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대림성탄] 참 사람의 참 말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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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5-01-07 | 조회수2,386 | 추천수0 | |
파일첨부 참_사람의_참_말씀.hwp [577] | ||||
참 사람의 참 말씀
유다 민족 사상 가장 어수선하던 난세에 태어나 어둡고 참담했던 고난의 시대를 그야말로 불꽃처럼 살다가 십자가 위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죽은 한 인간이 있었다. 그의 삶을 체험했던 공동체는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사도 4,20)면서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을 남겼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도다!(요한 1,14) 사람이 되셨다는 말씀은 어떤 말씀이며 말씀이 된 사람은 또 누구였기에 어디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 엄청난 신앙고백을 낳았을까? 말씀은 “빛이 생겨라!” 하시던 창조의 그 말씀이었고, 무에서 광대무변의 우주를 지어낸 말씀의 힘을 생생하게 느끼도록 인생을 살았던 이는 나자렛 사람 예수였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겪고 나서 자신들이 스승으로 섬기던 분이 과연 누구인지 그분의 정체를 새롭게 질문하기 시작하였다. 성찰은 가까운 일에서 시작하여 먼 일로 이어지는 법이다. 우선 부활의 뜻을 물었고 그 다음은 십자가의 죽음을, 그리고 그분의 삶을 진지하게 회상하였다. 그분이 누구시기에 하느님은 당신의 억센 팔로 죽음의 깊은 구렁텅이에서 일으키셨을까? 그분은 어떤 분이시기에 자신의 참혹한 죽음을 바라보면서 승리를 노래하셨을까? 가없는 연민의 정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이 땅의 작은 자들과 연대하는 삶을 살다가 미련 없이 떠나간 그분은 과연 누구이신가?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죽음과 삶을 부활사건에 비추어 곰곰이 성찰한 끝에 그분은 ‘사람이 되신 말씀’이라는 고백에 이르렀다. 어느 날 자기들 곁에 다가와 함께 먹고 마시던 그분은 천지창조 이전부터 존재하는 하느님의 영원한 말씀이셨다는 것이다.
1. 만물에 앞서 계시는 하느님의 지혜와 말씀
예수님을 서슴없이 ‘영원으로부터 선재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불러드릴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지혜와 말씀에 관한 구약의 지혜문학 전통 덕분이었다. 일찍이 구약과 후기 유다이즘은 하느님의 지혜(욥 28,12-28; 잠언 3,19; 8,22-36; 지혜 3,1; 7,12.25-30; 8,4; 집회 1,1-10 참조)와 율법(집회 24,3-22 참조)의 선재성에 대하여 언급하며,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율법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고 세상만물을 존속시키신다는 사유체계를 갖추었다. 후기 유다이즘의 지혜문학은 하느님과 인간의 소통 가능성에 관심이 많았다.
초월과 무한의 하느님께서 어떻게 지상 실재에 꽁꽁 묶여있는 인간과 만나 대화하실 수 있는가? 신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느님을 보는 자는 죽으리라고 했다(출애 33,20 참조). 티끌 같은 인간이 지존하신 분을 쳐다보는 순간 타서 없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느님도 사람에게 다가오실 수 없고 사람도 하느님을 대면할 수 없다. 이런 난제를 해결하고자 지혜문학이 찾은 해결책이 바로 ‘지혜’와 ‘말씀’ 같은 하느님의 중개자 표상이었다. 잠언에 따르면, 하느님의 지혜는 만물에 앞서 존재한다. “야훼께서 만물을 지으시려던 한 처음에 모든 것에 앞서 나를 지으셨다. 땅이 생기기 전, 그 옛날에 나는 이미 모습을 갖추었다”(잠언 8,22).
