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전례] 주님의 현존에 관한 말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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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13 | 조회수2,570 | 추천수0 | |
[전례] 주님의 현존에 관한 말씀 (1)
교황청 예부성성은 1967년 5월 25일 “성체신비공경에 관한 훈령”(Eucharisticum mysterium)을 내면서 그 이전에 나온 몇몇 문헌들에서 언급했던 성체신비에 관한 원칙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해 신자들과 성직자들에게 실천규범들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 규범들 가운데 여기서는 우선 전례거행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께 관한 조항을 들고, 그 조항의 기초가 되는 성서구절을 살펴보기로 한다.
“신자들은 특히 주님께서 몸소 교회의 전례거행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과 관련하여 성체의 신비를 더 깊이 이해하도록 교육을 받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신자들의 집회 안에 언제나 현존하신다(마태 18,20 참조). 또한 그분께서는 교회 안에서 성서가 읽혀질 때 그분께서 몸소 말씀하시는 것이 되도록 말씀 안에도 현존하신다. 그리고 성찬에서 ‘사제직을 통하여 지금 봉헌하는 분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때 봉헌되신 바로 그분’(트리엔트 공의회, 미사에 관한 교령, 2장)이 되도록 사제의 인격 안에도 현존하시고, 또 무엇보다도 성체의 형상 안에 현존하신다. 사실 유일하게, 실체적으로 한결같이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전체로 온전히 이 성사 안에 현존하신다. (성체의) 형상 아래 계시는 그리스도의 그러한 현존은 ‘다른 현존 양식들은 실제적이 아니라고 하는 그런 배타적 뜻으로가 아니라 탁월한 뜻으로 실제적이라고 말한다’(바오로 6세, 신앙의 신비, 39항)”(9항).
여기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7항)의 가르침이 그대로 담겨있다. “전례헌장”과 “성체신비” 훈령 그리고 “신앙의 신비” 회칙은 주님께서는 당신 이름으로 모인 신자들의 집회 안에 현존하시고, 당신 말씀 안에 현존하시며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신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성체성사 안에 계시는 주님의 현존은 유일하고 탁월하게 실제적인 현존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이렇게 이해할 수 있었는가?
이 글에서는 구약성서 안에 나타난 주 하느님의 현존과 신약성서의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그리스도의 현존에 관한 말씀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위에서 말한 ‘현존’에 관한 개념을 이해하는 길을 준비하고자 한다.
가) 구약성서
우리는 구약성서 곳곳에서 당신 백성 가운데에 계시는 주 하느님의 현존에 관한 말씀을 찾아볼 수 있다. ‘선조들’과 출애굽의 하느님께서는 다른 백성들의 신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에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 하느님 야훼께서는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주시는 분이시다. 그처럼 가까이 계셔주시는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어디 또 있겠느냐?’(신명 4,7).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운명을 함께하시고 그들 가운데에 사시며, 그들 역사의 변천 속에 현존하신다. 이스라엘은 예배를 드릴 때에는 성전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어려울 때와 해방의 순간들에 하느님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만났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살았다.
1) 하느님께서는 족장들에게 약속하시고 복을 내리시며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과 계약을 맺으시는 하느님, 지존하신 주님으로 현존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을 주겠다고 맹세하신다(창세 12,7; 13,15; 15,4.7; 17,8.16.19.21). 그리고 재물과 양떼를 많게 하시고 땅의 소출을 풍부히 내려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창세 13,6; 25,8; 26,12-14). 또한 다른 민족들의 침략과 수탈에서 이스라엘을 지켜주시며 도와주신다(창세 12,10 이하; 29-31장; 32-33장; 41장 참조).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시고(창세 17장), 그들의 순종을 요구하신다(창세 22장). 이스라엘의 족장사를 보면 하느님의 현존은 백성에게 질서를 세워주는 힘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기초를 놓으신 분이시다.
