어 온갖 덫에서 구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26절).
다섯 번째 가르침(3,27~35)
이어지는 가르침은 『~하지 말라』는 표현을 연속적으로 사용함으로써(27~31절), 윤리적으로 하지 말아야할 행위의 목록을 제시하고 있다. 타인에게 선행 베풀기를 거절하지 말 것(27절),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핑계를 대지 말 것(28절), 남에게 악을 조장하지 말 것(29절), 나 자신에게 치명적 악을 가하지 않았다면 구태여 다투지 말 것(30절), 간사하고 악하게 성공하는 이들을 부러워하지 말 것(31절) 등이다. 이러한 금령 다음에는 왜 그런 일들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가 제시된다(32~35절). 주님은 내가 타인에게 한 그대로 내게 하신다는 표현이 눈에 띈다(34절).
여섯 번째 가르침(4,1~9)
『아들들아』라는 복수형 호칭으로 시작된 이 부분은 잠언 1~9장 중에서, 가르침이 전수된 자리가 「가정」임을 가장 명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곳이다. 아버지 역시 그의 아버지로부터 가르침의 내용을 전수 받았음이 분명히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1~4절). 이러한 전통성에 대한 제시는, 그 다음에 강조되고 있는 내용의 권위와 정당성을 부각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제시되는 가르침의 내용은 지혜가 가지는 특성에 대한 것으로, 앞에서 제시된 가르침들 안에서 이미 표현된 것(5~9절)들과 비슷한 내용으로 되어있다.
부모가 전해주어야 할 유산
『내 아들아』로 시작하는 잠언의 내용이 굳이 아니라 하더라도, 부모가 전해주어야 할 진정한 유산은 돈, 명예, 배경이 아니라, 그 무엇도 대신해줄 수 없는 믿음과 사랑임을 우리 모두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치열한 경쟁 구도 안에서 그래도 우리가 인간 본연의 긍정을 잃지 않고 삶을 추스르고자 하는 건, 부모님이 주셨던 그 사랑에 대한 기억 때문은 아닐는지….
어머니의 사랑을 잘 표현한 글이 있어 여기에 옮겨본다.
『너를 갖기도 전에 너를 원했단다. 네가 태어나기 전에도 너를 사랑했어. 네가 태어나기 한 시간 전에도 너를 위해 죽을 수 있었단다. 그건 기적이야』(모린 호킨스 Maureen Hawkins). [가톨릭신문, 2004년 3월 21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내 것의 소중함’에 대해 가르쳐
내 연구실을 방문하는 분들을 살펴보면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남성들은 책장에 처음 눈길을 주는 반면, 여자 분들은 소파의 등걸이나 찻잔이 예쁘다는 말을 건넨다. 어느 쪽이 우월한가는 결코 평가할 수 없다. 다만 서로의 성(性)을 초월하여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있으니 그건, 「타자성에 대한 단순한 이끌림 혹은 매력」인 것 같다. 즉, 내 것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 근사해 보이는 현상 말이다. 필자의 방에는 특별히 예쁘거나 멋지다 할 수 있는 사물이, 도무지 없기에 하는 이야기다. 이번 주에 살펴볼 잠언의 가르침은 「내 것의 소중함」에 대한 메시지를 자세히 전해주고 있다.
일곱 번째 가르침(4,10~27)
예의 『내 아들아』라는 호칭으로 시작된 일곱 번째 가르침은 선인의 길(11~13절)과 악인의 길(14~19절)을 대조시켜 놓음으로써 피교육자 스스로에게 자발적 선택을 촉구한다. 이러한 양극적 대비와 선택에로의 촉구는 지혜문학 작품 안에 자주 발견되는 주제이다. 20~27절에는 신체 각 부분이 지켜야할 덕목들이 제시되는데, 혹시 성서 본문을 읽지 않고 따라오는 독자가 계시다면, 잠언 4,23~27만은 반드시 읽어볼 것을 권고한다. 우리 행동이 어떠해야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지가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네 마음을 지켜라』(23절)라는 표현에서 『마음』이란 히브리어 「레브」에 해당되는 말로서, 이성적이고 감성적인 결단이 이루어지는 신체부위를 말한다. 쉽게 표현하여, 「레브」는 「내적 인간」 혹은 「본인의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저자는 『속이는 말』, 『왜곡된 말』(24절)을 하지 말 것을 당부함으로써, 진심이 아니면 이야기하지 말라는, 즉 말하는 것도 자신의 마음을 지키면서 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마지막에는 『네 발이…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말게』(27절)하라는 표현을 통해 「중용」의 덕을 또한 부각시키고 있다.
여덟 번째 가르침(5,1~23)
이어 아버지는 「낯선 여인」에 대하여 경고한다. 이 주제는 이미 2,16~19에 등장한 바 있지만, 여기서는 더욱 구체화된 내용을 볼 수 있다. 『낯선 여자의 입술은 꿀을 흘리고, 그 입속은 기름보다 매끄럽지만』(5,3), 그 결말은 『쓴 쑥처럼』(4절) 쓰디쓸 뿐이다. 낯선 여자와의 관계를 경계해야하는 이유를 본문은, 명예를 손상당하거나, 헛된 삶을 살아 마지막 순간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설명하고 있다(9~14절). 이어 저자는, 낯선 여인의 덫에 걸리지 않을 대안을 제시한다. 방법은 간단하다. 젊은 시절 아내에 대한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다(15~23절). 아내는 『우물』이고 『샘』이며(15절), 언제나 스스로를 흡족케 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19절). 『우물』과 『샘』이 생존을 위한 절대성을 은유하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여러 주제들(6,1~19)
이어지는 부분은 여러 주제들의 혼합으로 형성되어있다. 먼저 「보증이 주는 위험」이 제시된다(6,1~5). 잠언은 보증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그것은 올가미에 말려드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3절). 두 번째 주제는 「게으름에 대한 경고」로써(6~11절), 게으름의 결과는 「가난」뿐임을 명시하고 있다. 이어서 『쓸모 없고, 간악한 사람』이란 곧 거짓을 일삼는 사람임을 밝히고, 그의 비참한 최후를 서술한다(12~15절). 다음에는 「숫자 잠언」이라는 본문이 등장하는데(16~19절), 이는 고대 근동 문학 작품들 안에서 종종 발견되는 특수 문형이다. 그 형식은 간단하다. 먼저 어떤 숫자가 제시되고, 이 보다 하나 더 많은 숫자가 다음 구절에 등장하며, 이어 그 숫자에 해당되는 내용이 제시된다. 잠언 6,16~19에서는 「여섯」이라는 숫자가 제시되고 이어 「일곱」이라는 숫자가 나온다(16절). 다음에는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일곱 개의 조목이 나열되는데(17~19절), 그 일곱 가지란 거만한 눈, 거짓말하는 혀, 무고한 피를 흘리게 하는 손, 간교한 마음, 악한 일에 앞장서는 다리, 거짓말 퍼뜨리기, 싸움걸기 등이다.
자신의 진심을 지키고 있는가?
「내 진심을 지켜주기」는, 낯선 여인에게 현혹되지 않는 지혜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선 자신에게, 그리고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자신의 소중한 진심(마음)을 보여줄 때 결과적으로 내 삶에 대한 프라이드도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까이 있을 때 잘하기, 그 어떤 처세보다 톡톡히 실속을 챙길 수 있는, 야무지고 탁월한 지혜일지도 모르겠다. [가톨릭신문, 2004년 3월 28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자신을 망치는 과오인 ‘간음’
결혼이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하나의 「의미」가 됨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제도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찌 결혼뿐이랴. 모든 관계가 다 그럴 수 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그」(혹은 「그녀」)가 내 삶과 인생에 들어와 커다란 「의미」가 된 순간, 만남과 관계가 정식으로 시작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관계 안에서라면 그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 자체로서 「의미」이며, 내 삶을 맑고 깊게 하는 「힘」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삶을 살다가 행여 상대가 더 이상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니라 느껴진다면, 그를 탓하기 이전에, 지금까지 스스로를 속여왔던 거짓 사랑과 우정을 반성할 일이다. 이번 주 잠언의 가르침은 「간음」을 주제로 하고있다. 서로에게 「의미」였던 그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그렇게 서로에게 더없이 비열해지는 것, 「간음」을 성서는 어떻게 경고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네 마음에 묶고, 네 목에 감아 두라』(6,2) 라는 간절한 권고로 시작된 아홉 번째 가르침은 「간음」을 경고한다. 『창녀는 빵 한 덩어리로 족하지만 간음녀는 귀중한 생명을 노릴』정도로 위험하고(26절), 간음은 『자신을 망치고자 하는 자』(32절)만이 걸려드는 과오이기 때문이다. 「간음」은 『마음에 불을 안고 다니는 것』 혹은 『숯불 위를 걷는 것』과 같은 것으로, 결국 제 몸이 타고 마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27~28절).
