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전례] 전례학 입문2: 전례 - 시간과 공간을 통한 존재의 완성 | |||
---|---|---|---|---|
이전글 | [전례] 전례학 입문1: 전례란 무엇일까 |2| | |||
다음글 | [전례] 전례학 입문3: 전례와 파스카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6-10-13 | 조회수3,162 | 추천수1 | |
전례 - 시간과 공간을 통한 존재의 완성 (전례학 입문 2)
전례에 대해서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것은 엄숙한 성당과 제대 등의 일정한 장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교회의 경배 행위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 많은 신자들은 주일 미사를 거르지 않고 또 교회에서 정한대로 성사를 배령하며 살아가는 것이 전례생활에 충실한 삶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례가 지니고 있는 풍요함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우리들의 삶 자체가 전례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전례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장으로서 공적으로 교회가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예배이며 동시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은총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는 마당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전례를 일정한 장소에만 묵어놓는다든지 일정한 시간, 예를 들어 주일과 연결시켜 제한적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라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며 하느님도 언제든지 당신께서 원하시는 시간에 우리를 만나시러 오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단지 전례는 그와 같은 만남에 있어서 공동체성을 보증한다는 것이다. 이제 전례가 이야기하는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살펴보자.
인간 - 시공 속에 머무는 존재
인간이 살아간다, 존재한다는 말은 철저하게 두 가지 존재의 구성원리에 종속되어 있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시간과 공간이 그것이다. 우리의 삶은 철저하게 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에 의해 규정된다. 생각하여 보라. 시간을 제외한다든지 또는 공간의 개념을 제외시켜버린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시간 구체적인 어느 장소에서 존재하는 것이며 여기서 시간이나 공간 중 어느 하나가 갑자기 사라졌다고 한다면 나 또한 갑자기 사라지게 될 것이다. 공간이나 시간을 생략하고는 그 어떤 상상조차도 불가능해 지는 것이 우리의 삶인 것이다. 500년이 넘은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서 한 여름 더위를 식혔던 사람은 무수히 많을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은행나무 그늘이었다 해도 500년이라는 시간의 차이 때문에 은행나무를 만나고 간 수많은 이들은 결코 서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을 넘어 사랑하는 연인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가 한 때 인기를 끈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사랑의 영원성을 강조한 상상일 뿐 현실은 언제나 시간의 원리 안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우리 인간은 그것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의 대철학자들도 인간의 존재원리를 규명하려고 애를 쓰면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이해하려고 천착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천착은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전례 - 인간이 시공 속에서 드리는 기도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전례는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최고의 예배이며 특히 교회의 이름으로 공적으로 드리는 찬미와 감사이다. 이러한 공공성이 제4차 라떼란 공의회(1215년)에서 영성체 규정 등이 생겨나면서부터 법적인 논리와 연결되면서 주일미사의 참여 등이 의무화되었고 의무로 부과된 성사에 참여하기 위한 피동적인 신앙생활이 시작되게 되는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주일에 미사참례를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께름칙한 느낌 때문에 주일에 성당에 온다고 고백하는 것은 이러한 법적인 의무화에 의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전례는 이와 같은 아주 피곤하지만 참여해야하는 피동적인 잔치는 아니다. 전례 안에서 우리는 생생한 하느님의 느낌을 얻어내야 하고 또한 하느님께 내가 당신 곁에 있음을 확인시켜야하는 이를테면 연인들의 내밀한 만남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인들의 삶의 목표는 빠스카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에 도달하는 것이고 전례는 이 빠스카를 지금 여기에(Nunc et Hic) 실현시킴으로서 하느님 나라의 이정표가 되는 것이며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과 함께 누리는 가장 큰 행복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공간으로서의 전례
이와 같은 하느님과의 생생한 만남을 위해서는 장소가 필요하다. 마치 연인들이 자신들의 장소를 마련하듯이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한 특별한 장소가 필요하다. 초대교회 박해시대에는 지하의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서 전례를 즐겨 집전 하였고 밀라노 칙령 이후 교회가 자유로워지자마자 처음으로 마련한 곳도 이와 같은 예배의 장소 곧 성당이었다. 성당은 이렇게 하느님과의 만남만을 위해서 열려진 공간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공간들 중에서 저 파스카의 기쁨을 나누며 하느님과의 멋진 데이트만을 위하여 준비되어있는 공간이 성당인 것이다.