2) 출애굽에서 하느님의 현존은 에집트에서 억압받고 있던 이스라엘 부족을 해방하고 구원하시는 현존으로 나타난다. 하느님께서는 시나이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그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을 종살이에서 해방시키라는 사명을 주신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출애 3,12)라는 약속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곧 하느님께서 그의 힘이 되어주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야훼께서는 사명을 완수하도록 당신 ‘종’ 곁에 현존하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던 거룩한 밤에 당신 백성을 위하여 ‘밤새워 가며 지켜주셨다”(출애 12,42). 그분께서는 파라오의 완강한 반대를 꺾으시고 이스라엘을 에집트 밖으로 이끌어내셨다. 이에 이스라엘은 찬양의 노래를 불렀다. “나는 주님을 찬양하련다. 그지없이 높으신 분. 기마와 기병을 바다에 처넣으셨다. 주님께서는 힘있게 나를 붙드시어 나를 살려주셨다 … 주님께서는 용사 그 이름 야훼이시다”(출애 15,1-3).
3) 시나이산에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하느님의 현존은 당신 백성을 세우신다. 도망쳐 나와 아직 꼴도 갖추지 못한 무리가 계약의 거룩한 사슬로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정비된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피의 예식으로 축성되었다. 이 예식으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셨다(출애 19; 24장 참조).
4) 하느님께서는 삭막한 광야를 지나는 동안 줄곧 당신의 거룩한 백성을 이끄셨다. 주님께서는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백성을 이끄시는 안내자로 현존하셨다(출애 40,36-38).
5) 앞으로 나가는 이스라엘 앞에 다른 민족들이 두려움에 떨었다(출애 15,15-16). 그들은 이스라엘을 막을 수 없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고, 그분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민수 23,21). 주님께서는 모세와 함께 계셨던 것처럼 여호수아와 함께 계신다(여호 1,5). 여기서 하느님의 현존은 땅을 주심으로 목적을 달성한다.
6) 하느님께서는 약속된 땅에 들어간 백성 안에 항구히 현존하신다. 하느님께서는 계약을 지키시는 분으로 현존하신다. 한편으로 하느님께서는 심판주로 이스라엘에 현존하시기도 한다. 백성이 법을 어기고 계약에 충실하지 않으면 그들에게 벌을 내리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계약에 충실하면 주님께서는 백성에 강복하시고, 그 백성을 모든 민족들 위에 들어높이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가축의 새끼들을 많게 하시고 적들에게 승리를 거두게 하신다(신명 28,1-14). 이때의 주님께서는 복을 내리시는 하느님으로 이스라엘에 현존하신다. [경향잡지, 1996년 6월호, 김종수 요한(주교회의 사무차장 · 신부)]
[전례] 주님의 현존에 관한 말씀 (2)
7) 이스라엘에게 주님의 특별한 현존은 성전에서 이루어졌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 가운데에 현존하셨는데, 먼저는 장막 안에, 그 다음에는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세운 성전 안에 사셨다. 우리는 이러한 현존을 머물러 사시는 하느님의 현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명령하셨다. “내가 너희 가운데에 살 수 있도록 내가 있을 성소를 지어라”(출애 25,8).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는 일을 마치고 외쳤다. “주님께서는 어두운 구름 속에 사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께서 영원히 사실 수 있도록 당신의 거처를 하나 세웠습니다”(1열왕 8,12-13). 성전에 있는 계약의 궤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주님의 현존을 볼 수 있게 하는 표징이었다(1사무 4-6; 2사무 6; 1열왕 8). 하느님의 이 현존은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만나주는 곳이다. “그곳은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 주는 곳이다. 거기에서 나의 영광을 나타내어 거룩한 곳이 되게 하리라”(출애 29,43).
열심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현존하시는 주님께 땅의 첫소출을 바치기 위하여 성전에 올라갔다(신명 26,1-11). 희생제물들은 사제들의 손으로 ‘주님 앞에’(출애 29,11.42) 바쳐졌다. 레위기는 성전에 주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체험해 온 백성의 예배생활을 정확하게 규정하고 있는 예식서이다. 그 백성은 친교의 희생제사로 주님과 일치하고 희생된 숫염소의 피로써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빌었다. 그 밖에 여러 가지 예물을 바쳐 하느님의 다스리심에 감사했다. 그들은 주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드리는 예배 안에 현존하시며 당신 백성과 함께 계셨다.