열 번째 가르침은 앞에 제시된 주제를 부차적으로 설명한다. 본문은 낯선 여자의 매혹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비결을, 「누이」인 지혜를 간직하는 것이라고 가르친 후(7,4~5), 한 낯선 여인이 청년을 유혹하는 장면을 소상히 「생중계」(?) 한다(6~23절). 날이 지는 어스름한 저녁, 길가로 나온 여인은 남편이 집에 없음을 암시하는 「능란한 화술」과 「매끄러운 입술」(21절)로 청년을 자기 집에 유인한다.
저자는 이렇게 위험 천만한 상황에 빠져드는 청년을 「도살장을 향하는 소」(22절) 혹은 「그물 속으로 빠져드는 새 같다」(23절)고 묘사한다. 이후 본문은 다시 『내 아들아』라는 호칭으로 주위를 환기시키고 결론부분을 준비한다. 그 여자로 인해 『힘센 자들조차 죽었다』는 사실과, 따라서 낯선 여인의 죽음의 방으로는 절대로 들어서지 말 것을 신중히 당부하는 것으로 가르침은 마무리된다(26~27절).
지금까지 아버지를 통해 전달된 메시지는, 8장에서는 좀 다르게 제시된다. 지혜 자신이 하나의 인격적 존재가 되어(지혜의 의인화), 손수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다. 8장은 매우 조직적인 구성을 보여주는데, 1~11절 / 12~21절 / 22~31절 / 32~36절의 4부분으로 구분되고, 처음 세 부분은 모두 22행, 마지막은 11행으로 맞추어져있다. 22라는 숫자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인데, 22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숫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체계적 구도를 통해 8장은, 낯선 여인의 매끄러운 말에 이끌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참 지혜의 말을 들을 것을 대비하여 부각시키고 있다. 지혜는 목청을 높여(8,3~4) 『마음을 깨칠 것』(5절)을 강조한다. 지혜를 사랑하고 찾아야, 지혜 자신도 사랑을 주고 만나줄 것임을 명시한 후(17~21절), 22~31절에서는 지혜와 창조의 관계(지혜의 「신적 속성」)를 암시한다.
주님은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모든 것의 「맏이」로 지혜를 만드셨고, 창조 때 함께 동반했음이 명시되고, 마지막에는 지혜를 통해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지혜를 놓치는 자는 곧 죽음의 길로 들어선 것임이 비장한 어조로 선포된다(35~36절).
또 하나의 자기 실종, 간음
21세기 한국 사회는 「바람」이 주가를 올리며 시작된 듯하다. 드라마나 영화가 불륜을 다루지 않은 경우가 드물고, 제목만 봐도 「바람」이라는 단어를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불륜을 결혼이라는 제도로부터의 자유로운 해방, 용기 있는 결단 정도로 보는 풍조가 만연하나 본데, 그러나, 그러한 파행의 끝은 해방도 자유도 아님을, 아니 오히려 또 다른 구속의 연속이며 비참한 자기 실종일 뿐임을 급진적 문화 코드 자체도 허무하게 실토하고 있다.
한 사람의 생을 가장 아름답고 설득력 있게 하는 것은 만남에 대한 깊은 이해와 그것을 지키려는 눈물, 기도, 희생, 그런 것들 일 수 있다. 정치, 사회, 가정 모든 분야에 「바람난」 이 시대의 혼란과 무기력함 가운데서, 따뜻함과 위로가 소통되는 진정한 사랑을 기원해 본다. [가톨릭신문, 2004년 4월 4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말이 많으면 실수도 많은 법
일반적으로 시대와 사회를 대표하는 의식은 남성들에 의해 주도된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진리와 이념은, 말이나 이론의 성토가 아니라, 진정한 삶의 소통과 내면적 평화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지식을 참여적으로 완성하는 것은 여성들에 의해 더욱 잘 실천되어온 부분임을 부인할 수 없게된다. 그래서일까. 성서와 고대 근동의 신화들은 한결같이 지혜를 「여성적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 이집트 신화에서 지혜를 대표하는 신으로 등장하는 것은 「마아트」라는 이름의 여신이고, 바빌론 신화 역시 「이슈타르」라는 여신을 지혜의 신으로 소개하고 있다.
히브리어에서도 「지혜」를 의미하는 명사 「호크마」는 여성형으로 되어있고, 대부분의 서양언어 역시 「지혜」에 해당되는 명사를 여성형으로 삼고있다. 이러한 경향은 잠언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는데, 이번 주에 살펴볼 9장은 잠언 전반부(1~9장)의 마지막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지혜를 귀부인으로, 우둔함을 어리석은 여인으로 의인화하여 대조시키고 있다.
9장은, 귀한 신분의 여성으로 의인화된 「지혜」(1~6절)와 어리석은 여자로 의인화된 「우둔함」(13~18절)의 뚜렷한 대조를 통해, 전반부 전체(1~9장)의 결론을 제시한다. 두 여성의 대조적 모습을 통해 독자들이 선택해야할 길을 제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여인들의 모습 사이에는 현인과 빈정꾼이라는, 또 다른 상반된 존재가 소개되고 있는데(7~12절), 그 부분의 가장 중심에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고, 거룩하신 분을 앎이 곧 깨달음』(10절)이라는 표현을 둠으로써, 9장 전체의 핵심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미 첫 부분(1,7)에서 강조된 내용이 결론부분에서 다시금 반복되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잠언의 후반부
잠언 9장의 가르침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잠언 전체의 전반부(1~9장) 내용을 살펴보았다. 전반부가 비교적 체계적 구조를 가지고 서술된 편이라면, 이후 등장하는 후반부(10장~31장)에서는 뚜렷한 주제나 구조가 발견되지 않는다. 나름대로의 독립적 성격을 가진 개별 잠언들이 단순한 형태로 모여 있는 것이다. 대신 10,1; 22,17; 24,23; 25,1; 30,1; 31,1 등에, 각각의 모음집의 제목에 해당되는 표현이 등장함으로써 이 긴 모음집을 구분하고 있다. 예를 들어 10,1은 이후에 등장할 잠언이 솔로몬에 의한 것임을 제시하고 있고, 22,17 이후부터는 여러 현인들의 잠언이 모여져 있음이 제시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후반부 모음집의 첫 순서로 「솔로몬의 첫째 잠언집」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부분은 잠언에서 가장 긴 부분으로, 모두 375개나 되는 개별 잠언들이 등장하고 있다. 특별히 10~15장은 「반의적 대구법」의 형식이 두드러지게 사용되고 있는데, 반면 16장부터는 「동의적 대구법」이 자주 발견된다. 「솔로몬의 잠언집」이라는 제목(10,1)은, 이 부분이 솔로몬의 권위 하에 수집된 잠언집임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려는, 후대 편집의 산물로 볼 수 있다. 이미 입문부문에서 언급된 바 있는 내용이다.
10장
10장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지혜로운 아들」과 「우둔한 아들」의 대조는 이미 서론(1~9장)에서 제시된 주제와(지혜로운 여인과 우둔한 여인)의 연속성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특별히 10장은 의인과 악인, 게으름과 부지런함, 지혜로운 입과 어리석은 입, 미움과 사랑 등 주로 대조적인 주제를 의도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 주제들 중 특별히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입과 혀, 즉 「말」에 대한 것이다(11,19,33절). 말이 많으면 실수도 많음을 각각의 잠언들이 꼼꼼히 가르쳐주고 있다.