그런데 전례를 통한 하느님과의 만남이라는 공간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계시를 통해 우리에게 드러난 신앙의 유산을 따르면 하느님은 우주의 창조주이시다. 그분은 전율할 만한 위엄을 지니신 군대들의 하느님이셨으며(구약), 동시에 가장 작고 미소한 죄인들에게 자신을 음식으로 내어주시는 자비의 하느님(신약)이시며 전례를 통해 구원의 잔치를 베풀어주시는 잔치의 주인이시다. 이러한 하느님을 만나는 전례의 공간을 통해서 우리는 우주의 중심에 선다. 우주를 만드신 이와의 통교를 통해서, 다시말해서 전례를 통해서 우리는 우주의 중심이 된다. 이제까지 단 한 번이라도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아니 이작은 땅의 중심이었던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우주의 한 구석, 지구촌 변두리에서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이제 전례를 통해서 우주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된다. 전례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때 마다 더 이상 변두리의 주변인이 아니라 우주의 중심을 차지한 세상에서 가장 의미있는 존재가 된다. 이것이 전례가 주는 공간의 의미이다.
중세 이후에 성당이 교회의 신적인 권위와 연결되면서 지나치게 장중해지거나 화려해지기도 했지만 성당은 언제가 그 첫 목적이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한 공간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유럽에서 공부하던 기간에 많은 성당들을 다녀보았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성당은 아씨시의 성 다미아노 성당이라는 작은 프란치스꼬의 경당이었다. 성당은 편안하고 즐겁게 하느님을, 오직 그분만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면 족하다. 전례를 생각하면서 또한 저 파스카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언제든지 즐겁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성당이며 그 공간이 가장 전례적인 공간인 것이다. 물론 전례집전의 공공성과 많은 신자들을 위한 배려로 성당들이 대형화되어 가긴 하지만 어느 성당이든지 내가 성체와 마주 앉기에는 충분한 자리가 있다. 우리는 단지 이 만남이 하느님과의 가슴 설레는 데이트일 수 있기 위해서 작은 자리를 필요로 한다는 것, 그리고 그곳이 우주의 중심이 된다는 것, 이것이 전례의 참된 공간적 의미라고 하겠다.
시간으로서의 전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평균 수명으로 계산하면 대략 70여년 될 것이다. 영원의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는 잠시 머물러 가는 존재 일 뿐이다. 마치 어느 좋은 장소에 가서 잠시 소풍을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듯이 인생도 그런 것일 것이다. 그런데도 마치 영원히 살 듯이 기세 등등하여 살아가는 이들을 주위에서 보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원을 향하여 머리를 드는 자들이며 영원한 생명에 미리 참여하는 이들이다. 이러한 참여는 결정적으로 전례를 통해서 이뤄진다. 세례성사를 통해 생명에 참여하며 여러 다른 성사들, 특히 성체성사를 통해 그 신비의 절정을 맛보는 것이다. 세례 성사를 통해 새 생명으로 태어나기에 초대교회 한때는 새 영세자들에게 아기들의 음식이 젖과 꿀을 먹였다고 한다. 이러한 성사들은 시간 속에서 집전 된다. 전례의 집전 안에서 시간과 공간이 만나고 우리는 거기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특히 전례가 시간을 통해서 보다 정돈된 형태로 파스카를 만나게 해주는 것이 전례력이다. 전례력에는 시간 단위에 맞춰서 전례주년, 주월, 주간, 전례시간 등이 있었다. 전례 주년을 통해서 보다 적절하게 파스카의 신비를 묵상할 수 있게 된다. 일년을 쪼개어 만든 전례력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빠스카를 기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림시기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지내는 것이 전례적이며, 성탄시기는 성탄의 축제를 기념하면서 “임의 오심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지내며, 사순시기는 하느님의 희생을 생각하며 “시련 받는 임 때문에 애태워하는 마음”으로 지내는 것, 그리고 부활시기는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임과 영원한 나라에서 만남”을 기뻐하며 지내면 좋은 것이다. 또한 한 달도 전례적으로 나누어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데 과거에 행했던 것 중에서는 오늘날 각 본당에서 첫 주간에 행해지는 특별 신심행위들, 성시간, 봉성체, 성모신심미사 등이 남아있다. 