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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사] 영성체: 나눔과 친교와 일치의 성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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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2 조회수2,324 추천수0

[전례 해설] 영성체 : 나눔과 친교와 일치의 성찬

 

 

“올림픽은 지구촌 전체의 축제입니다.” 이것은 지난 바르셀로나 올림픽 폐회식 중의 인사말이었다. 지구촌이란 지구를 한 마을처럼 생각하여 일컫는 말이다. 지구가 한 촌락처럼 된 것은 매스컴의 영향이다. 세계가 하나되어 손에 손을 잡고 영원한 나의 친구, 영원한 사랑을 외치고 싶어한다. 그러나 세속적인 축제에는 국가와 민족, 이해 타산, 경쟁, 감정이 얽혀 있다.

 

지난 l989년 서울 세계성체대회 때에는 지구촌 각지에서 약 백만 명의 신자들이 모였었다. 이 대회의 정신과 의미는 올림픽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세계성체대회의 주 목적은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 신분을 달리하는 모든 이가 성찬을 통해 사랑을 되살리게 하는 데 있다. 성체 흠숭의 모든 형태는 영성체로 이끌어야 하고 또 영성체를 위주로 해야 한다.” 이것은 교황 비오 10세의 말씀이다.

 

영성체(communio)란 이미 언급하였듯이(7월호 120쪽) 물건이나 희로 애락 등의 공동 소유, 공동 배려, 공동참여의 뜻이다. 4세기경부터 영성체란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것 즉 성체와 성혈의 배령을 뜻하였다. 하느님의 백성은 성체성사를 통하여 생명을 기른다. 성체의 삶이란 하느님 영의 삶이다. 그러므로 영성체는 미사의 목표요 일치의 구심점이며, 나눔의 잔치, 온 누리의 성찬, 하느님과 만나는 현장,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다.

 

 

영성체 전 사제의 준비 기도

 

“천주의 어린양……”이 끝난 다음 사제는 잠잠한 기도로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효과적으로 받아 모시기 위해 준비한다. 신자들도 침묵 중에 같은 지향으로 기도한다. 기도 내용은 “매일 미사”의 통상문에 수록되어 있다. 9세기경부터 미사에 도입된 이 두 기도문 중 하나만 택하면 된다.

 

(1) 생명의 천주 성자, 주 예수 그리스도여, 성부의 뜻을 따라 성신의 협력으로 죽음을 통하여 세상에 생명을 주셨으니, 주의 이 지극히 거룩한 몸과 피로 모든 죄와 온갖 악에서 나를 구하소서. 또한 나로 하여금 항상 주의 계명을 따르며, 주를 떠나지 않게 하소서.

 

(2)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는 주의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려 하오니, 이로써 내게 심판과 영벌이 돌아오지 않게 하시고, 대 영혼과 육신을 자비로이 낫게 하시며 보호하소서.

 

이 기도는 바오로 사도의 경고, 즉 부당한 성체와 성혈의 배령을 연상시킨다.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1고린 11,27).

 

 

보라! 천주의 어린양

 

사제가 미사 중 깊은 절을 할 때가 세 번 있다. 성찬 기도의 각 부분 설명(6월호 l09쪽 참조)에서 성체와 성혈 축성 때, 그리고 이제 성체를 보이기 직전의 큰절이다. 그것은 최대의 존경과 흠숭을 표시한다. 사제는 두 쪽으로 나누어진 성체를 약간 높이 들고 세례자 요한이 증언한 말씀(요한 1,29)을 되풀이한다. 이것은 16세기경 미사 중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 보라! 천주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 주여, 내 안에 주를 모시기에 당치 못하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내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이 응답은 10세기에 시작되었고 세 번 반복하며 가슴을 쳤으나 현재는 가슴을 치는 대신 겸손과 신뢰의 정을 드러내며 한 번만 한다. 예수께서 어떤 백인 대장의 하인을 고쳐 주시려고 하자 그 백인 대장은 주님을 모실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한 말씀으로 다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고 간청한 내용이다(마태 8,8 참조).

 

 

사제의 영성체

 

왜 사제가 맨 먼저 영성체하는가. 손님을 초대한 착한 주인이라면 먼저 공동체의 손님들을 접대하며 성체 분배의 성찬을 베풀고 맨 나중에 자신이 영성체함이 옳지 않은가. 옛날에 다소의 논란도 있었지만 동방이나 서방 모두 초기부터 주례 주교나 신부가 맨 먼저 영성체한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신학적으로 보면 사제의 우선 순위는 특권이나 성직 계급의 교만성이 아니고 공동체의 목자요 “모든 이의 종”(마르 9,35)으로서 평가되고 있다.