8)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현존하셨다. 이것은 거룩한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더욱 특별한 현존방식이다. 주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을 만나러 오셨다. 히브리인들의 하느님은 보는 하느님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 데에 특징이 있다. 그래서 구약의 종교는 직관적인 명상의 종교가 아니라 들음과 믿음의 종교였다. 시나이산에서 있었던 계시는 하느님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이다(신명 4,12.15 참조).
주님께서는 이미 ‘선조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다. 주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말씀을 건네셨다. 또 불붙는 떨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네 선조들의 하느님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출애 3,6). 거룩한 산에서는 주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며(출애 19,3 이하) 당신 백성에게 계명을 주셨다(출애 20,1 이하). 이 계명을 우리는 주님의 ‘열 가지 계명(십계명)’이라고 한다(신명 4,13; 10,4). 주님께서는 모세 다음에도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 백성에게 계속 말씀하셨다. 성서는 이것을 일러서 주님께서 예언자들의 입에 당신의 말씀을 담아주셨다고 표현한다(신명 18,18; 예레 1,9). 에제키엘은 하느님께서 백성에게 하신 말씀이 적혀있는 두루마리를 하느님께 받아 삼켰다(에제 3,1 이하). 예언자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을 전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사람들이다(에제 2,7; 3,4 참조).
주님께서는 창조적이고 힘있는 말씀을 하시며 이스라엘에 현존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은 빈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직접 활동하시는 표시이다. 시편의 저자는 주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하늘을 만드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시편 32,6). 이러한 확신은 이사야에게서도 발견된다. 비가 하늘에서 떨어져 땅을 적시어 결실을 내게 하지 않고서는 되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 돌아오지는 않는다”(이사 55,10-11). 이처럼 주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뜻을 이루시면서 이스라엘에 현존하신다. 어떤 일을 시작하고 끝내는 것은 바로 이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신명기의 저자는 이야기를 종합적으로 마감하면서 몇 차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주님께서는 명령의 말씀으로 이스라엘에 현존하신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하느님의 법으로 교육을 받고 인도되었다. 신명기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백성의 자랑을 이야기한다. “너희는 그것들을 성심껏 지켜야 한다. 그것을 보고 다른 민족들이 너희가 지혜있고 슬기롭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 모든 규정을 듣고, ‘정녕 지혜있고 슬기로운 백성은 이 위대한 민족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4,6). 하느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다(신명 30,15 이하). 생명의 말씀을 지니신 주님께서는 백성에게 거룩하게 살라고 명령하시는 지존하신 주님으로 이스라엘에 현존하신다.
9)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주님의 현존은 다만 복을 내리고 만나고 믿을 만한 분으로 보이시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예언자들은 주님의 현존도 마지막 때를 위한 약속 안에서 이해했다. 그것은 당신 백성이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그 백성 가운데에 계신 하느님의 새롭고 영원한 현존이 될 것이다. 에제키엘은 “이스라엘과 유다 가문의 죄악이 얼마나 크고 무서운지 너는 아느냐? 주님께서 이 나라를 내버리고, 돌보지도 않는다고 하며 온 나라에 유혈참극을 벌인 것들, 부정부패로 이 수도를 채운 것들”(9,9)이기에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떠나실 것이라고 경고하며, 주님께서는 앞으로 새 예루살렘의 새 성전에 머무르실 것이라고 선포한다. “너 사람아, 여기는 나의 옥좌가 있는 자리다. 내 발판이 놓인 자리다. 나는 여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영원히 머물 것이다”(43,7).
하느님의 새로운 현존은 이제 새 예루살렘에서 계속될 것이다. 이 도시의 이름은 이제부터 “주님께서 여기에 현존하신다.”(야훼 삼마 : 48,35)는 상징이 될 것이다. 이사야도 새롭게 정화된 시온에 계실 하느님의 현존을 말하고 있다.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고 심판하는 입김과 쓸어가는 바람으로 피에 물든 예루살렘을 속속들이 깨끗하게 하시리라. 그때 주님께서 시온산 전역과 모인 회중 위에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솟아오르는 연기와 환한 불길로 나타나시리라”(4,4-5). 또 이사야는 유다 왕국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도래할 희망의 표징을 예고한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7,14). 이렇게 해서 주님의 현존은 이제 ‘처녀’에게서 태어나리라고 약속된 아기와 관련된다. [경향잡지, 1996년 7월호, 김종수 요한(주교회의 사무차장 · 신부)]
[전례] 주님의 현존에 관한 말씀 (3)
우리는 이제까지 여러 가지로 하느님의 현존을 묘사하고 있는 성서 구절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의 현존을 다음과 같이 다른 관점에서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당신의 거룩한 백성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우리는 공동체적이고 교회적인 현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산에서 맺은 계약으로 그들의 하느님이 되시고, 이 백성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다. 이로써 이스라엘 공동체는 주님 현존의 ‘성사적’ 표징이 되었다.