집회서에서 지혜는 자신의 신적 기원과 영원함을 소개한다. “나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입으로부터 나왔다”(집회 24,3). “그분은 시간이 있기 전에 나를 만드셨다. 그런즉 나는 영원히 살 것이다”(집회 24,9). 지혜서는 하느님의 말씀과 지혜가 창조 때에 담당한 역할을 명시하였다. “주님, 당신은 말씀으로 만물을 만드셨고, 당신의 지혜로 인간을 내시어”(지혜 9,1-2). 하느님의 왕좌 곁에 머물던 지혜는(지혜 9,4) 마침내 하늘로부터 내려와 시온 산과 예루살렘 위에 자리를 잡는다. “주님은 사랑하시는 이 도읍에 나의 안식처를 마련하셨고,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권한을 주셨다. 주님께서 고르시어 차지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신 백성 안에 나는 뿌리를 내렸다”(집회 24,11-12).
이리하여 지혜는 하느님의 역사 내 현존양식이 되었다. 유다 전통의 지혜와 말씀은 그 쓰임새가 비슷한 희랍 문화권의 로고스와 합류하면서 의미의 조정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요한계 문헌은 세상과 하느님 사이에서 활약하는 이 중재자의 형상들을 예수님의 정체와 사명을 설명하는 그리스도교 고유의 개념으로 채택하였다.
2. 그 말씀과 지혜는 나자렛 예수
예수님께 대한 제자들의 신앙은 점진적인 성숙의 과정을 거쳤다. 예수님의 지상생활 기간에 미숙했던 이해는 십자가 죽음 이후 결정적으로 충만해지는데, 이는 일상적인 공동체의 삶 안에서 그분의 영의 현존을 체험한 뒤에 얻은 열매였다. 그런 연후에 토라와 지혜에 관한 유다교의 전통과 성서를 거듭 읽으면 읽을수록 참된 하느님의 말씀과 지혜가 누구를 두고 한 말이었는지 분명해졌다. 다음의 언명에는 예수님의 정체와 사명에 대한 초기 공동체의 확신에 찬 결론이 담겨있다.
- 하느님은 그분을 통하여 태초에 만물을 지어내셨다(1고린 8,6; 골로 1,15-17 참조). - 그분은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아드님이시다(갈라 4,4; 로마 8,3 참조). - 그분은 하느님과 같은 분이셨지만 이 세상에 오면서 자신을 비우시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으며 지금은 하느님 곁에 영광스럽게 계신다(필립 2,6-11 참조). - 그분은 하느님의 외아들이며 로고스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이시면서 사람들에게 성부를 계시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며 인류를 어둠에서 끌어내시려고 사람이 되셨다(요한 1,1-18 참조). - 그분은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는 성부 곁에서 영광을 누리시던 분이었고, 세상에 내려와 일을 마치신 후 다시 성부께 올라가셨다(요한 17장 참조). - 그분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다. 하느님은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분을 시켜 우리에게 마지막 말씀을 들려주셨다. 그분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하느님의 오른편에 영광스럽게 앉으셨다(히브 1,1-3 참조).
3. 연민은 하느님의 시선
한 인간에게 이런 엄청난 고백을 드리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의 삶은 도대체 어떤 것이었기에 그를 겪어본 사람들은 창조 때에 하느님 곁에 있던 말씀이 살이 되셨다는 한결같은 고백을 남기게 되었을까?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에는 예언자가 없었다. 예언자 정신의 불꽃은 사그라졌고 하느님은 말씀을 빼앗긴 시대였다. 어디서도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으며, 하느님의 임재를 느끼게 해주는 조짐은 아무 데도 없었다. 팔레스티나 주민의 압도적 다수는 복음서에서 ‘군중’ 또는 ‘무리’로 불리는 속절없는 처지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유다교 전통이 하느님 말씀의 강생으로 여기던 율법은 그렇지 않아도 창피하고 부끄러운 빈자의 괴로움에 죄인의 열등감만 더해줄 뿐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굴레였다.