 

영성체의 정신은 하느님 아버지께 스스로 몸바쳐 이룩한 은혜로운 그리스도의 희생에 온전히 참여하고 영성체한 사람도 자기 자신을 바쳐 그리스도와 동참하는 것이다. 손님을 초대한 성찬의 주인은 사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사제는 예수님이 초청한, 즉 먼저 영성체하고 또한 먼저 자신을 희생하고 바칠 준비가 된 사람이다. 그러므로 일반 사회의 식사 초대와는 다르다.

 

사제는 성체를 영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은 나를 지키시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또한 성혈을 영하면서 “그리스도의 피는 나를 지키시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라고 동반 기도를 외운다.

 

 

교우들의 영성체

 

“밥 먹어라.” “식사합시다.” “진지 잡수세요.” 이것은 우리의 식사 전 인사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주의를 준다. “천천히 먹어라. 너무 빨리 먹으면 체한다.” 한편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과월절 음식을 준비하여라”(마르 14,15).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14,22).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요한 6,53). 즉 영성체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러면 영성체를 얼마나 자주 해야 하는가. 초세기에는 대죄인이 아니면 영성체하였다. “그날에 새로 신도가 된 사람은 삼천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믿는 사람들은 한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빵을 나누었다(사도 2,44-46).

 

 

영성체가 두려운가

 

4세기경부터 성찬은 가정에서 성당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식탁 대신 제단이 들어섰다. 제대는 사람이 아닌 신의 식탁처럼 생각되었다. 성찬이라기보다 희생 제사란 인상을 주었다. 9세기부터는 서방 교회에서 성체 공경의 신심을 강조하여 성찬에 쓸 빵을 수도원 또는 성직자가 독점 제조하였고 그 빵을 제병(祭餠; hostia)이라고 하였다. 제병을 희생 제물로만 보아 빵을 떼어 나눈다는 뜻이 없어졌다. 4세기부터 영성체를 드물게 하는 습관이 생겼고 9세기에는 부활절에 한 번 영성체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더욱이 13세기에는 성체를 현시하고 흠숭하는 예식이 생겼으며 ‘신’(神)영성체’의 관습도 나타났다. 즉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시겠다는 간절한 소망과 뜻을 표시하면 실제의 영성체와 같은 효험과 은혜를 받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미사 중 성체를 받아 모시지 않는 것이 정상인 때도 있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5년) 이후 교회는 신자들이 자주 혹은 매일이라도 미사에 참여하고 영성체하도록 권고한다. 특히 참여한 미사 중에 축성된 성체를 받아 모시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미사 지침 56항). 모든 신자는 첫영성체 후 교회의 규정에 따라 적어도 일년에 한 번 부활절에 영성체할 의무가 있다(교회법 제920조). 또한 성체를 영한 신자라도 같은 날 자신이 참여하는 성찬 거행 중에서만 다시 영성체할 수 있다. 즉 하루에 두 번 미사에 참여하여 두 번 성체를 모실 수 있다.

 

 

올바른 영성체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하였다. “그러니 올바른 마음가짐 없이 그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나누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사람은 그렇게 먹고 마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입니다”(1고린 11,27.29).

 

영성체는 거룩한 행위이다. 그래서 미사의 목표라고 하였다. 음식은 맛으로 먹듯이 영성체하는 이도 예수께 맛들여야 한다. 맛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다. 사랑을 저버림은 죄이다. 그러므로 대죄 중에 성체를 받아 모심은 그리스도께 대한 모독이요 또 하나의 중죄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체하며 나아가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팔아 버린 가리옷 사람 유다와 비슷한 죄이다. 이것을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래서 통회하고 고백하라는 것이다. “먼저 자신을 살펴보고 빵을 먹고 잔을 마셔야 합니다”(1고린 11,28). 고백은 영성체를 위해 필요한 증거이다.

 

부당한 영성체는 언제든지 피해야 한다.

 

예수님을 음식으로 받아 먹었다면 당신도 남을 위한 음식이 되어야 한다. 남의 밥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사랑이다.

 

+ 그리스도의 몽

? 아멘.

 

아멘은 믿음과 고백의 표시다. ‘아멘’ 하고 자리로 돌아와 무슨 생각을 하였는가. 남을 힐금힐금 쳐다보고 공상에 빠지지는 않았는가. 지금은 예수께서 당신 안에 현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그렇다면 그분께만 정신을 집중하여라. 감사를 드려라. “한 말씀만 하소서. 내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는가. 은혜를 받았으면 돌려 드릴 생각을 하여라. 하느님께 돌려 드리고, 이웃에게도 밥이 되어야 한다.

 

“주여, 우리가 입으로 배령한 것을 깨끗한 마음으로 모시게 하시고, 또한 현세의 선물이 우리에게 영원한 신약이 되게 하소서.”

 

[경향잡지, 1992년 10월호, 안문기 프란치스꼬(천안 봉명동본당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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