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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축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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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8-01-10 조회수2,367 추천수0

[이 달의 전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전례적 개관

 

부활축제 외에 성탄축제도 하나의 팔부축제일, 즉 전례적 축제주간을 보존해 왔다. 성탄팔부 축제의 마지막 날은 항상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는 그 첫날과 일치한다. 기원전 2세기 중엽 이래 로마제국의 집정관들은 1월의 첫날인 이 날에 그 직무임기를 시작한 이후 기원전 46년 시저(Julius Caesar)가 달력을 새로이 정비하면서 그때까지만 해도 새해의 첫날이었던 3월의 첫날을 1월의 첫날로 새해의 시작을 옮겼다.

 

이교도들은 이 새해의 시작을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 신(Janus)을 공경하기 위한 가장 큰 축제의 날로 미신적인 풍습과 아울러 방탕하게 이 날을 지냈기에, 그리스도교에서는 이 날의 의미를 그리스도교적으로 변화시킬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이에 교회는 이 악습과 타락으로부터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참회예절을 실행하고 단식하기를 부르짖었다. 이 사실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설교에서 잘 나타난다.

 

“그 사람들은 새해 선물하기를 좋아하나, 여러분은 자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은 방자한 노래들을 부르기 좋아하나, 여러분은 성서의 말씀에 마음이 끌려야 합니다. 그 사람들은 극장으로 서둘러 가기를 좋아하나, 여러분은 교회에 달려가야 합니다. 그들은 취하기를 좋아하나, 여러분은 단식해야 합니다.”(강론 198, 2)

 

제2차 뚜르(Tours)지역 공의회(567년)는 이교도적인 풍습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1월의 첫 3일간에 참회전례를 행하도록 규정했다. 그리고 제4차 톨레도(Toledo)지역 공의회(633년)는 사순절과 같은 방법의 엄격한 단식을 명했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동방교회를 본떠 성탄 이후에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공경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1월 1일 마리아 축일, 즉 천주의 모친 기념일을 정해놓았다. 로마는 이 점에서 마리아 공경과 마리아 축일이 훨씬 이전에 뚜렷하게 자리하고 있었던 비잔틴 교회의 영향을 받았다. 7세기 초엽 비잔틴의 마리아 축일인 예수 탄생예고 축일(구: 성모 영보 축일)과 성모 승천 축일이 로마교회에 들어왔을 때, 1월 1일의 마리아 축일은 뒷전으로 물러났고 팔부축일 중 하나로 그 자리를 대신했다. 6세기경 스페인과 갈리아 지방에서는 1월 1일에 주의 할례 축일이 널리 퍼졌다.(루가 2,21 참조) 13-14세기에야 비로소 로마에서도 이 축일이 발견되는데, 마리아 신심과 성탄의 성격을 띤 ‘주의 할례와 성탄 팔부’라는 이름의 축일이 1960년 전례 개혁 때까지 지켜져 왔다.

 

1969년 전례력 개정에서 ‘1월 1일, 성탄 팔부에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과 그 날에 예수께 명명(命名)된 축일’로 정함으로써 로마교회의 원래 전통이 다시 자리 잡았다. 예수 성명(性命) 축일은 새로운 전례력에서는 더 이상 지내지 않는다. 가?나?다해 3년 모두 같은 미사기도문은 그 첫 번째로 마리아의 하느님의 모친성에 대해서 말한다. ‘성자의 모친이시며 교회의 어머니로 고백하는 저희’(영성체후 기도), 복음(루가 2,16-21)에서는 성탄의 사건들을 새기고 가슴에 간직한 마리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동시에 예수의 할례와 그에게 이름을 지어준 사실이 언급된다. 제2독서(갈라 4,4-7)는 때가 찼을 때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하느님 아들의 오심을 본다.

 

사람들은 이 날 전례에서 이 날이 세계 공통적인 달력에서 한해의 첫날이라는 점이 고려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애석하게 여겼다. 세계 거의 모든 민족들이 이날에 대단히 큰 의미를 부여한다면 전례는 여기에 대해 침묵한 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공의회 토의 중, 후에 교황 바오로 6세가 되신 몬티니(Montini) 추기경의 “전례는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하지, 사람들이 전례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발언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미사전례서에는 ‘현세 생활을 위한 기원미사’라는 단원 그 첫 자리에 ‘새해 정초에 드리는 미사’ 가 있고, 그 미사에서 사회자의 기도는(구미사경본 총지침 제1장 10항 참조) 새해의 시작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이를 위해서 하느님의 축복을 청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앞에 자리한 규정은 이상하게도 ‘이 미사는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에는 지내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뒤에는 대축일에는 어떠한 기원미사도 지낼 수 없다는 일반적 홍주(rubrik)규정에 대한 지나치게 소심한 충성이 자리하고 있다. 이 규정에 대한 재고와 변경은 매우 의미가 있고 시급한 것으로 여겨진다.