가슴이 조각나는 말
무심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심장에는 비수가 되어 꽂힐 때가 있다.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고통이 때로는 혀에 의해 가해질 수 있다는 것, 삶을 살면서 꼭 유의해야할 사항 중의 하나이다. 언어적 폭력이든 물리적 폭력이든, 부당하게 받은 폭력은 그 어떤 위안으로도 치유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가슴을 조각나게 할 말은, 내 가슴이 조각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말을 한 사람도, 말을 들은 사람도, 모두 치명적으로 파괴될 수 있으니. [가톨릭신문, 2004년 4월 11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자녀의 바른 생활’은 부모의 책임
대중을 움직이고 사회를 개혁하는 혁명적 힘보다 더 강한 것은, 어쩌면 「소리내어 울지 않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영화를 보면서이다. 성서학자라는 직업적(?) 관점을 떠나, 단순한 관객이 되어 관람한 이 영화는 「어머니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 영화였다. 그 사랑은 「마음놓고 실컷 울지 못하는 사랑」, 「자식 앞에서는 절대로 소리내어 울지 않는 사랑」이었다. 아들의 수난과 부활을 그대로 간직한 성모님의 사랑으로, 모두가 삶과 현실을 새롭게 시작하는 부활절이길 기원해본다.
지난주에 언급한대로 잠언 10장부터의 내용은, 책상 서랍 안의 두서 없는 사물들처럼 그냥 단순히 모아진 것으로 되어있다. 주제를 잡아 설명하기 매우 어려운 부분이기에, 성서를 읽어가면서, 함께 생각하면 좋을 듯한 내용을 인용하는 것으로 지면을 진행하고자 한다. 단조롭고 지루할까 우려되기도 하지만, 독자들의 인내심을 믿고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해본다.
11장
11장은 일할 때 지켜져야 할 기본적 가치들, 즉 정의, 정직, 겸손 등에 대한 것으로 시작된다. 일종의 직업 윤리를 제시하고 있는 것인데, 「오만은 수치를 결과로 오게 하고, 겸손은 지혜의 산물」임을 제시한 구절이 인상적이다(2절). 3~11절에서는 지금까지 자주 등장했던 선인과 악인의 대조가 「반의적 댓구법」을 통해 제시되고 있다. 특히 4절은 생애 최후의 순간, 평가의 근거로 적용되는 것은 쌓아둔 재물이 아니라 자기 생에 대한 정직성, 의(義)임을 경고한다. 익히 알고 있지만 이내 잊어버리고 마는 삶의 진리를 다시금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상선벌악 주제는 17~31절에서도 계속된다. 특별히 24~25절의 말씀이 눈에 띄는데, 「나눔의 모순」 혹은 「미학」을 잘 전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나누어 주라. 믿을 수 없고, 모순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가진 것을 나누었을 때, 그 나눔을 채우고도 남을 큰 보상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베푼 것만큼 내게 돌아온다」는 부메랑적 법칙은, 성서가 절대적으로 보장하는 삶의 지혜이자 부의 비결인 셈이다.
12장
12장의 초반부에는 이미 언급된 주제들이 다시금 반복되고 있다. 의인과 악인이 대조되고, 훌륭한 아내와 악처가 대조된다. 『훌륭한 아내는 제 남편의 면류관이고, 수치스런 여자는 그 뼈의 염증과 같다』(4절). 지혜로운 부인은 남편에게 면류관을 씌우지만, 어리석은 아내는 남편의 뼈를 갉아먹는 고통스런 존재임이 풍자되고 있는 것이다. 13~23절에는 특별히 「말의 위력」을 부각되고 있다. 지난주에도 언급된 주제로, 혀와 입술은 인체 부위 중 가장 작은 곳이지만, 때로는 더없이 난폭하고 이기적인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18절 참조). 24~28절에는 의인과 악인의 대조가 다시 등장하는데, 특별히 「길」과 「올바름」이 주제적 모티브로 설정되어 있다. 즉 지혜로운 사람은 남에게 바른 길을 제시하고 정의를 실천하게 함으로써, 자신 스스로도 생명의 길을 걷게된다는 것이다.
13장
지혜문학의 일반적 주제 「가르침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된 13장은, 「네페쉬」(혼, 숨)라는 히브리 단어가 반복되는 것으로 2~4절을 구성한다. 의인과 악인(5~6절), 가난한 자와 부자의 대조(7~8절), 가르침에 대한 권고(13~14절)등은 모두 독자들에게 이미 익숙한 주제들이다. 11절에서는 손수 이룩하는 노력만이 긍정적 결과를 가져옴을 강조한다. 음험한 술책과 권모술수는 타인을 속일 수 있을지언정, 자신과 생을 감동시키지는 못한다. 24절은 부모가 지켜야할 「사랑의 패러독스」를 제시한다. 『매를 아끼는 사람은 제 자식을 미워하는 자이고,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은 벌로 다스린다』.
자식들의 「바른 생활」은 부모들이 책임져야할 확고부동한 현실이며 과제이다. 그러니 필요하다면 매를 들 수 있다는 것인데, 다만 조건이 있다. 체벌의 순간, 부모 역시 제 몫의 공포와 두려움을 함께 느껴야 한다는 것! 성모님의 얼굴이 결코 황폐하거나 고독해 보이지 않던 이유는, 부당한 폭력에도, 인간적 분노에도, 침묵할 만큼의 깊고 강한 아들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로서의 운명이 혹여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가짜 엄마(?)처럼 지낸 나의 모성을 반성하고, 온전히 아이와 나를 일치시키는 치열한 사랑에 새로운 총력을 기울여봄은 어떨는지…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기에 적절한, 은총의 부활시기 아닌가. [가톨릭신문, 2004년 4월 18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인간의 실존적 고독 잘 표현
살아있는 이상, 싫어도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기습적으로 찾아오는 「고독」 같은 것이다. 아무리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어도, 요즘 같이 화려한 봄 잔치가 끝없이 되풀이 된다해도, 불현듯 찾아오는 고독 앞에서는 그 누구도 천하무적일 수만은 없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어떤 때는 스스로조차도 자신을 소외시킴으로써, 약을 바짝 올릴 때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외롭게 함으로써, 자신과 말할 수 없이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될 때, 그럴 때는 내 목소리, 얼굴, 미소, 주름, 흉터 그 어느 것 하나도 생소하지 않은 것이 없고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사람은 진심으로 따뜻한 위로가 필요한 나약한 존재일 뿐인 것이다. 이번 주에 살펴볼 잠언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실존적 고독을 잘 표현하고 있는 부분이 등장한다. 14장 전반부에서이다.
14장
등장하는 주제들, 「지혜와 어리석음의 대조」, 「지혜로 집을 짓는다」는 모티브, 「지혜에 대한 여성으로의 의인화」 등은 이미 살펴본 9장과 매우 유사하다. 지혜를 여성으로 의인화하는 장면은 1~9장을 제외하고는 14장에만 등장하는 소재이기에 이들의 관련성에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10절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고, 오직 스스로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인간 본연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어느 것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절대적 고독을 운명으로 지니고 있다는 것인데, 나의 기쁨을 타인이 온전히 함께 해줄 수 없고, 나의 슬픔 역시 타인에 의해 해결될 수 없음을 설득력 있게 표현해 주고 있다. 31절은 착하게 살아야 하는 도덕적 당위의 근거를 신학적 관점에서 정리하고 있다. 약한 이를 향한 폭력은 그 약자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기에 안되는 것이고, 불쌍한 이에 대한 연민은 그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사랑을 보이는 것이기에 그분께 현양이 된다는 것이다.