- 모든 경우에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는 주님의 현존은 활동적인 현존이다. 이것은 단순히 학적으로 ‘어디에나’ 있는 어떤 실재로 그 범주를 분류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살아계시고 그들을 위해 일하시는 분으로 현존하신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세우시고 이끄셨으며 땅을 유산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 하느님께서는 백성이 충실하지 않을 때 그들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성전에서 기도하는 사람들과 예물을 바치는 사람들과 친교를 나누시고 그들과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 불붙는 떨기로 모세에게 당신을 드러내신 것(출애 3,14)은 그분께서 정적인 분이 아니시고 이스라엘을 위해 그들 가까이 계시는 분이심을 뜻하는 것이다.
- 구세사에 나타나는 하느님께서는 인간 역사에 언제나 개입하시는 분으로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신다. 이 말은 주님께서 영원으로부터 마음에 품고 계신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당신을 나타내 보이신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역사의 주인공은 하느님 자신이시다. 이러한 현존을 우리는 역사 · 구원적 현존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이스라엘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은 여러 가지 표징으로 나타난다. 주님께서는 꿈에도 나타나시고 어떤 영상으로도 나타나시며 신비로운 일이나 구름, 불기둥으로도 나타나신다. 그 하느님께서는 성전에도 계시고 예배에도 계시며 예언자가 선포하는 말씀 안에도 현존하신다. 그리고 이 현존은 언제나 인격적인 현존이다. 다른 이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시는 분은 바로 주님 자신이시다. ‘너’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이는 바로 ‘나’이다. 주님의 현존을 신화적으로 해석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만났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나) 신약성서
1) 당신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은 나자렛의 예수님 안에서 절정에 이른다. 사람이 되신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성사’이시다. 옛날 족장들에게 약속하신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 현존하신다. 옛 계약을 맺으시고 족장들에게 하신 하느님의 모든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2고린 1,20 참조).
새로운 백성을 해방하고 구원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현존은 그리스도 자신과 그분의 희생적 봉헌 안에서 실현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골로 1,19-20).
하느님의 성령께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는 고난받는 종의 사명을 성취하시는 예수님과 언제나 함께하신다(마르 1,10.12 참조).
영적인 이스라엘인 교회와 맺으신 하느님의 새로운 계약은 성자 예수님의 희생으로 맺어지고 확인되었다.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루가 22,20).
예수께서는 천상 성전을 향한 순례의 길에 앞장서 가신다. 성부께서는 성자를 통하여 교회를 이끄시고 교회에 안식과 땅과 유산을 주신다(히브 3-4장 참조).
요한 복음서는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 안에 하느님의 심판이 현존한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한다. “그를 믿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벌써 죄인으로 판결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3,18-19).
사람에게 복을 내리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현존하신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에페 1,3).
사람들 가운데에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새 성전은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2,19-21).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강생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에 당신의 거처를 정하셨다(요한 1,14 참조).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라는 뜻을 지닌 임마누엘은 바로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님이시다. “이 모든 일로써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 1,22-23).