 

 

묵상 : 한해를 시작하며

 

얼마 전 어느 젊은 아기 엄마가 제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며칠 전 자다가 갑자기 잠이 깨어 일어났어요. 그런데 불현듯 옆에 누워 있는 우리 아기의 자는 모습이 보고 싶어지대요. 이제 세상에 태어난 지 꼭 다섯 달이 된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기거든요. 그래서 저는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어요. 그러다 문득 이 아기가 커서 무엇이 될까, 하고 생각하니 한순간 힘이 쭉 빠지더군요. 이 예쁘고 사랑스러운 우리 아기에게 세상은 너무 살벌하고 메마른 것 같아서요.”

 

이 젊은 아기 엄마가 느끼는 자녀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은 사실 우리 모두의 불안이자 걱정입니다. 아마도 우리들 중의 많은 분들은 들뜨고 시끌시끌한 송년의 밤, 제야의 분위기에서도 같은 의문을 가지셨을 것입니다. ‘새해에는 어떻게 될까? 작년보다는 좀더 형편이 나아지려나? 새해에도 내 일자리가 보장될 것인가? 내 자녀들에게 어떤 문제가 생길 것인가? 나라의 경제가 좀 풀릴까? 물가는 또 어떻게 될까?’

 

이처럼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그 주위와 더 크게는 나라와 세계에 대한 걱정과 염려 또는 불안감도 가질 수 있습니다. 의문과 또 다른 의문들이 꼬리를 물며 생겨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대부분은 소박한 희망을 가지고 새해를 맞이하거나 아니면 작년이나 새해나 별 다른 것이 없지 않겠는가 하는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그냥 덤덤하게 새해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불안하게 새해를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해에 나와 내 가정과 내 자녀들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형제, 자매 여러분! 다음의 축복기도문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주님,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소서. 주님은 당신의 얼굴을 우리 위에 빛나게 하시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향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소서.”

 

이 축복기도문에는 분명한 확신과 신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제멋대로 하도록 놓아둘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의 역사는 측정할 수 없는 세력의 놀이공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악이나 죄의 놀이공도 아닙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롭고, 선하신 눈길로 보시는 하느님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얼굴을 우리 위에 비추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들을 염려하시고 우리의 행복을 위해 보살펴 주십니다. 그분은 온전한 호의와 사랑으로 이 세상을 향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마침내 이 세상과 우리의 인생을 떠받치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믿음과 신뢰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도 가능할까요? 예, 가능하다고 확신합니다. 때로는 정말 참다운 평화가 머물겠는가 하는 불안감과 걱정이 우리를 엄습하기도 합니다. 또 의문과 회의가 우리에게 닥치기도 합니다. 왜 이 땅에 그렇게 많은 모순과 불합리가 있는가? 왜 이 세상은 이렇게도 잔인한가? 물론 인간의 말과 인간적인 권력투쟁에서 생기는 수많은 죄 없는 희생에 대한 슬픔과 분노가 우리를 덮치기도 합니다. 무엇 때문에 죄 없는 사람, 선량한 사람들이 권력자들이나 정치인의 권력 싸움에서 희생되어야 하는가 말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부조리와 회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세상이 하느님의 세상임을 믿습니다. 우리가 자주 세상을 파괴시키고 사람의 행복과 아름다운 자연을 파괴시킨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탓이 아니라 우리 탓이고 우리의 잘못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생명의 기회를 가지고 행복을 누리도록 만드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일이요 과업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놀라운 사랑과 정성으로 이 세상에 당신의 눈길을 주시며 하느님은 당신 아들을 이 세상의 어둠과 불안 가운데 보내셨으며 암흑에 빛을 주셨다고 알립니다. 그분께로 우리는 방향을 돌릴 수 있으며 그분의 선하심과 인간애로 방향을 정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신뢰에서 축복의 한 해가 되기를 우리 모두 축원합시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축복해 주시기를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우리 모두에게 펼쳐지기를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주신 새로운 한해에 하느님의 선하심과 사랑이 우리를 통해서 온누리에 고루 퍼지게 되기를 간절히 청합시다.

 

[월간 빛, 2005년 1월호, 최창덕 F. 하비에르 신부(월성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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