15장
15장은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볼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잠언들로 가득 차 있다. 필독을 권한다. 15장은 「말」에 대한 주제로 시작된다(1~4절). 말하는 태도는 그 사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일종의 「권력」이요 「힘」일 수 있다. 8절과 9절은 『주님께서 역겨워하신다』는 주제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제사(기도)를 바친다 해도 내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건 하느님을 역겹게 해드리는 행위라고 경고한다. 예를 들어 미사에 참석했다 하더라도, 전례의 참 의미는 간데 없고, 그저 이행해야할 종교적 의무감만을 수행하는 마음으로 했다면, 그건 단지 이기적인 「종교주의」의 한 산물일 뿐임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16~17절에서는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제시한다. 부와 명예를 갖추는 것이 행복의 절대적 조건인줄 알고 있지만, 설혹 그것을 다 갖추었다 해서 행복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과의 일치, 나 자신과의 정직한 조우, 수용, 감사 이런 것들이 없다면, 나는 늘 모든 것과 불편하게 지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8절은 「습관적 분노」에 대하여 경고하고, 19절에는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주요 원인으로 「게으름」을 경고한다. 23절에는 말에 대한 중요성이 다시 강조되고 있는데, 적절한 때와 상황에 알맞은 말 한마디가 얼마나 유용한지를 명시해 준다. 31~33절은 교훈과 훈계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삶의 진리, 즉 교훈을 멀리하는 것은 곧 자신의 삶을 방기하고 포기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일 수 있다. 그렇다면 지혜의 교훈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은 독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주제,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이다. 주님을 경외할 때, 그리고 무엇보다 겸손을 몸과 마음에 지니고 있을 때, 그토록 원하던 것은 이제 성큼 자신 앞에 다가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33절).
자신에 대한 정직한 수용
불안, 의심, 혼돈, 절망 같은, 불행하고 완고한 느낌들은 내가 나 자신을 소외시킬 때 다가온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정직한 수용과 생에 대한 겸손한 태도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비결이요 근본이라 할 수 있다. 나에 대해 가해질 수 있는 모든 매도와 폭력 속에서도,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소외시키지 않을 때, 비로소 나는 내가 누구이며 삶이 무엇인지를 좀 더 분명히 알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는지….
선거가 끝났다. 자신과 낯설고 불편했던 관계를 오래 지속해와서 고단한 얼굴을 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이제 평화 속에 미소지으며 주변의 행복을 수긍할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가톨릭신문, 2004년 4월 25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파멸의 원인은 ‘오만’
워낙 잘 체하는 편인데, 일이 많거나 부담으로 느껴질 때는 더 자주 체한다. 아니, 일 때문에 체하는 것이 아니라, 일에 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주체적 노력이 노동의 진정한 가치일진데, 일 때문에 아프다거나 삶을 팔아야할 때가 있다면, 누구한테 가서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없다. 스스로 자초한 고달픔이기 때문이다. 무조건 최고가 되고자하는 욕심, 그로 인한 완고한 자기 폭력이, 가장 헷갈리는, 그래서 가장 위험한 어리석음임을 이번 주 잠언은 잘 가르쳐주고 있다.
16장
16장은 이전에 등장했던 잠언들과는 현저히 비교되는 주제, 「주님」(야훼)과 「왕」에 대한 내용으로 상당부분을 할애한다(1~15절). 이는 편집자에 의해 의도된 것이라 추정되는데, 「솔로몬 잠언집」의 중간이라는 위치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16장에, 「왕」에 대한 내용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특별히 1~7절은 「야훼 경구」라고도 불리는데, 뚜렷이 야훼라는 이름이 강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1절에서 저자는 인간 지혜의 한계와 이와 대비되는 하느님의 지혜를 대비시킨다. 『마음의 계획은 인간이』하지만, 그 대답은 『주님께로부터 온다』고 명시함으로써, 모든 일의 성패는 전적으로 하느님에 의해 결정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9절도 참조). 이러한 맥락에서 잠언의 저자는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주님께 맡기라』고 권고한다(3~4절). 10~15절에서는 이상적인 통치자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고, 후반부인 16~33절에서는 현명한 행동에 대한 내용이 이어져 있다. 특별히 「분노」와 「짜증」은 지혜를 해치는 가장 위험한 요소임이 제시되어 있다(32절). 「화」는 「화(禍)」인 것이다. 마지막 구절인 33절에는 모든 일의 결과를 결정해주시는 분은 주님이시라는 언급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17장
17장 역시 기발한 내용의 잠언들로 가득 차 있다. 「가정」과 관련된 이야기가 서두에 등장하는데, 매일 잔치가 벌어져 타인의 부러움을 한껏 받는 가정이라 해도, 혐오와 불화가 그 가정의 분위기라면 결코 행복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1절). 지혜로운 처신을 하는 종이 있다면, 바보 같은 아들(상속자)을 제치고서 유산을 물려받는다는 경고도 이어진다(2절). 21~25절에는 우둔한 자식을 둔 부모들의 상심이 표현되어있다. 「우둔함」은 17장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라 할 수 있는데(10, 12, 16, 21, 24절) 특별히 12절은 우둔한 사람과의 만남 자체가 곧 「재앙」임을 명쾌히 표현해 주고있다. 『새끼 잃은 곰과 마주칠지언정 미련함을 고집하는 바보를 만나선 안 된다』는 것이다. 새끼 잃은 곰의 난폭성은 구약성서가 자주 사용하는 모티브이기도 하다(2사무 17,8;아모 5,19).
17절은 친구와 형제의 존재론적 의미를, 동의적 대구법을 통해 제시한다. 『친구란 언제나 사랑해주는 이이고, 형제란 딱한 때에 도우려 태어난 이이다』. 더 많이 사랑하고 도와주는 것이 인간 고유의 본분임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0절에는 행복의 비결이 제시된다. 『마음이 빗나간 자는 행복을 얻을 수 없고 그 혀가 비틀린 자는 불행 속에 빠진다』. 17장의 마지막에는 지혜로울 수 있는 비결이 제시되고 있는데, 잠언이 제시한 해답은 바로 「침묵」이다. 『미련한 자도 잠잠하면 지혜로워 보이고, 입술을 닫고 있으면 슬기로워 보이』기 때문이다(28절).
18장
한 사람이 모든 이로부터 소외되는 원인을 밝혀주는 것으로 18장은 시작된다. 제 욕심만 찾고 충고를 거슬러 싸움을 시작할 때 소외라는 고통은 시작된다(1절). 「어리석음」이란, 이렇듯 자기 생각만을 관철시키려하는 무서운 완고함이며 아집을 말한다(2절). 18장에는 주로 「말」에 대한 주의가 다시 강조되고 있고(4, 6~8, 13, 20~21절 등), 12절은 모든 실패(파멸)의 원인을 규정해주고 있어 주목을 끈다. 실패의 원인은 하나, 「오만」이라는 함정이다.
비극에로의 천착
「재산과 권력이 나를 부유하게 해 주었는가?」와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나?」는 결코 동일한 의미의 질문은 아닐 것이다. 파멸의 원인을 「오만」(18,12), 혹은 「마음의 빗나감」(17,20)으로 분석한 잠언의 가르침처럼, 비뚤어진 욕망과 턱없는 과대망상은 한 사람을 비극에로 천착시킨다. 험한 세상 사는데 도움되는 진정한 힘은, 생에 대한 겸손과 정직이라는 것을, 고통스러웠기에 독하고 이기적일 수밖에 없이 살아온 분들께, 감히, 말씀드리고 싶다. 나 역시 그렇게 살수밖에 없던 시절을 알고 있음을 기억하고 고백하며…. [가톨릭신문, 2004년 5월 2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고통은 ‘악’을 씻어내는 도구
질문을 던져본다. 독자들 중, 삶이 언제나 자기 뜻에 어긋나기만 해왔다고 생각하고 계신 분은 없으신지, 세상은 너무도 잔인하고 혹독하여 온통 숨막히는 어둠일 뿐이라고 여기는 분은 안 계신지…. 혹시 그런 느낌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다면, 슬프고 고단한 운명을 탓하기 전에, 좀 더 자발적으로 자신의 한계와 결점, 의지와 진심을 합의시키지 못한 점을 성찰해봐야 할 것 같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상황은 결코 좋아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힘든 일이 일어났을까? 라는 질문은 타인과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족했던 자기 실체를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던져질 때 비로소 긍정적 가치를 가진다. 이번 주에 살펴볼 잠언 19장은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비굴한 습관을 경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19장
살면서 만나게 되는 좌절과 실패는 결코 누구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한계와 결점 때문에 기인한다. 『인간의 미련함은 제 길을 망치고 그 마음은 도리어 주님께 화를 낸다』(3절). 모든 것을 타인과 하느님의 탓으로 돌리는 어리석음과 비굴함에 대한 경고인 것이다. 5절에는 「말」에 대한 주제가 다시 등장하는데, 거의 동일한 구절이 9절에도 발견된다. 특별히 이 부분은 「거짓말」을 강조하는데, 거짓말은 상대를 옭아맬 뿐 아니라 그 말을 유포시킨 자신을 포박하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승자박인 셈이다.
