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전례] 4세기의 전례 | |||
---|---|---|---|---|
이전글 | [전례] 2-3세기의 전례 | |||
다음글 | [전례] 서방전례의 분류: 로마 전례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8-01-11 | 조회수1,737 | 추천수0 | |
[전례 배움터] 4세기의 전례
지난 호에서 ‘순교자들의 시기’라고 불리는 2-3세기의 전례를 공부하였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지난 호에 이어서 ‘그리스도교의 종교 자유’를 획득한 4세기의 전례를 살펴보겠습니다.
가. 4세기의 전례
2-3세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다 지역으로부터 희랍어-라틴어 세계로 전파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절대적 신앙은 다신교인 로마제국의 박해 속에서 오히려 피 흘림과 죽음의 증거(순교)를 통하여 더욱 강해집니다. 4세기에 그리스도교의 종교자유를 선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칙령(313년)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자유를 얻었으며, 이때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박해받는 교회에서 종교자유를 누리는 교회로 변모한 4세기의 전례는 어떤 특징을 나타내는지 살펴보겠습니다.
① 성찬례, 성체성사의 장소 : 그리스도교 예배에 자유를 준 황제 콘스탄티누스 자신이 건물 마련에 앞장섰습니다. 313년에 황후의 궁전에서 시노드가 열렸고, 최초의 그리스도교 바실리카(basilica)인 ‘라테란 대성당’이 건설되었습니다. 얼마 후 예루살렘에 주님의 신비를 기념하는 여러 건물이 축조되었으며, 330년에 성 베드로 대성당 부지를 마련했습니다. 황제가 성당 건축공사에 필요한 재산과 건축가들까지 지원하면서 기존 건물의 확장 또는 신축으로 많은 예배공간이 생겼습니다. 이때부터 교회는 전례를 신자들의 가정집(교회의 집)에서 대성당으로 옮겨서 거행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전례는 더욱 성대하게 거행되었습니다.
② 세례성사의 장소 : 종교의 자유를 얻은 그리스도교의 교세는 점점 확장되었습니다.(392년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인정) 그리고 로마시민들 가운데 영세자가 늘어나면서 주요한 대성당 주변에는 세례성사 거행을 위한 세례당이 축조됩니다. 세례당은 둥글거나 4각형 또는 8각형 건물로 건축되었습니다. 4세기의 것으로 라테란 대성당의 세례당, 라벤나의 세례당이 대표적입니다. 이 영향으로 중세 성당도 세례당을 건축했습니다.(피렌체, 파르마, 피사, 트레비리 등)
③ 순교자 공경의 장소 : 순교자 공경은 이미 2세기 순교자 폴리카르포 주교에 대한 공경이 연례적 기념의 형태로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나타났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 박해의 종결과 더불어 교회는 특별한 관심으로 신앙의 증거자인 순교자들을 공경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순교자 무덤 위에 기념물(작은 집 형태)이 건축되었습니다. 무덤 기념물은 순교자 공경을 위한 기도 장소가 되었고, 곧 아가페 식사 및 성찬례를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무덤 기념물에는 무덤 성당을 크게 지어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도록 했습니다. 무덤 성당은 성 베드로 대성당, 성 바오로 대성당, 성 라우렌시우스(로렌조) 대성당, 성 세바스티아누스 대성당, 성녀 아녜스 대성당 등이 있습니다.
④ 주교의 전례복 및 표지 : 황제의 뜻에 의하여 주교들은 로마제국의 고위관직에 준하게 되었습니다. 주교와 사제들에 대한 높아진 사회적 평가는 관료복장(희고 긴 옷)을 착용하도록 했습니다. 이후 5세기경 로마 남성들은 짧은 형태의 프랑스-독일 복식을 따라갔지만, 전례 집전자들은 옛 복장을 그대로 유지하였고, 이것은 고유한 전례복식이 됩니다.
전례복 이외에도 그 당시 계층화된 사회에서 통용되는 신분표시가 주교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주교는 특권으로 주교좌, 빨리움(신분표시의 일종), 반지, 신발, 달마티카(전례복의 일종), 무릎을 꿇고 발에 입맞춤 받는 것 등을 사용했습니다. 원래 황제에게 적용되던 여러 표지들은 주교들의 영적 탁월성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그중 일부는 일반적으로 성직자들에게도 적용되었습니다.
