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위령] 위령의 날(11월 2일) | |||
---|---|---|---|---|
이전글 | [축일] 수호 천사 기념일(10월 2일) | |||
다음글 | [전례] 구약성경의 예배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8-01-10 | 조회수4,116 | 추천수1 | |
[이달의 전례] 위령의 날 (11월 2일)
전례적 개관
위령의 날, 곧 죽은 모든 믿는 이들을 기억하는 이 날은 고유기념일이다. 축일표에 따르면 이 날을 비록 대축일이나 축일로 부를 수는 없지만, ‘주님, 성모 마리아(세계 축일표에 표기된), 성인들의 대축일’과 같은 서열에 자리하고 있다.(구 미사경본 총지침, 전례력과 축일표에 관한 일반지침 2장, 축제일의 우선순위 I,37) 고대 이교백성들은 나름대로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어느 특정한 날들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로마인들은 2월 13일부터 22일까지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소위 ‘Parentalia(죽은 사람들을 위한 위령제)’라 부르는 날들을 전통적으로 지켜왔다.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이러한 주변 문화의 전통이나 풍습을 우선적으로 보존해왔다. 이러한 기념일에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를 포함시키고 곧 이어 미사전례가 연결되었다는 증거가 벌써 2세기 이후부터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다 묻힌 지 사흘째 되는 날과 기일(일 년 후)을 우선적으로 선호했고, 그 다음에는 7일째와 30일째 되는 날을, 또 다른 많은 지방에서는 40일째 되는 날을 추가해서 모든 죽은 이들을 기념하는 날로 지냈다.
한 해의 어느 날을 죽은 모든 이들을 기억하는 날로 축성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이는 세비아(Sevilla)의 주교 이시도르(+660년)이다. 그는 자기 수도회의 식구들에게 오순절 다음날에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해 미사를 봉헌할 것을 규정했다.
9세기 초에 독일 풀다(Fulda)의 수도원장 아이길(Eigil)은 수도원 창설자인 성 스톨미우스 기념일인 12월 17일에 죽은 모든 이들을 미사와 시편낭송과 기도에서 기억하도록 명했다. 비슷한 기념일들이 동방교회들에서도 있어왔다. 멧츠의 수도원장 아말라는 모든 성인의 날 시간전례(성무일도)에 죽은 이들을 연결시켰다.
그러나 위령의 날 기원 원년은 정확히 998년으로, 이 해에 끌루니 수도원 원장 오딜로(Odilo, 994-1048)는 죽은 모든 이들을 기억하는 성대한 기념일을 11월 2일에 지내도록 자기 수도원의 모든 수족 수도원에 명했다. 이 기념일은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독일 등지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탈리아 특히 로마에서는 13세기에 가서야 그들 고유의 전통으로 자리를 잡았고, 15세기 말경 스페인 발렌시아의 도미니코 수도자들 사이에서는 이 날 모든 사제는 마치 성탄과 같이 석 대의 미사를 봉헌하는 풍습이 생겨났다. 베네딕토 14세는 1748년 이 풍습을 인정하여,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의 모든 사제들에게 특전으로 이 풍습을 확대시켰다. 아울러 베네딕토 15세는 이 풍습을 1975년 전 세계 교회의 모든 사제들에게 확산시키면서 아래 규정을 반포했다. 각자는 이날 한 대의 미사예물 기금(유산, 토지를 미사예물로 기부한 사람)을 낸 사람을 위해 미사를 바쳐야 한다. 이 규정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그러나 사제는 석 대의 미사를 바칠 수 있지, 바쳐야 하는 의무는 아니다.)
전례력과 축일표에 관한 일반지침은 위령의 날과 주일이 겹칠 경우 이 날이 우선권을 가진다고 규정하는 한편, 1970년의 새 미사경본은 위령의 날 전례에 그 우선권을 준다. 모든 죽은 이를 위한 미사에서와 같이 이 날 역시 검은색 제의 대신에 보라색 제의를 선택할 수 있다. 또한 이제까지의 위령미사 감사송에 네 개의 감사송이 추가됨으로써 내용도 더 풍부해졌다. 이들 감사송들은 죽은 이를 위한 미사전례에서 조금의 희망도 없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거나 통곡하는 대신 그리스도교적 죽음에서의 부활의 의미를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는 우리 믿는 이들의 희망의 뿌리임을 선포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장례미사 안에서 이제까지의 부속가인 ‘분노의 날(Dies irae)’과 다른 본문들은 삭제되었다. 왜냐하면 이 부속가들이 표현하고 있는 하느님 심판대 앞에서는 불안은 부활신앙의 광채를 어둡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날 봉헌하는 석 대의 위령미사의 독서들과 기도문들 그리고 화답송들은 부활신비를 믿는 신앙과 죽은 이들이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게 간청하는 청원으로 새겨져 있다. 그 중 첫째 미사가 그 대표적인 미사전례문이다.