11~12절은 관대함이 인간의 「식견」과 비례한다고 말한다. 타인의 허물을 묵과해주는 것은 상대를 위한 배려 같지만, 실제로는 용서하는 자에게 더 큰 영광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13~14절은 가정 구성원간의 문제가 거론되고, 이번에는 가장의 고통이 언급된다. 우둔한 아들, 투덜거리는 아내는 더 할 수 없는 재앙이고(13절), 『사려 깊은 아내는 주님께로부터 온다』(14절). 멋진 남편의 비결은 멋진 아내에 있는 것이다. 16절은 안전한 삶이 무엇인지를 다룬다. 언제 어디서고 안전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계명을 지키는 정직한 삶을 살아야하며,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운명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자기 삶을 소홀히 한다는 것은 이미 인생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16절). 원하는 것을 모두 다 이루고 사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소망했기 때문이다(21절). 게으름에 대한 기발한 표현도 눈에 띈다. 『게으름뱅이는 제 손을 그릇 속에 넣고서, 제 입으로 가져가려고도 하지 않는다』(24절).
20장
1절은 술과 독주를 「의인화」 시킴으로써 과음을 경고한다. 3절은 져주는 것이 이기는 것이기에, 싸움은 어리석은 자가 하는 것임을 언급하고 있다. 지혜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 누구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물을 끌어올리는 것이다(5절). 즉, 각자의 진실을 발견하기만 한다면, 인간은 누구나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부모가 올바른 길을 걷고 덕을 쌓을 때, 이 덕의 공이 자손에게까지 미친다는 7절의 가르침은 지혜문학에서 자주 거론되는 교훈이다(14,26도 참조). 10절에 등장하는 「두 개의 저울추와 됫박」은 물건을 살 때 그리고 물건을 팔 때 각각 사용하는 것으로, 결국 속임과 사기는 「주님께 역겨움」이 됨을 명시한다(23절도 참조). 22절과 24절은 무엇을 하건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할 것을 권고한다. 특별히 악(원수)은 우리 자신이 갚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갚으시는 일이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22절의 『…하지 말아라』라는 금지령은, 복수나 보복이 아니라, 온전히 나의 고통을 하느님께 맡기고 의탁하는 일만이 우리가 선택해야할 길임을 가르쳐준다. 마지막 30절은 고통에 대한 지혜문학적 신학을 잘 표현해 준다. 『깊은 상처는 내 악을 씻는 도구가 되고, 매질은 뱃속 깊은 곳을 씻는다』. 우리가 만나는 고통은 내가 무심히 저질러온 「악」을 씻는 고마운 도구이며, 뱃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죄를 씻는데 필요한 유익한 기회라는 것이다.
고통의 재해석
지혜문학이 제시하는 고통의 신학은, 우리 주변에 산재하고 있는 일상의 누추함과 불쾌감을 견디게 하는 능동적 가치이며 비결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시간을 살고있다 해도,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는지를 알고 있다면, 마음을 다해, 그리고 말없이도, 그 시간을 견뎌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신문, 2004년 5월 9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무관심’과 ‘소외’는 죽음의 한 형태
대화를 하다보면 이게 정말 대화일까,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관심을 가지고 상대를 배려하기보다, 각자의 주장에만 급급하고, 자신의 내면을 더욱 황폐하게 드러내게될 때가 바로 그런 때이다. 사실 이런 경우, 대화는 대화가 아니라 그저 우울한 독백일 뿐이요, 무관심으로 무장된 이기적 진술일 뿐이다.
「부조리」극의 대표적 작품으로 1969년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이러한 관점을 잘 제시해주는 작품이다. 두 사람이 번갈아 얘기한다는 의미에서 대화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들의 대사는 모두 섬뜩하게 우울한 독백일 뿐이다. 「무관심」은 이상하게도 내가 소외시킨 상대에게 화살을 꽂지 않고 오히려, 그를 소외시킨 나에게 다가와 철저한 대가를 묻는다. 소외와 고독이라는 비극을 통해 나 자신이 자행한 부조리를 기어이 확인시켜 주고야마는 것이다. 잠언은 21장은 「무관심」과 「소외」야 말로 죽음의 한 형태임을 제시해 주고 있다.
21장
1절은 16,1.9에 언급한 바 있는 왕과 관련된 주제를 다시 제시한다. 더욱이 1~3절은 「야훼 경구」가 등장해서 16장과의 직접적 관련성을 추정하게 한다. 5~6절은 재물을 얻는 방법을 다루는데, 속임수나 조급함은 절대적으로 금물임을 가르쳐준다. 폭력은 폭력을 휘두르는 자, 바로 자기 자신을 휩쓸어가고(7절), 폭력적인 아내와 사는 것은 불행이다. 그녀와 사느니 집에서 가장 외진 방에서 살거나 광야에서 사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것이다(9절; 19절).
빈곤한 이웃에 대한 무관심은, 내게 똑같은 결과를 주는 것으로 대가를 치른다. 내가 빈곤해 졌을 때, 나 역시 무관심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기 때문이다(13절). 성서 잠언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때로는 선물(혹은 뇌물)이 필요할 때가 있음을 시사한다(14절; 잠언 18,16;19,6). 그러나 뇌물이 주는 병폐에 대해서도 잊지 않는데 17,23을 참조할 수 있다. 중심을 일고 「헤매는 것」은 그 자체로 죽음일 수 있다(16절). 지혜로운 사람은 소중해서 지혜로운 군사 하나가 어리석은 용사들로 구성된 군대를 이긴다(22절). 게으름은 곧 자신을 죽이는 독이요(25절), 의인은 베풀고도 아까워하지 않는다(28절). 마지막 부분인 30~31절에서는 다시 「야훼경구」가 등장하는데 이는 21장의 첫 시작과 조화를 이루기 위한 설정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일의 결과는 하느님의 결정에 달렸음이 제시된다. 인간이 아무리 준비한다해도 결정적 승리를 허락하시는 분은 하느님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2장 1~6절
살아가면서 만나게되는 하느님의 경고에 민감한 자들은 지혜로운 자이다. 어리석은 자는 그 경고를 보고도 그저 무심히 지내다 화를 입는다(3절). 사소한 일상에서 하느님의 경고를 읽어내는 분별력을 강조한 이 구절은 27,12에도 반복되고 있고, 14,16에도 비슷한 내용이 소개된다.
5~6절은 「길」이라는 주제로 연결되어 있다. 특별히 어렸을 때 한 아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연습시키는 것은 장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임을 강조한다(15절도 참조). 7절은 돈의 힘에 대해서 언급한다. 9절은 「제 것을 나누는 것」이 곧 「복을 받는 비결」임을 제시한다. 10절은 부정적 태도나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주변에서 멀리할 것을 권고한다. 그래야 「다툼과 수치」가 그친다는 것이다. 11절은 마음과 입의 순결을 지킬 때 돌아오는 품위를 표현해주고 있다. 14절은 낯선 여인의 위험을 다시 제시한다. 1~9장에서 자주 등장했던 이 주제가 솔로몬의 잠언집에서는 여기서만 발견된다.
만들어진 지혜
견디기 힘든 일상, 본의 아니게 폭발하는 히스테리, 다른 삶을 살고만 싶은 부단한 열망, 이런 것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하게되는 삶의 원형들이다. 그런가 하면, 죽기를 작정한 사람처럼, 모든 욕망을 희생하고 주어진 삶에 성실 하려는 노력 역시, 인간이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삶의 축이라 할 수 있다. 삶의 부조리와 불행은, 살아있음 자체가 하느님의 기적적 배려이며 사랑임을 의식하지 못함에서, 혹은 의식했어도 이내 망각하고 마는 데서 비롯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솔로몬의 잠언들은 결코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지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전통적 대의를 근거로 「만들어진」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잠언이 일관적으로 제시하는 메시지(즉,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둠)를 통해, 잃어버린 삶의 중심 때문에 불안하게 자신을 지켜봐야 했던 분들이, 생의 의지를 조금이나마 되찾으셨기를 기원해본다. [가톨릭신문, 2004년 5월 16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꾸지람’과 ‘매’의 필요성 강조
『땅은 생명으로 / 하늘을 간절히 부른다. / 하늘은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한 학생으로부터 받은 「봄비」라는 시의 전문이다. 고통과 상실의 어둠을 정직하게 마주한, 담백한 언어 때문이었을까. 극히 짧은 분량에, 미사여구하나 섞이지 않은 단순한 문장이었지만, 나는 이내 낯설고 길었던 고통의 순간들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딱딱하게 말라가는 자신의 존재를 움켜쥐고 그렇게 간절히 하늘을 부르면, 언젠가 하늘은 그 혹독한 생을 위로하는 감동의 눈물을 흘려주신다는 것, 그런 하느님의 응답을 통해 삶은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 그러므로 하늘을 감동킬만한 진심없이는 생명도, 삶도 없다는 것….