특히 매월을 전례적으로 나누어 첫 주간에서 마지막 주간까지 파스카의 신비를 묵상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또한 한 주간도 주일을 중심으로 빠스카를 묵상할 수 있는데 특히 로사리오 기도를 통한 빠스카 신비를 묵상한다면 아주 훌륭하게 시간을 전례적 의미화 시켜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하루도 그리스도의 탄생(한 밤중), 활동과 공생활(오전), 죽으심과 묻히심(오후), 부활(새벽)등으로 나눠 전례를 묵상한다면 매우 훌륭하게 전례에 참석하는 것이 된다. 사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성무일도도 초대교회에는 이런 구조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례 - 과거, 미래, 하느님 나라가 현재와 함께하는 기도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 여기저기서 다투는 소리를 듣는다. 인생이라는 놈을 살아가다보면 힘들고 어려울 때가 기쁘고 신날 때 보다 늘 더 많아 보인다. 그리고 이 속에서 사람들은 미워하고 다투며 분노하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것이 경제적인 이유로 가족끼리 다투고 신자들끼리 갈라서는 일이다. 이 모든 것이 사랑이란 더 많이 주고 무조건 기다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몰라서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하니 안타깝기도 하다. 우리는 자주 조금의 기다려줌 없이 오직 한 순간의 상태만 바라보며 판단하고 미워한다. 그림처럼 살아야할 부부간에도 갑자기 무력해보이는 남편의 모습이 견딜 수 없어서 또는 어느날 단장 안한 아내의 모습이 너무 매력이 없어서 실망하고 다투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현재만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과거와 미래를 함께 실어 지금을 볼 수 있다면 그들은 아주 아름다운 동화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옛날 사랑하던 때의 모습과 그리고 몇십년 후 더 늙어버려 서로를 진정 느낄 수 있는 성숙함의 눈길도 조금 섞어서 현실을 바라본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부부가 될 것인가?
전례도 그렇다. 우리에게 주어진 전 시간, 다시말해서 과거의 하느님의 은총과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 그리고 저 영원한 생명의 나가 지금 이 자리에서 기도하는 것이 바로 전례이다. 과거의 잘못과 현재의 부족함, 그러나 내일의 결심,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느님 나라에서의 복된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참된 의미의 전례라는 것이다. 전례 안에서 이렇듯이 우리를 분할하고 우리를 소외시키는 시간조차도 하나로 통합된다. 우리는 시간을 초월하여 계신, 시작도 끝도 없으신 하느님을 전례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하느님과 우리가 하나가 됨을 깨닫고 기도할 때 우리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그 기도 안에서 우리에게 평화를 약속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기도인 전례
전례가 우리와는 그렇게 친밀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아주 아름답게 꾸며진 장엄한 성당을 전례와 연결시키며 시간적으로는 주일이나 특정한 성사가 집전 되는 날이나 시간을 전례와 연결시키고 그 외의 시간이나 공간은 전례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듯이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끔 전례 안에서는 천사 같은 사람이 되지만 전례 밖에서는 고뇌를 가득 안은 채 떠도는 중생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이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성 안셀모는 “우리가 믿는 것(Lex Credendi)이 우리가 기도하는 것(Lex Orandi)”이라고 말한다. 파스카의 신비에 참여하는 우리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Lex Orandi)이 우리가 사는 것(Lex Vivendi)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파스카가 재현되는 전례란 우리의 삶이어야하고 따라서 우리의 시간과 공간이 언제나 파스카로 우리를 인도하는 준비된 공간이며, 준비된 시간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운 사람이면 그가 곁에 있어도 언제나 그립듯이 하느님의 나라는 내가 어디에 있어도, 성당이든지 시장이든지, 늘 그리운 나라인 것이며, 아침이든지 저녁이든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할 이유가 생겨나듯이 어느 때라고 그리워하는 길 그것이 바로 시간과 공간의 전례 인 것이다.
[이완희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 인천가톨릭대학교 홈페이지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