묵상 : 죽는 것을 배워라!
이맘때쯤이면 어김없이 떨어지는 낙엽과 점점 앙상해져가는 나뭇가지와 계절의 자연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과 영원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듭니다. 어느 시인(詩人)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바람이 나무들에서 가을의 노래를 부르면 죽음에 대해 묵상해야 할 때가 되었구나.”
죽은 모든 이들을 기억하는 ‘위령의 날’에 교회도 죽음이라는 주제와 맞닥뜨립니다. 우리는 오늘 바치는 기도에서 우리 가족 중에서나 친척, 친지 그리고 우리 공동체에서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죽은 이들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죽은 이들과 여러 상황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이들도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가 알았던 사람들이나 우리가 모르는 모든 사람들을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맡겨 드리고자 합니다. 여기 우리 스스로에게 낮은 목소리로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할 여지가 남아 있습니다. “나에게 얼마동안의 인생의 시간이 허락될 것인가?” 또는 “다른 사람들이 ‘주님, 그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하고 나를 위해 기도할 때는 또 언제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질문을 던지기를 싫어합니다. 죽는 것뿐 아니라 죽음조차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힘을 낭비하는 일이다. 그 보다는 내 인생과 내 문제에 보다 더 신경 써라!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이다.”하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생각할 화두를 던집니다.
“한 번뿐인 인생이다.”하고 광대는 말하고, 현자도 “인생은 한번뿐이다!”하고 말합니다. 우리 중의 그 누구도 자신의 죽음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어디에서 닥쳐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산다면 그리고 신앙으로 삶을 꾸려 나간다면 죽음을 크게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진리입니다.
의로운 자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길 아래 있음을 믿습니다.(지혜 3,1) 우리의 인생을 하느님께 온전히 맡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에 관한 생각을 저 멀리 밀쳐놓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서로 생각을 나누고, 얘기해야 합니다. 기도 안에서 우리 자신의 죽음을 하느님 앞에 바쳐야 할 것입니다.
“Disce mori!(죽는 것을 배워라!)” 서양의 어느 묘지 정문에 쓰여 있는 글귀입니다. 죽는 것을 배워라! 사람이 사는 것을 배워야 하듯이 마찬가지로 죽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죽는 것을 배우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 형태의 작별이나 이별은 죽는 것에 대한 연습입니다. 어떤 종류의 손해나 손실은 우리로 하여금 “너는 어떤 것도 영원히 간직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일깨워줍니다. 어떤 종류의 병이라도 그 병은 나에게 “너는 연약하고 마침내는 네 힘이 다할 것이다.”하고 말해 줍니다.
모든 장례식 때 묘지로 가는 발걸음은 나에게 “죽은 그들 또한 너와 똑같고, 너도 언젠가 그들이 갔던 이 길을 갈 것이다.” 이렇게 속삭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이유는 그것이 모든 것으로부터, 내가 사랑하고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과 일과 사물로부터 나를 떼어놓기 때문입니다. 나를 분리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죽는 것을 배운다는 것은 내가 제 때에 놓아버림을 배우는 것을 뜻합니다. 물건과 일과 사람들, 영원히 나의 소유일 수 없는 모든 것들로부터 제 때에 나를 떼어 놓아버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죽음을 겪어야 합니다. 새로운 생명의 단계에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기주의 또는 자기중심주의가 내 안에서 죽어야 합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모든 탄생은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우리들이 자기 자신을 비우고 욕심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은 매일 죽어 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며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시는 길입니다.
죽음 안에서 하느님은 우리의 하느님이 되고,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작아져야 하고, 하느님은 내 안에서 커져야 합니다.” 좋은 죽음, 소위 말하는 ‘선종’을 위해 과거에는 기도했습니다. 고통이 없는 죽음이 아니라, 의식 없이 그냥 죽어가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중죄에서 해방되어 가족과 교회의 사제를 모신 가운데 성사를 받고 아름다운 마침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해” 그리고 우리를 죄 중에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도록, 죄 중에 죽음을 맞이하지 않도록 기도했습니다.
죽어 가는 것을 배우는 것, 그것은 우리의 지금 삶 가운데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영원한 죽음으로 멸망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서로 그것을 위해 기도합시다.
[월간 빛, 2005년 11월호, 최창덕 F. 하비에르 신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