지난주까지 살펴본 솔로몬의 잠언집은 삶의 우여곡절이나 모든 희노애락이 사실은 하느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이해될 때 진정한 의미가 있음을 제시해 주었다. 박탈과 깊은 고독 속에서만 형성되는 삶에의 진정한 투지야말로 하느님의 사랑을 내려오게 하는 신비로운 씨앗이 아닐까.
현인들의 말씀들(잠언 22,17~24,22)
22,17부터는 지난주까지 살펴본 「솔로몬의 잠언집」(10,1~22,16)과 구별되는 새로운 잠언집이 등장한다. 22,17에 등장하는 「현인들의 말씀」이라는 구절이 제목의 기능을 대신하고, 이 잠언집의 마지막 부분은 24,22에서 발견할 수 있다. 24,23에 또 다른 잠언집의 시작을 암시하는 제목(「현인들의 말씀들」)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이 잠언집은(특별히 23,11까지), 이집트의 대표적 지혜문학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아멘-엠-오페」 (Instruction of Amen-em-opet, ANET 421~425)와 매우 비슷한 내용과 구조를 띄고 있어 학자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아멘엠오페 잠언집」은 1922년 이집트 테베(Tebes)에서 발견된 것으로, 프타호테프(Ptah-hotep)의 가르침과 함께, 이집트 고대 교훈문학의 「고전」으로 간주되고 있다. 마치 동양사상을 연구할 때, 공자, 맹자의 저서들을 제쳐두고는 할 수 없듯이, 「아멘엠오페」는 이집트의 사상을 연구하는데 가장 근간이 되는 문헌인 것이다.
22,17~29
22,17~18의 머리말은 아멘엠오페의 머리말과 거의 비슷하다. 우선 교훈문학의 가장 기본적 도입구가 제시되는데, 지혜적 모티브를 각 신체부위와 연결시킨 것이 특징이다(17절; 23,12도 참조). 「귀」는 현자들의 말씀을 듣는데 사용되어야 하고, 「마음」으로는 지혜를 찾아야하며, 「가슴」은 그 지혜를 간직하는데, 그리고 「입술」은 이 지혜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22~23절은 가난하고 나약한 이들에게 가해질 수 있는 폭력을 경고한다. 『빈곤한 이를 강탈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명백하다. 그들이 『빈곤하기』 때문이다(22절). 24~25절에는 화를 잘 내는 사람과 되도록 멀리있을 것을 당부한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 악습에 나도 모르게 『익숙해져, 올가미를 쓰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26~27절에서는 보증서는 일을 경고하고, 지혜로운 자는 언젠가는 그 만큼의 영광을 받을 것임이 약속된다(29절).
23,1~14
23장은 관료적 매너와 예모가 사실은 지혜의 산물임을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윗사람을 대할 때, 가장 기본적으로 전제되는 덕목은 「자제심」과 「비운마음」이다. 윗사람과 함께 할 때 『배가 고프면 목구멍에 칼을 세우는』 자제심이 필요하고, 『그의 진수성찬을 탐내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2~3절). 4절에서는 부자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의 진리를 깨닫는 것임을 동의적 대구법을 통해 제시한다. 『눈길 사나운 자의 빵을 먹지말고 그의 진수성찬을 탐내지 말라』(6절)는 말은 친교를 가장한 거짓 관계의 위험을 경고한다. 그런 사람은 『계산』적인 사람이고, 그의 『마음은 너와 함께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7~8절).
13~14절에서는 잠언이 제시하는 자녀교육 방법이 제시된다. 성서 잠언은 일반적으로 「꾸지람」과 「매」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매로 때려도 죽지는 않기』 때문이며(13절), 매는 『저승에서 그를 구해내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4절).
자녀 교육
소위 「팍스 몽골리카」를 이룩하며 거대한 제국을 이끌었던 징기스칸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내 자손들이 비단옷을 입고 벽돌집에 사는 날, 내 제국은 망할 것이다』. 그는 안위와 풍요야말로 자식들에게 가장 위험한 적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던 지혜로운 아버지였던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녀에게 엄격하기란, 부모가 감당해야할 또 다른 아픔이고 공포일 수 있다. 하지만 진심을 다해, 치열하게 마주해야할,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은 아닐는지. [가톨릭신문, 2004년 5월 23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애주가들이 꼭 읽어야할 부분
컵에 물을 가득 채우고 걸어보자. 쉽게 예상되듯이, 물은 물대로 찰랑거리고, 걷기 또한 말할 수 없이 불편해진다. 물을 다 옮겨야 한다는 욕심, 물을 흘리면 뒤처리가 귀찮아진다는 계산 등은,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구체적 장애로 작용한다.
하지만 이제 컵에 물을 7부정도만 채우고 걸어보자. 물의 분량은 안전히 보존되고, 걸음도 훨씬 수월해진다. 내 욕심의 끝이 어디이고, 분에 넘치지 않는 삶이 무엇인지를 알아 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을 해본다.이번 주에 살펴볼 잠언에서는 「폭식」과 「폭음」에 대한 내용이 등장한다. 배가 고파도 위를 다 채우지 않는 것, 말을 하고 싶어도 다 토해내지 않는 것, 지혜의 기본적 자세이다. 인간 모두가 늘 노력해왔지만, 여전히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23, 15~28
이 부분은 1~9장에서 자주 등장했던 『내 아들아』라는 호칭으로 시작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충고 형식을 다시 도입하고 있는 것인데, 가르침의 첫째 내용은 「마음과 입술을 지혜롭게 쓸 것」이다. 「마음이 지혜롭고」, 「입술이 올바른 것을 말할」 때 비로소 마음과 속이 거짓 없는 기쁨으로 편안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15~16절).
17~18절은 『주님을 경외해야』 미래와 희망이 주어진다는 주제가 반복된다. 두 번째 가르침은 폭식과 폭음에 대한 경고이다.
저자는 이런 악습들이야말로 가난을 조장하는 주된 원인이라고 분석한다(19~21절). 세 번째 가르침의 내용은 지혜와 교훈의 진실을 찾아, 타인과 사건들로부터 그것을 지켜낼 것(23절)을 강조한다. 자신의 진실을 타인의 폭력으로부터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성숙의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창녀, 낯선 여인에 대한 경계가 이어진다. 「깊은 구렁」, 「좁은 우물」(27절) 등으로 비유된 그녀들의 함정은, 빠져 나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탁월하게 묘사해주고 있다.
23, 29~35
술을 좋아하시는 분들, 술 없이는 세상사는 맛도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꼭 한번은 필독하셔야할 부분이다. 술이 「중독성」을 가진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얼마만큼의 무서운 「독」을 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왠지 감이 잘 오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니 늘 「독」을 마시는데도 기분 좋다고 느끼게 되는 것 아닐까.
잠언 23, 29~35에서는 섬뜩할 정도로 무섭게 「주독」을 경고한다. 『빛깔이 좋다고 술을 들여다보지 말아라』(31절). 술은 사람을 『뱀처럼 물고 살모사처럼 독을 쏘기』(32절) 때문이다. 술 취한 이후의 증상들을 생중계 하는 것도 흥미롭다. 술에 취하면 『눈은 이상한 것을 보고, 마음은 괴상한 것을 지껄이게되며』(33절), 『바다 한가운데 누운 사람처럼』되거나 『돛대 꼭대기에 누운 사람처럼 되어』, 사람들이 때리고 상해를 입혀도 모르고, 술이 깨면 다시 술을 찾아 나설 것만 생각한다(34~35절)는 것이다.