구약의 예식과 제사는 새로운 계약의 대사제이신 예수께서 단 한 번 완전하게 봉헌하신 참 제사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께서 드리신 제사가 ‘실재’라면 구약의 여러 예식과 제사는 ‘예표’일 뿐이다. “율법은 장차 나타날 좋은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고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해마다 계속해서 같은 희생제물을 드려도 그것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 사제가 날마다 성전에서 예배의식을 거행하며 같은 희생제물을 자주 드리더라도 그 제물들이 결코 죄를 없애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오직 한 번 희생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죄를 없애주셨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효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셔서 당신의 원수들이 당신의 발 아래 굴복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거룩하게 만드신 사람들을 영원히 완전하게 해주셨습니다”(히브 10,1.11-14). 예배를 드림으로써 이루어지는 하느님과 우리의 만남이 이제 그리스도의 거룩한 봉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것은 성찬기도의 마침 영광송에서도 확인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과 더불어 전능하선 천주 성부 온갖 영예와 영광을 세세에 영원히 받으시나이다.” [경향잡지, 1996년 8월호, 김종수 요한(주교회의 사무차장 · 신부)]
[전례] 주님의 현존에 관한 말씀 (4)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던 구약의 역사는 끝나고, 이제 성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분명하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온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 아들에게 만물을 물려주시기로 하셨습니다”(히브 1,1-2). 예수께서는 우리가 감각할 수 있게 인격으로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이시다. 성부께서는 나자렛 예수님이라는 인격화된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현존하신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
2) 신약성서는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의 현존도 증언한다. 예수께서는 돌아가신 뒤에도 교회라는 ‘성사적’ 표징 안에서 계속해서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 이 사실은 예수께서 ‘넘겨지시던’ 밤에 제자들과 나누신 대화의 주제였다. 스승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고아로 버려두시지 않고 다시 그들에게 돌아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요한 14,18). 그분께서는 지금은 떠나시지만 다시 돌아오실 것이다(요한 14,28). 뿐만 아니라 스승의 떠남은 제자들에게 기쁨의 동기가 된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6,5 이하).
그러므로 헤어짐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예수께서는 얼마 안가서 제자들을 보러 다시 오실 것이다(요한 16,16 이하). 예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당신 교회 안에 계속해서 현존하신다.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 표징들을 통하여 교회 안에 계속해서 현존하실 것이다.
ㄱ) 그리스도께서는 믿음과 형제적 사랑을 실천하며 기도하는 회중 안에 현존하신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 이 말씀은 교회가 바치는 기도의 공동체성과 기도하는 공동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의 덕으로 교회가 오류에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 회중의 특정은 주님의 이름으로(‘내 이름으로’) 모였다는 데에 있다 ‘내 이름으로’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어 고백하며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주님의 현존은 제자들이 믿음과 사랑으로 공동체를 이루는 데에서 드러난다. 그러한 공동체가 곧 주님 현존의 표징이다.
형제적 사랑은 마태오 복음 18장 전체의 주제이다. ‘보잘것없는 사람들’에 대한 커다란 관심과 그들을 죄짓게 하는 데에 대한 책임, 잃은 양 한 마리에 대한 사목적 배려, 형제적인 충고와 교정, 나에게 해를 끼친 형제에 대한 용서, 무자비한 빚쟁이의 비유는 모두 형제적 사랑이라는 주제를 여러 가지로 묘사한 것이다. 예수께서 현존하시는 제자들의 공동체는 분명 형제적 사랑의 공동체이며 ‘형제들’의 공동체이다.
요한의 첫째 편지는 빛으로 나아가 생명을 얻고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는 데에 꼭 필요한 조건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들은 모두 형제적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으로 모아진다.
“빛 속에서 산다고 말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아직도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자입니다. 자기의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2,9-10).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속에 그대로 머물러있는 것입니다”(3,14). “우리가 명령받은 대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3,24-25). “하느님의 아들이 오셔서 참 하느님을 알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참되신 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5,20).
예수께서는 이 주제를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써 이미 강조하셨다. 또한 이 비유는 그리스도께서 믿는 이들 안에 계시고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상호 통교와 현존에 대해 말하고 있다.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있어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요한 15,9-10.17).
이렇게 주 예수께서는 믿음과 형제적 사랑을 설천하며 기도하는 공동체 안에 현존하시며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계심을 보여주신다. 그 공동체는 바로 주님 현존의 표징이다.
ㄴ)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을 선포하고 듣는 회중 안에 현존하신다. 주님께서는 복음이 선포되는 바로 그곳에 계신다. 그곳에 현존하시며 회중에게 말씀을 선포하신다. 그러므로 말씀을 선포하고 듣는 교회는 주님 현존의 표징이 된다.