막강한 부와 권력을 독점하던 상층 지배 계급은 물론이고 바리사이나 에세네, 그리고 젤롯 같은 점잖고 똑똑한 중류 계급은 자기들만의 울타리 안에 안주할 뿐 외세의 압제에 시달리는 다수 민중에게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않았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자비가 아니면 도저히 한계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는 속수무책의 시대였다. 가난은 질병으로, 병력(病歷)은 죄의 결과로 치부되는 악순환의 구조에서 벗어날 가망성은 거의 없었다. 불학하여 무식하면 대번에 불법 무도한 자로 치부되는 사회에서 열등 인간의 낙인을 벗을 기회는 극히 드물었다. 외세의 압제에다 율법의 속박으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은 그야말로 안팎 곱사등 신세였다.
예수님은 이렇다 할 불리한 조건이 없는 사람이면서도 최하층의 사람들과 어울려 사귀셨고, 그래서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셨다. 자진하여 버림받은 자의 하나가 되신 것이다. 중류계급의 예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거지들과 사귀고 손가락질당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셨을까? 무엇 때문에 예언자가 율법을 모르는 무리와 하나가 되셨을까? 복음서에서 발견하는 명백한 해답은 바로 연민과 동정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측은히 여기시며 그들 가운데 있는 환자들을 고쳐주셨다(마태 14,14 참조).
지쳐서 풀이 죽어있는 군중을 만나면 마치 목자 없는 양들처럼 측은하게 여기셨다(마태 9,36). 과부의 딱한 처지와 눈물을 보면 애가 타서 울지 말라고 위로하셨다(루가 7,13). ‘울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고 거듭거듭 위로의 말을 건네는 모습에서 예수님의 연민을 흠뻑 느낄 수 있다(마르 5,36; 6,50; 마태 6,25-34; 마르 4,40; 루가 10,41 참조). 웅장한 성전 건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도 마지막 남은 동전 한 닢을 봉헌하는 가난한 과부에게는 감동하는 분이셨다. 그분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을 만나면 거침없이 자비로운 인정을 발휘하셨다.
예수님을 움직이던 감정을 표현하려고 ‘측은히 여겼다.’, 또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는 말을 사용하였지만 늘 역부족이다. 작은 이웃들의 고통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정확한 심정은 늘 애간장이 녹아버리는 아픔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이르시기를, 자신은 말을 해도 오로지 아버지의 말씀만 하였고(요한 12,49), 일을 해도 아버지께서 시키신 일만 하였고(요한 5,19), 뜻을 세워도 아버지의 뜻만 세웠으며(요한 5,30), 힘을 써도 아버지의 힘만 썼다(요한 6,57)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밑바닥 사람들과 어울리시며 한없는 연민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된 근본 동인은 생각과 말과 뜻과 일에서 한결같이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셨던 삶에 있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신 것이다.
4. 치유와 용서 그리고 복음
1) 치유
치유는 연민의 사람 예수님께서 행하신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였다. 자신의 거룩함이나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지닌 당당함에 의거하여 병을 고치던 치유자들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힘에 의지하셨다. “하느님은 무슨 일이든 다 하실 수 있다.”(마르 10,27)고 누구나 흔히 하던 말을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든 가능하다.”(마르 9,23)는 뜻으로 이해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행하실 때마다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낫게 하였다.”는 인사를 빼놓지 않으셨다. 치유와 함께 이런 말을 듣는 환자는 자신의 믿음 안에서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힘을 발휘하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믿음이 하느님의 비상한 행동과 강력한 힘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확신한 사람들은 이제껏 자기를 괴롭히던 숙명의 굴레를 말끔히 벗어버린다. 숙명은 믿음의 반대말이다. 숙명은 부조리한 모든 현실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하느님의 능력을 부정해 버리는 불신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안에 잠들어있는 믿음을 흔들어 깨우셨고 믿음의 힘이 무엇인지 체험하게 만드셨다. 병이 낫고 악령들이 쫓겨나고 추했던 나환자들이 깨끗해질 때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손길을 느꼈다. 그리고 절망이라는 이름의 죽음에 이르는 질병에서 해방되었다.