24, 1~22
24장에서는 이미 자주 언급된 내용들이 반복되는데, 5절에서는 지혜「힘」이요, 「능력」임을 강조하고, 조언을 많이 받아들이는 자가 결국 최후의 승자가됨을 분명히 한다(6절).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바로 「낙심」이다. 더구나 「환난의 날에 하는 낙심」은 가장 치명적일 수 있다. 낙심은 그나마 「있는 힘도 줄어들게 하기」 때문이다(10절).
15~16절은 남의 것에 대한 욕심을 버릴 것, 즉 「타인의 안식처를 노리지 말 것」을 권고하는데,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조장한 덫에 의해 파멸되기 때문이다.
악인들의 사필귀정은 19~20절에도 다시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의인은, 아무리 힘든 곤경에 처하게 된다해도,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있다(16절).
17~18절에는 매우 예외적인 내용이 등장한다. 원수의 파멸과 불행을 기뻐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네 원수가 쓰러졌다고 기뻐하지 말며, 그가 넘어졌다고 네 마음이 즐거워 말지니라』(17절). 이런 태도는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18절)태도이기 때문이다. 승리와 타인에 대한 심판은 오로지 하느님께만 속해있는 것임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이와 비슷한 입장은 21~22절에 다시 강조된다. 인간의 삶을 결정하시는 주권은 「주님」에게만 유보된 권한임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진짜 사랑한다면 조금 덜 사랑하도록 노력해야 하고, 진짜 미워한다면 조금 덜 미워하도록 해야 한다. 미운 사람이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마음, 불쾌함, 분노 등을 씻어낼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아름다움 아닐까한다. [가톨릭신문, 2004년 5월 30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기다림은 삶의 위대한 선물
삶을 한 문장으로도 충분히 함축해 낼 수 있다는 것, 잠언을 읽을 때마다 느끼게 되는 경이로움이다. 그런 힘이 내재해 있는 문장을 만들기까지, 잠언의 저자는 얼마나 지독히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노력해왔을까, 라는 물음 역시 늘 절실한 감동으로 묻게되는 질문이다. 특별히 이번 주에 살펴볼 『히즈키야의 사람들이 수집한 솔로몬의 잠언집』은 삶의 편린을 특유의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해주는 수작이어서 글을 쓰는 내내 감사할 수 있었다.
현인들의 가르침 부록(24, 23~34)
잠언 24, 23~34는 지난주까지 살펴본 「현인들의 말씀들」의(22,17~24,22) 「부록」 정도로 간주되고 있다. 23절에 『이 역시 현인들에게』라는 구절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의 주제는 크게 「정직함에 대한 것」과 「노동의 가치」(27; 30~34)로 구분된다.
정직함에 대하여(23b~26; 28~29)
남을 판단할 때, 우선되어야 할 것은 「공정함」이다(23b~25절). 정직과 진솔함이야말로 진정한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모티브이고(26절), 이유 없는 거짓말을 하지 말 것(28절), 악을 악으로 갚지 말 것(29절) 등도 강조되고 있다.
노동의 가치(27; 30~34)
가정을 지키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신중함」이다. 『바깥일을 정리하고, 네 밭일을 준비해 놓고』야 비로소 가정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27절). 30~34절은 6, 6~11과 병행되는 부분으로, 게으름이야말로 가난과 빈곤의 원인임을 독특한 풍자와 유머로 제시해주고 있다.
히즈키야 사람들이 수집한 솔로몬의 잠언들(25, 1~29, 27)
25장부터는 새로운 모음집이 등장한다. 1절은 이 부분을 『히즈키야의 사람들에 의해 수집』된 『솔로몬의 잠언집』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히즈키야는 기원전 715~687년경 유다를 통치했던 왕이었다. 민족주의적 노선을 통한 개혁 정책으로 유명하고, 그 일환으로 이스라엘의 역사, 시, 지혜적 전통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물론 이 잠언집이 그러한 사업의 실제적 산물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25~27장은 주로 명령, 금지, 비교 등의 형식을 사용하고, 28~29장은 반의적 대구법 형식을 자주 등장시킨다. 칠십인역에서는 이 부분을 30, 15~31, 9 다음 부분에 두고 있다.
25장
25장은 구약성서 안에서 이토록 수려한 내용과 문체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읽는 즐거움을 더해주는 부분이다. 필독을 권한다. 필자의 설명보다 성서 구절 자체를 읽는 것이 훨씬 이해하기 쉽게 느껴질 부분이기 때문이다.
2~3절은 임금에게 요구되는 최고의 지혜가 하느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식을 적절히 연결시키는 것임을 강조한다. 『~를 없애야』라는 표현으로 연결되어 있는 4~5절은, 장애가 되는 이물질을 제거해야 비로소 그 본질을 볼 수 있음을 가르쳐준다. 6~7절은 윗자리에 앉으려 하지 말 것을 당부함으로써 「겸손」을 강조한다. 7b절부터는 성급한 말버릇에 대한 경고가 이어진다. 직접 보았다고 해서 섣부른 증언을 하지말고(8절), 서로 다투는 중에라도 남의 비밀을 누설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9~10절). 적절한 표현력(11절), 들을 줄 아는 능력(12절)도 강조되고있고, 13~14절은 삶에 대한 성실성을 자연현상에 은유하여 부각시키고 있다. 『끈기는 판관을 설득하고, 부드러운 혀는 뼈를 부순다』는 15절의 말씀은 저자 특유의 문학성과 지혜가 돋보이는 잠언 진수 중의 하나이다. 「인내」와 「기다림」이야말로 타인을 설득하는 최선의 능력이고, 「유연함」이야말로 뼈를 부술 정도의 강력한 힘임이 명시되고 있는 것이다. 16~17, 21~22, 27~28절에서는 「겸허한 태도」와 「자기 절제 능력」이 부각된다. 특히 21~22절의 말씀이 눈에 띄는데, 『미워하는 자가 주리거든 빵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주라』. 그래야 『주님께서 네게 보상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투기 좋아하는 아내』에 대한 경고(24절)는 이미 이전에도 여러 번 다루어졌던 주제이다.
기다림이 줄 수 있는 힘
기다려도 오지 않는게 있다. 앞으로 계속 기다려도 결코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은 일종의 공포로 작용한다. 그러나 오늘 소개한 잠언은 「인내」와 「기다림」이야말로 인간을 「진정」(眞正)하게 하는 동인이며, 강한 내면적 힘을 갖추게 하는 길이라고 제시한다. 기다림을 통한 성숙, 그 고통을 넘어선 유연함이야말로 삶이 주는 위대하고 감탄스런 선물임에 틀림없는 듯하다. [가톨릭신문, 2004년 6월 6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하느님을 경외하라
그럼 그렇지. 강의가 왠지 잘 풀려 목에 힘도 들어가고 실없는 농담도 하고 그럴 땐, 꼭 뭔가를 실수하게 된다. 인간이 경계해야할 가장 위험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지적(知的)오만이다. 내가 소유한 지식이 얼마나 많은 오류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인간의 독선만큼 혐오스러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번 주에 살펴볼 잠언은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로 시작한다. 잠언이 제시한 「가장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도취적 오만에 대한 경종인 셈이다.
26장
26장은 모두 3개의 주제-「어리석음」(1, 3~12절), 「게으름」(13~16절), 「중상모략」(17~26, 28절)-으로 되어있다. 어리석음이란 자신이 범한 과오를 되풀이하는 것임을 제시한 11절과, 세상에서 가장 우둔한 자는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이라고 지적한 12절이 눈에 띈다. 게으름에 대한 잠언은 매우 현학적인 기지를 보여준다. 『게으름뱅이는 제 손을 그릇 속에 넣고서』도 입에 손을 가져가는 것이 귀찮아 힘들어하고(15절), 그러면서도 『재치있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가 더 지혜롭다고 여긴다』(16절)는 것이다. 중상모략에 대한 경고도 이어진다. 『불화살을 쏘는』 것처럼 이웃을 중상하고는 『장난삼아 그랬다』한들 그 죄는 결코 무마될 수 없다(18~19절). 중상은 자기 자신에게로 그 결과가 돌아온다는 특징을 가지기에 『구렁을 파는 자 스스로 거기에 빠지고, 돌을 굴리는 자 스스로 그것에 치이』게 된다(27절).