바오로 사도는 누구보다도 말씀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편지에서 ‘주님(그리스도)의 말씀’ 또는 ‘주님(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고 있다(1데살 1,8: 2데살 3,1; 골로 3,16; 1데살 3,2; 2데살 1,8; 로마 15,19).
여기에서 말하는 ‘말씀’ 또는 ‘복음’은 주님(그리스도)께서 직접 선포하시는 말씀을 뜻한다. 사도들이 복음을 선포할 때에 말씀하시는 분은 곧 예수님 자신이시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며 현존하신다.
이러한 이해는 바오로의 펀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가 이번에 다시 가면 그런 자들을 단 한 사람도 그냥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는 증거를 찾고 있던 여러분이 그 증거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대하실 때 결코 약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력하신 분으로 여러분에게 나타나십니다”(2고린 13,2-3). “여러분은 우리가 주 예수의 권위로 여러분에게 지시해 준 것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1데살 4,2).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씀’(1데살 1,6; 골로 4,3; 2디모 4,2; 디도 3,8 등)이라든지 ‘복음’(로마 1,16; 10,16; 1고린 4,15; 15,1; 갈라 2,5. 14; 에페 3,6; 필립 2,22 등)이라는 표현을 자주 완전히 독특한 의미로 쓰고 있다. [경향잡지, 1996년 9월호, 김종수 요한(주교회의 사무차장 · 신부)]
[전례] 주님의 현존에 관한 말씀 (5)
‘나의 말’(‘나의 복음’)이라든지 ‘우리의 말’(‘우리의 복음’)이라는 표현도 바오로에게서 찾아볼 수 있지만(1고린 2,4; 로마 2,16; 16,25; 2고린 4,3; 2데살 2,14; 2디모 2,8 등), 분명히 이 표현도 다른 자리에서 주님 또는 그리스도의 말씀이나 복음으로 부르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복음 선포와 같은 것이다. 그가 전하는 복음은 말로만이 아니라 성령의 힘찬 활동의 뒷받침을 받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우리의 복음’)이 그저 말만으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굳은 확신으로 전해졌기 때문입니다”(1데살 1,5). 여기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고 있는 ‘우리의 복음’은 곧 ‘주님의 말씀’(1데살 1,7)과 똑같은 뜻을 지닌 말씀이다. 같은 편지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바오로 사도의 말이 같은 말씀으로 이해된다. “우리가 늘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에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2,13). 주님께서는 사도가 선포하는 말씀 안에 현존하신다. 사도가 선포하고 회중이 듣는 말씀의 표징 안에 주님께서 실제로 현존하신다.
사도가 선포하는 인간의 말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받은 복음 선포의 사명에서 나온 것이다. 사도의 권위는 주님께서 그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기신 데서 나오는 것이다. 사도들은 주님 ‘말씀의 봉사자들’이다. 바오로 사도는 말씀 또는 복음의 봉사자에 대해서도 말한다.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면서 유다인들과 함께 하느님의 복을 받고 한 몸의 지체가 되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함께 받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신 은총을 받고 내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에 힘입어 이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되었습니다”(에페 3,6-7). “그 복음은 하늘 아래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었고 나 바오로는 그 소식을 전하는 일꾼입니다”(골로 1,23). 또 복음의 ‘종’이라는 표현도 쓴다(로마 1,9). ‘그리스도의 사절’로서 복음을 전한다고도 한다(2고린 5,20). 바오로 사도는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가 전하는 복음과 자기의 사도직이 주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더욱 분명하게 밝힌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 둡니다. 이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나에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1,11-12).
주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들의 ‘봉사’를 통하여 교회 안에 말씀하시는 분으로 현존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 있는 복음 선포자들이 전하는 인간적인 말은 구원사업을 계속하시는 주님의 현존을 ‘성사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표징이 된다. 주님께서는 그 표징을 통하여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당신 자신과 아버지를 계시하신다. 이 말은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은 말씀의 봉사직을 수행하는 공동체, 곧 교회라는 표징 안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주님의 현존을 우리는 공동체적이고 교회적인 특성을 지닌 현존이라고 말한다.
