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강론] <성금요일 본문+해설+해설>-김수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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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연 | 작성일2010-03-29 | 조회수2,358 | 추천수0 | |
<주님 수난 성금요일> (금육과 금식)
제1독서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2,13 ─ 53,12 13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없이 존귀해지리라. 14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 15 그러나 이제 그는 수많은 민족들을 놀라게 하고 임금들도 그 앞에서 입을 다물리니,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을 그들이 보고, 들어 보지 못한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53, 1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던가? 주님의 권능이 누구에게 드러났던가? 2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다. 3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4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6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7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8 그가 구속되어 판결을 받고 제거되었지만, 누가 그의 운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던가? 정녕 그는 산 이들의 땅에서 잘려 나가고, 내 백성의 악행 때문에 고난을 당하였다. 9 폭행을 저지르지도 않고 거짓을 입에 담지도 않았건만, 그는 악인들과 함께 묻히고, 그는 죽어서 부자들과 함께 묻혔다. 10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11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12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1(30),2와 6.12-13.15-16.17과 25(◎ 루카 23,46) ◎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 주님, 제가 주님께 피신하니,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의로움으로 저를 구하소서. 제 목숨을 주님 손에 맡기니, 주 진실하신 하느님, 주님께서 저를 구원하시리이다. ◎ ○ 제 모든 원수들 때문에 저는 조롱거리가 되고, 이웃들에게는 놀라움이, 저를 아는 이들에게는 무서움이 되어, 길에서 보는 이마다 저를 피해 가나이다. 저는 죽은 사람처럼 마음에서 잊혀지고, 깨진 그릇처럼 되었나이다. ◎ ○ 주님, 저는 주님을 신뢰하며 “주님은 저의 하느님!” 하고 아뢰나이다. 주님의 손에 제 운명이 달렸으니, 제 원수들과 박해자들의 손에서 저를 구원하소서. ◎ ○ 주님의 얼굴을 주님 종 위에 비추시고, 주님의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힘을 내어 마음을 굳세게 가져라. ◎
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순종을 배우셨고,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4,14-16; 5,7-9 형제 여러분, 14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15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16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5, 7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8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환호송
필리 2,8-9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도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도다.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복음
<요한이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입니다> 18,1 ─ 19,42
○ 해설자 + 예수님 ● 다른 한 사람 ⊙ 다른 몇몇 사람 ◎ 군중
○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셨다. 거기에 정원이 하나 있었는데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들어가셨다. 2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러 번 거기에 모이셨기 때문에, 그분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곳을 알고 있었다. 3 그래서 유다는 군대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다. 4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닥쳐오는 모든 일을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 그들에게 물으셨다. + “누구를 찾느냐?” ○ 5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였다. ⊙ “나자렛 사람 예수요.” ○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나다.” ○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6 예수님께서 “나다.” 하실 때, 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졌다. 7 예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 “누구를 찾느냐?” ○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였다. ⊙ “나자렛 사람 예수요.” ○ 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나다.’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 9 이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사람들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고 당신께서 전에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10 그때에 시몬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칼을 뽑아,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그 종의 이름은 말코스였다. 11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셨다. +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 12 군대와 그 대장과 유다인들의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결박하고, 13 먼저 한나스에게 데려갔다. 한나스는 그해의 대사제 카야파의 장인이었다. 14 카야파는 백성을 위하여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유다인들에게 충고한 자다. 