27장
27장은 『내일을 자랑하지 말라』는, 삶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인식으로 시작된다. 왜냐하면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1절). 3절은 미련한 사람을 대할 때의 불쾌감을 『돌과 모래들』처럼 무거운 것으로 표현한다. 17절의 『사람은 제 이웃의 얼굴로 다듬어진다』는 구절은, 19절의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을 비춘다』는 표현과 연결된다. 즉 한사람의 마음 씀씀이는 그의 전존재를 대표하고, 인간은 그런 타인의 모습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28장
근거 없는 불안이란 없다. 『악인은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가고』, 죄 없는 사람은 언제든지 담담할 수 있기 때문이다(1절). 『주님을 찾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곧 모든 것에 대한 깨달음을 의미한다(5절). 진정한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악을 끊어버리려는 의지이며, 그럴 때 인간은 비로소 자비를 입는다(13절). 타인을 억압하는 것은 지혜가 모자란 탓이다(16절). 25~26절은 진정한 지혜를 정의해주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을 믿지 않고 『주님께 의지하는 것』이다. 나누어주는 사람은 오히려 모자람이 없게 되고, 가난한 이를 『외면하는 이는 오히려 저주를 받는다』(27절).
29장
7절은 「정의」와 「자비」야말로 지혜의 구성요인임을 강조한다. 12절은 통치자의 자질을 제시하는데, 『통치자가 거짓된 말에 귀를 기울이면 신하들은 모두 사악해』(12절)지지만, 『진실 되게』 다스리면 『왕좌는 길이 굳건하다』(15절). 22절은 분노에 대한 적절한 묘사를 전해준다. 겸손은 한 인간을 높여주는 비결이고 교만은 한 인간을 천박하게 하는 지름길이다(23절). 25절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잘 정리해주고 있다. 인간에 대한 두려움은 「올가미」가 되지만, 『주님께 신뢰하는 이는 안전하다』.
즉, 타인을 두려워하는 것은 진정한 두려움일 수 없고, 오직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만이 진정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26절은 사람의 권리란, 힘있는 자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부각시킨다.
누구를 두려워하는지
질병, 전쟁보다 사람을 더 많이 죽게 하는게 있다. 바로 「두려움」이다. 잠언적 관점에서 본다면, 사람을 죽이는 두려움은 엄밀히 말해 타인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근거한다. 아니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나를 죽어가게 하는 것은 타인 바로 그 실체가 아니라, 그 타인에 대해 내가 품게되는 「감정」, 「생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살펴본 잠언은 인간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뿐임을 가르치고 있다. 내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를 바르게 인식하게 될 때, 우리 삶의 지평은 보다 넓고 대담하게, 하지만 평화롭고 오묘하게 열려질 수 있지 않을까. [가톨릭신문, 2004년 6월 13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진정한 지혜는 순수 열정 경외
잠언의 마지막 부분 30~31장은 4개의 작은 잠언집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굴의 잠언(30, 1~14)
1절은 이 잠언집을 『마싸 사람 야케의 아들 아굴의 말들』로 소개하고 있는데, 「마싸」는 북 아라비아에 해당되는 지명이어서 이 잠언들이 외국 기원을 두고 있음을 암시한다. 전반부는 인간의 지혜가 하느님의 지혜에 비해 얼마나 불완전한 지를 제시한다. 7절 이하에서는 저자 자신의 기도가 등장하는데 『부유하게도, 가난하게도 하지 마시라』는 간청이 큰 공감을 준다. 배부르면 『주님이 누구냐?』하며 자만할까 두렵고, 가난하면 도둑질을 하여 주님의 이름을 더럽힐까 두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8~9절).
숫자 잠언(30, 15~33)
이 부분은 예전에 한 번 언급한 바 있던 「숫자 잠언」과 연결되어 있다. 숫자 잠언이란, 일정한 숫자가 등장하고 이어 그 숫자에 1을 더한 숫자가 이어지는 양식을 말한다. 이 잠언의 처음 시작에는 「둘」(15절 a)이 등장하고 이어 「셋」, 「넷」이라는 숫자들이 연이어 등장한다(15절 b). 그리고 이러한 패턴은 계속적으로 반복된다. 이 잠언집은 서두에 만족할 줄 모르는 이들을 「거머리」에 비유하고 있다. 이들은 『배부를 줄 모르고, 충분하다 할 줄 모르는 이들』이다(15~16절). 후반부에서는 자연계와 사회 생활을 연결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는데, 24~28절에서는 지혜로운 짐승 넷(개미, 너구리, 메뚜기, 도마뱀), 당당하게 걸어다니는 짐승 넷(사자, 수탉, 숫염소, 임금)이 소개된다.
마싸의 왕 르무엘의 말씀들(31, 1~9)
이 잠언도 아굴의 잠언처럼 「마싸」라는 지명과 연결되어 있는데, 태후(왕의 어머니)가 젊은 왕에게 주는 가르침이라는 설정이 특징적이다(31, 2 참조). 지금까지 소개된 잠언은 이스라엘의 가정 지혜가 주로 아버지에 의해 전달되었음을 제시해 주었기 때문이다(특히 1~9장). 어머니의 이름은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아들의 이름은 르무엘로 되어있다. 이 이름 역시 이스라엘 이름이 아니며, 스스로를 「왕」의 신분으로 밝히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의 왕인지도 알 수 없다. 미래의 통치자에게 그의 임무와 권리를 가르치는 것은 지혜문학 전통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인데(예: 이집트의 「아멘엠헤트」와 「메리카레의 가르침」 등), 이를 잠언에 삽입시켜두었다는 것은, 그 내용을 비단 왕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인간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보편적 가르침으로 대중화하였음을 암시한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주는 가장 소중한 가르침의 내용은 「독주」와 「여인」에 대한 경고로 이루어져 있다. 이 둘의 위험에서 빠져나오기가 젊은 아들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것이다.
현숙한 부인을 찬양하는 알파벳 시(31, 10~31)
이 부분은 매 절마다 히브리어의 알파벳 순서를 따라 그 첫글자로 시작되는 정교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기법을 「알파벳 시」라고 부른다. 잠언의 마지막 부분에서 제시되는 여성의 이미지는 지금까지의 부정적 이미지를 수정해주고 있다. 「좋은 아내」(히브리어 「에셋 하일」, 유능한 아내라는 번역이 더 어울릴 듯)는 부지런하며(13~16, 19, 24, 27), 집을 잘 지키고(21~22, 25), 상냥하고(26), 베풀 줄 알며(20), 남편과 아들을 성공하게 만드는(23, 28~31) 여성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는 중요한 자질은 주님을 경외할 줄 아는 지혜(30절)이다. 저자는 이 부분을 가장 마지막 자리에 배치함으로써 그 가치를 극대화하고 있다. 『우아함은 거짓일 뿐』이고 『아름다움 역시 헛것일 뿐』임을 강조하면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인』이야말로 가장 능력있는 여성임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잠언에 대한 고찰을 마치며
지금까지 우리는 성서의 잠언을 살펴보았다. 잠언의 각 구절이 품고있는 삶에 대한 성찰, 하느님과 인간의 운명적 관계 등은 인간 누구나를 감동시키는 보편적 힘으로 다가와 주었고, 잠언의 그러한 예리한 감각과 지혜로운 통찰은 실패와 고통으로 응축된 정직한 삶의 산물임을 알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가르침을 토대로, 내게 주어진 삶을 정직하게 만나고 그것을 조용히 수용하는 일일 것이다. 삶은 얄팍한 허위와 교만을 용납하지 않는 다는 것, 하느님께 대한 순수와 열정, 경외야말로 세상의 그 어떤 지능.지략을 뛰어넘는 진정한 지혜라는 것을 수백 수천 번의 고비를 넘기면서라도 깨닫게 될 때, 나는 비로소 내 자신의 진실과 괴리되지 않는 삶, 얼굴, 목소리를 가질 수 있는 것 아닐까한다. [가톨릭신문, 2004년 6월 20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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