2) 용서
세례자 요한이 죄인들에게 설교할 때 예수님께서는 거지, 세리, 창녀들과 사귀셨다. 요한이 단식할 때 예수님께서는 먹고 마시며 두레상 사귐으로 어울리셨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예수님의 처신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루가 15,1-2). 악명이 높은 세관장의 초대에 기꺼이 응하기도 했는데 이는 점잖은 사람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덕분에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루가 7,34)라는 별호를 얻었다.
이런 파격의 사귐과 친교는 가난한 사람들과 죄인들에게 굉장한 충격이었다. 손가락질 받는 이들을 친구로 그리고 대등한 사람으로 받아들이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수치심과 죄의식을 말끔히 씻어주셨다. 그들이 자기에게 중요한 사람들임을 보여주심으로써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시고 해방감을 선사하셨다. 누구를 만나든지 속마음을 활짝 열고 대하는 예수님의 격의 없는 처신은 그들이 결백하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임을 느끼게 했다. 이미 하느님의 사람으로 우러름을 받고 있던 예수님께 우애의 표시를 받을 때, 이는 곧 하느님의 인정과 똑같이 여겨졌다. 죄스러움과 무식함과 부정함을 성큼 뛰어넘어 자신들도 하느님께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뜨거운 확신을 갖게 되었다.
예수님과 같은 식탁에서 빵을 쪼개던 이들은 아버지 집에 돌아온 탕자처럼 하느님의 용서를, 그리고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주님의 현존을 생생하게 체험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치유할 때 하셨던 것과 같은 말씀으로 용서를 베푸셨다.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루가 7,48.50). 이런 말씀은 용서는 물론이고 단 한 번도 믿음의 자격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에게 하느님의 품속에 안기는 체험을 발생시켰다.
3) 복음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행복이 될 미래의 일을 예언하셨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것인데,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느님의 나라가 그대들의 것”(루가 6,20)이라는 소식이었다. 그 누구의 입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뜻밖의 뉴스였다.
예수님의 실천 행동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한 큰 희망을 일깨웠다면 예언의 말씀은 극심한 차별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훨씬 더 큰 희망을 갖게 해주었다. 가장 경건한 유다인들의 수도원이었던 쿰란 공동체마저 소경, 절름발이, 귀머거리, 벙어리, 불구자처럼 사회에서 아무런 지위를 얻지 못한 사람들의 입회를 금지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차별을 세상의 악이 지닌 기본구조로 보고 단호하게 배격하셨다. 하늘나라에서 누가 제일 큰 사람인가 하고 묻는 질문에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라고 대답하셨다(마태 18,1-4). 여기서 어린이는 신분과 위신의 미천함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표상이다. 사회의 주류들이 가장 천시하던 거지, 창녀, 세리들이 바로 예수님의 어린이들이었다. 그들의 수치심과 열등감을 잘 알고 계셨던 연민의 사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오히려 더 큰 가치를 지녔다고 믿으셨다. “두려워 마시오. 작은 양떼여! 사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는 기꺼이 나라를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루가 12,32) 하고 말하는 예수님의 목소리에서 세상은 오랜 세대 동안 끊기고 들리지 않았던 하느님의 음성을 다시 듣기 시작하였다.
신약성서가 예수님을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고백한 것은 그분께서 말씀하실 때 사람들이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분이 일하실 때 사람들은 땀 흘리시는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주시는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지치지 않는 그분의 활력에서 하느님의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분의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말씀을 아주 생생하게 느끼고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다니며 하다못해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려 했던 것은 예수님과 같이 있으면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용솟음치는 기력과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언하거니와 예수님에 관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여러 가지 진술들은 그분의 말씀과 실천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일을 겪었던 놀라운 체험을 곱새겨 성찰한 끝에 내린 고백이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고 믿었다. 한편 예수님께서 영원한 분이시라는 선재성의 고백은 그분께서 하신 모든 일이 영원하신 분의 숨결과 손길을 느끼게 해주셨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연민의 정으로 대하고 아끼셨던 모든 사람은 실로 그분의 얼굴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요한 14,9 참조). 아버지의 얼굴을 보여주신 예수님은 마땅히 아버지의 모상이요 화신이니 당연히 아드님이시고, 아버지에게서 온 아드님이시니 영원으로부터 오신 분이 틀림없다.