ㄷ) 그리스도께서는 성찬례를 거행하는 회중 안에 현존하신다. 성찬례에 관한 성서 구절은 많다(마태 26,26-29; 마르 14,22-25; 루가 22,15-20; 요한 6,51-59; 1고린 11,23-26; 1고린 10,16-22). 그중에 가장 중요한 말씀은 성체와 성혈을 이루시는 말씀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루가 22,19; 1고린 11,24 참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루가 22,20; 1고린 11,25 참조). 이 거룩한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곧 십자가 위에서 바치실 몸과 피를 마지막 만찬의 자리에 현존하게 하였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명령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바치신 이 몸과 이 피는 교회 공동체가 거행하는 성찬례 안에 다시 현존하게 된다. 성찬례는 주님의 죽음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선포하고 실현한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성찬례 거행을 통하여 주님의 죽음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선포하라고 말한다(1고린 11,26). 그리스도의 피로써 맺은 새로운 계약을 재현하는 제사는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여’ 거행하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성찬례 안에서 계속된다.
요한 복음 6장은 주님의 살과 피의 현존을 강조한다. 이 주님의 살과 피가 그리스도인들의 성찬의 식탁에 그대로 현존한다(1고린 10,21; 11,27).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당신의 살을 먹으라고 주시고,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시려고 당신의 피를 마시라고 주신다. 주님의 살은 참된 음식이고, 주님의 피는 참된 음료이다. 이제 이러한 주님의 현존은 교회가 성찬례를 거행하며 마시는 잔과 ‘쪼개는’ 빵 안에 계속된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의 성찬의 식탁에서 계속되는 주님의 현존을 다음과 같이 반문하며 확인시키고 있다. “우리가 감사를 드리면서 그 축복의 잔을 마시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마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우리가 그 빵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1고린 10,16). 요한 복음은 성찬례 안에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이 하나가 되어 현존함을 강조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6,56). 이 말씀은 빵과 포도주로 거행하는 성찬례 안에 주님께서 현존하시며 그것을 먹고 마서는 사람들과 함께 사시고 통교를 나누신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주님의 이러한 성사적 현존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된다. 그래서 성찬례는 과거만을 회고하지도 않고 현재에만 머물지도 않으며 미래를 향한 종말론적인 전망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성찬례는 천상잔치를 기다리며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거행하는 지상의 잔치이다. “잘 들어두어라.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나는 결코 포도로 빚은 것을 마시지 않겠다”(마르 14,25과 병행구). 성찬례는 주님을 직접 눈으로 뵈오며 나눌 통교(1데살 4,16-17 참조)를 준비하는 성사적 통교이다. 이러한 성사적 통교는 마지막 날에 있을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십시오.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십시오”(1고린 11,26). 이러한 뜻에서 주님의 성찬례의 현존은 ‘종말론적’인 특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성찬례 안에 계시는 주님의 현존은 탁월한 교회적 특징을 지닌다. 바오로 사도는 한 몸인 교회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한 빵에 대해 말한다.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1고린 10,17). 우리는 여기에서 “성찬례가 교회를 이룬다.”라는 전통적인 정의를 이해할 수 있다. 성사 안에 계시는 주님의 현존이 주님을 믿는 이들을 한데 모아 공동체를 이루게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의 빵을 먹음으로써 한 몸이 된다. 믿음으로 모인 공동체는 빵을 쪼개는 예식으로 주님의 죽음을 기념한다. 교회는 이 성사 예식으로 주님을 현존하시게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그 예식 안에 현존하심으로써 존재할 수 있고, 그리스도께서는 성사를 거행하는 교회를 통해서 세상에 현존하신다.
결론적으로, 거룩한 백성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에 관한 신약성서의 기록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 관점에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백성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찬례를 거행하며 말씀을 듣고 선포하고 기도하고 믿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교 회중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이다. 이 회중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리는 구약과 그 방식은 다를지라도 아버지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당신의 백성 안에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주님의 현존은 여러 가지 표징들로 드러난다. 그러나 주님의 현존을 보여주는 여러 표징들 가운데 보편적인 표징은 바로 교회, 세상 안에서 활동하는 그리스도 공동체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의 전체적인 만남은 바로 이 교회 공동체라는 보편적인 표징 안에서 이루어진다. [경향잡지, 1996년 10월호, 김종수 요한(주교회의 사무차장 ·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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