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 제자는 대사제와 아는 사이여서, 예수님과 함께 대사제의 저택 안뜰에 들어갔다. 16 베드로는 대문 밖에 서 있었는데, 대사제와 아는 사이인 그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문지기 하녀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갔다. 17 그때에 그 문지기 하녀가 물었다. ●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요?” ○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 “나는 아니오.” ○ 18 날이 추워 종들과 성전 경비병들이 숯불을 피워 놓고 서서 불을 쬐고 있었는데,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서서 불을 쬐었다. 19 대사제는 예수님께 그분의 제자들과 가르침에 관하여 물었다. 20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였다. 나는 언제나 모든 유다인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 은밀히 이야기한 것은 하나도 없다. 21 그런데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이들에게 물어보아라. 내가 말한 것을 그들이 알고 있다.” ○ 22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곁에 서 있던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며 말하였다. ● “대사제께 그따위로 대답하느냐?” ○ 23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 ○ 24 한나스는 예수님을 결박한 채로 카야파 대사제에게 보냈다. 25 시몬 베드로는 서서 불을 쬐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오?” ○ 베드로는 부인하였다. ● “나는 아니오.” ○ 26 대사제의 종 가운데 하나로서, 베드로가 귀를 잘라 버린 자의 친척이 말하였다. ● “당신이 정원에서 저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않았소?” ○ 27 베드로가 다시 아니라고 부인하자 곧 닭이 울었다. 28 사람들이 예수님을 카야파의 저택에서 총독 관저로 끌고 갔다.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그들은 몸이 더러워져서 파스카 음식을 먹지 못할까 두려워,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29 그래서 빌라도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나와 물었다. ● “무슨 일로 저 사람을 고소하는 것이오?” ○ 30 사람들이 빌라도에게 대답하였다. ⊙ “저자가 범죄자가 아니라면 우리가 총독께 넘기지 않았을 것이오.” ○ 31 빌라도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 “여러분이 데리고 가서 여러분의 법대로 재판하시오.” ○ 그러자 유다인들이 대답하였다. ⊙ “우리는 누구를 죽일 권한이 없소.” ○ 32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어떻게 죽임을 당할 것인지 가리키며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33 그리하여 빌라도가 다시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불러 물었다. ●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 34 예수님께서 되물으셨다. +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 ○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 35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 36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 37 빌라도가 물었다. ●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 38 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 “진리가 무엇이오?” ○ 빌라도는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다인들이 있는 곳으로 나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 “나는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 39 그런데 여러분에게는 내가 파스카 축제 때에 죄수 하나를 풀어 주는 관습이 있소. 내가 유다인들의 임금을 풀어 주기를 원하오?” ○ 40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외쳤다. ◎ “그 사람이 아니라 바라빠를 풀어 주시오.” ○ 바라빠는 강도였다. 19, 1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려다가 군사들에게 채찍질을 하게 하였다. 2 군사들은 또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히고 나서, 3 그분께 다가가 이렇게 말하며 그분의 뺨을 쳐 댔다. ⊙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 4 빌라도가 다시 나와 말하였다. ● “보시오, 내가 저 사람을 여러분 앞으로 데리고 나오겠소. 내가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라는 것이오.” ○ 5 이윽고 예수님께서 가시나무 관을 쓰시고 자주색 옷을 입으신 채 밖으로 나오셨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 “자, 이 사람이오.” ○ 6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보고 외쳤다. ⊙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 빌라도가 말하였다. ● “여러분이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목을 찾지 못하겠소.” ○ 그러자 7 유다인들이 빌라도에게 대답하였다. ⊙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소. 이 율법에 따르면 그자는 죽어 마땅하오.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였기 때문이오.” ○ 8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9 그리하여 다시 총독 관저로 들어가 예수님께 물었다. ● “당신은 어디서 왔소?” ○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0 그러자 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는 당신을 풀어 줄 권한도 있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 11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 “네가 위로부터 받지 않았으면 나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너에게 넘긴 자의 죄가 더 크다.” ○ 12 그때부터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 줄 방도를 찾았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외쳤다. ◎ “그 사람을 풀어 주면 총독께서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오. 누구든지 자기가 임금이라고 자처하는 자는 황제에게 대항하는 것이오.” ○ 13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리토스트로토스라고 하는 곳에 있는 재판석에 앉았다. 