⑤ 주일의 준수 : 종교의 자유 이후 321년의 칙령으로 주일의 재판과 의회활동이 중단되었습니다. 초기에는 들판의 노동은 허용되었지만 서서히 주일휴식을 지켰습니다.
⑥ 전례주년의 형성 : 초기 교회부터 주일을 주간 파스카로 준수하였고, 그 후 2-3세기경부터는 연례적 파스카(예수 부활 대축일)를 거행하였습니다. 4세기에는 예수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는 파스카 성삼일 및 사순시기가 도입되었고, 또한 예수 부활 대축일은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 연장하여 50일간의 대축제로 성대하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 후 4세기 후반에 예수 성탄 대축일, 성탄시기, 주님 공현 대축일 등이 도입되었으며, 이 때부터 일년을 주기로 그리스도의 신비를 기념하는 전례주년의 전체 윤곽이 마련되었습니다.
⑦ 수도생활의 형성 : 4세기 교회의 생명력이 잘 드러난 것은 수도생활(monachismus)의 탄생과 전파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도피, 고행, 자기포기’ 등을 실천하는 수도생활은 박해 중에서도 열렬히 증거했던 신앙이 로마 제국의 종교자유를 누리던 시대에 새롭게 피어난 것이라 하겠습니다. 수도생활의 형성으로 일상의 기도가 심화되고 발전하게 되었으며 특히 수도회를 중심으로 서서히 시간전례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⑧ 전례 음악과 노래 :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도할 때 악기를 사용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교 찬미가들은 3세기 파피루스 단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초세기 찬미가의 멜로디와 리듬에 대해 현재 많은 것을 알 수는 없지만, 문헌 자료의 수많은 기록이 음악과 노래의 사용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코린토 전서 14,15 “나는 영으로 찬양하면서 이성으로도 찬양하겠습니다.”에 따라서 시편 성가를 노래하는 직무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습니다. 교부들은 일반적으로 악기 사용을 반대하였는데, 그것은 지나치게 감성을 자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인간이 완벽한 음악도구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4세기 회중의 능동적인 참여를 돕기 위해 동방 교회에서 ‘응송집(antiphonarium)’이라는 성가집이 나타납니다. 당시 응송은 선창자가 시편이나 찬미가의 구절을 노래하고, 회중과 성가대가 반복구(후렴)를 노래하는 오늘날과 비슷한 형식으로 노래했으며, 경우에 따라 회중을 두 개의 집단으로 나누어서 번갈아가며 노래하기도 했습니다.
⑨ 총대주교좌의 성장 :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칙령 이후 전례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전례, 윤리도덕, 신학 등의 측면에서 점점 영향력이 커지던 총대주교좌 교회(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성장이었습니다. 중소 도시의 교회들은 총대주교좌 교회의 모범과 실례를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같은 언어, 같은 지역, 같은 문화권에 속하면서도 소속 총대주교좌가 다를 경우 서로 다른 특징을 갖춘 전례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전례는 처음에 전체적인 큰 윤곽에 있어서 단 하나의 사도적 기원에서 출발하였고, 2-3세기에는 많은 자율성을 누리던 자발성과 창조성의 시기를 거쳤으며, 4세기에는 총주교좌 교회의 모범을 중심으로 해당 교회지역 안에서 전례의 통일성을 형성하는 것으로 정착하게 됩니다.
나. 글을 맺으면서
지금까지 4세기의 전례를 살펴보면서,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종교자유 칙령에 의거하여 외적으로는 대성당, 세례당, 순교자 무덤 기념물, 전례복장이 나타났으며, 동시에 내적으로는 박해시대의 신앙의 열렬함이 수도생활이라는 새로운 제도로 꽃피게 됨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전례는 총대주교좌 교회의 모범을 따라 서서히 통일성을 갖추게 됨을 보았습니다. 잠시 우리가 거행하는 전례가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교구 및 본당 공동체와 함께 한 마음, 한 목소리로 참여하는 것인지 살펴보고, 나아가 함께하는 전례생활이 되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월간 빛, 2006년 7월호, 장신호 요한보스코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전례꽃꽂이연구회 지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