5. 진인(眞人)의 진언(眞言)
참된 말씀은 참된 이의 말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만이 참될 수 있다. 참된 말씀은 말에 담긴 지향과 실재가 분리되지 않는다. “빛이 생겨라!”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빛이라는 실재였다. 구약성서의 용어 가운데 ‘다바르(Dabar)’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일’을 의미한다. 참되신 분의 말씀 안에서 말은 언제나 일과 통일을 이루기 때문이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이사 55,10-11)는 야훼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이어받으셨다.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루가 4,21). 하느님의 ‘참’을 철두철미하게 살지 않았다면 감히 할 수 없는 말이다. 구약에서 다바르라고 불리던 하느님의 말씀은 신약에 와서는 살이 되신 로고스,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리게 되었다. ‘살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표현은 진인(?人)에게서 진언(?言)을 체험한 사람들이 드렸던 사랑의 고백이다.
지금 우리는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를 묵상하는 절기를 맞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창조주이시며 해방과 구원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발생시켰다. 그런데 오늘 교회의 말씀은 세상과 이웃들에게 어떤 의미를 일으키고 있을까? 우리는 “말이 씨가 된다.”는 인생의 지혜를 잘 알고 있다. 한 해 내내 교회가 뿌린 말씀의 씨앗들은 겨울 들판의 시련을 이기고 살아남아 싹을 틔우게 될까? 어떤 싹으로 터서 무슨 열매를 맺을까? 워낙 말의 홍수, 언어의 공해에 시달린 나머지 오늘의 이웃들은 보이는 대로 보지도 않고 들리는 대로 듣지도 않는다. 찾아서 읽고 골라서 듣는다. 교회가 아무리 뿌려대도 마음의 중심에 이르지 못하는 씨앗이라면 결코 싹을 틔우지도 열매를 맺지도 못할 것이다.
이맘때면 늘 그랬듯이 교회는 영원하신 말씀이 아기로 태어나셨다는 소식을 선포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당신 자신을 위한 말씀이 아니셨고 하느님과 세상을 위한 말씀이셨다. 교회의 말씀이 이웃들의 중심에 뿌려져 진정 그들을 위하는 말씀이 되려면 외치기 전에 우선 예수님께서 ‘그분의 어린이들’을 바라보던 연민의 시선으로 세상을 들여다볼 일이다. 자캐오는 나무 아래서 자기를 따뜻하게 바라보던 예수님의 시선에 감동하여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셔 들였다. 말씀을 사람의 중심에 이르도록 하는 힘은 바로 시선이었다. 세상의 아픔을 정확히 이해하는 시선이었다.
실로 우리 역사상 참 오랜만에 극소수가 누리던 부당한 독점의 구조를 타파하고 상식과 공정의 규율로 사회의 활력과 효율을 높이려는 합당한 기운이 생동하였으나 도처의 저항과 반발에 그 빛을 잃어가는 중이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쓰러진 것 일으키고 굽은 것 바로잡자는 것인데도 갖은 악담이 난무하고 있다. 안타깝기 그지없다. 복음서가 전해주는 성탄 이야기에는 몇 가지 아름다운 사연과 함께 무서운 일도 빠지지 않고 기록되어 있다.
하느님의 ‘말씀’이 가녀린 목숨으로 태어나자마자 그 목숨을 노리는 살기등등한 ‘말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어 칼을 휘둘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은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하겠으나 ‘잡스러운 말들’의 지독한 추격에 시달리다가 결국 세상에서 쫓겨나는 최후를 맞을지도 모른다. 말씀을 죽인 것은 말들이었다. 오늘도 끊임없이 언어를 생산해야 하는 교회와 사제들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교훈이다.
[사목, 2004년 12월호, 김인국(청주교구 오송본당 주임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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