리토스트로토스는 히브리 말로 가빠타라고 한다. 14 그날은 파스카 축제 준비일이었고 때는 낮 열두 시쯤이었다. 빌라도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 “보시오, 여러분의 임금이오.” ○ 15 그러자 유다인들이 외쳤다. ◎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다. ● “여러분의 임금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이오?” ○ 수석 사제들이 대답하였다. ⊙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 ○ 16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넘겨받았다. 17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터’라는 곳으로 나가셨다. 그곳은 히브리 말로 골고타라고 한다. 18 거기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도 예수님을 가운데로 하여 이쪽 저쪽에 하나씩 못 박았다. 19 빌라도는 명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달게 하였는데,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고 쓰여 있었다. 2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 도성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그 명패를 읽게 되었다. 그것은 히브리 말, 라틴 말, 그리스 말로 쓰여 있었다. 21 그래서 유다인들의 수석 사제들이 빌라도에게 말하였다. ⊙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쓸 것이 아니라, ‘나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 하고 저자가 말하였다고 쓰시오.” ○ 22 빌라도가 대답하였다. ● “내가 한번 썼으면 그만이오.” ○ 23 군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그분의 옷을 가져다가 네 몫으로 나누어 저마다 한몫씩 차지하였다. 속옷도 가져갔는데 그것은 솔기가 없이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었다. 24 그래서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 “이것은 찢지 말고 누구 차지가 될지 제비를 뽑자.” ○ “그들이 제 옷을 저희끼리 나누어 가지고, 제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았습니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래서 군사들이 그렇게 하였다.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28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말씀하셨다. + “목마르다.” ○ 29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30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 “다 이루어졌다.” ○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무릎을 꿇고 잠시 묵상> ○ 31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33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35 이는 직접 본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므로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이 믿도록 자기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36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37 또 다른 성경 구절은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 하고 말한다. 38 그 뒤에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자 그가 가서 그분의 시신을 거두었다. 39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 40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관습에 따라,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쌌다. 4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정원이 있었는데, 그 정원에는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다. 42 그날은 유다인들의 준비일이었고 또 무덤이 가까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그곳에 모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해설과 묵상
제1독서(이사 52,13-53,12) 해설 <‘하느님의 종’이 받은 수난은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을 위한 구원의 원천이 되고, ‘하느님의 종’에게 영광을 가져다준다>
종에 관한 마지막 노래는 아마도 원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예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는 종으로 인격화하고 있다. 타르굼(아람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의 히브리 전승에서는 이미 구체적인 인물(人物)이 되어 있다. 그리스도교 전승은 나자렛 예수님으로 오신 메시아와 동일시하고 있다. 이 부분은 분명히 제2이사야 작품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네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1. 52,13-15: 하느님이 당신의 종이 비천하게 된 다음에 들어 높임을 받으리라고 선언하신다. 2. 53,1-6: ‘종’이 들어 높여진 것을 본 백성은 놀라서 하느님께 벌 받은 줄로 여겼던 그 분이 ‘올바른 사람’, 참된 하느님의 종이었음을 깨닫는다. 결과적으로 죄인은 그 ‘종’이 아니라 오히려 백성 자신임이 드러난다. 3. 53,7-10: ‘종’의 인내에 관하여 반성하도록 그리고 그 ‘종’이 하느님께 ‘백성’(많은 사람, 곧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을 위해 속죄의 제사를 바치며 애원하신 사실에 관하여 반성하도록 백성에게 끊임없이 촉구한 예언자의 개입이 나온다.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았다.”(10절) 4. 53,11-12: 하느님이 예언자의 요구를 승인하고, 종의 수난이 ‘많은 사람들’에게 올바름을 펼치고, 종 자신은 생명을 얻게 될 것이며, 권세 있는 자들을 제치고 들어 높여질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이상의 예언은 골고타의 사건을 깨닫는 데 근본적인 열쇠가 된다. ‘종’에게 많은 메시아적 예언들이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종은 ‘햇순’(53,2)이며, 이사 4,2.11; 즈카 3,8.6.12에 나오는 ‘새싹’과 같다. 또한 그 종은 즈카 12,10에 나오는 ‘외아들’이기도 하다. 그 종에게서 속죄의 모든 제사가 완수되고 완성된다. 하느님이 땅위에 사는 모든 사람(인류 가족)에게 복을 내려 주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시키는 분이 그 ‘종’이다(창세 12,3). 이 대목은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 백성의 역사 현실에 대한 예언, 즉 영적 해석이다. 이 예언은 ‘이사악의 결박’(히브리인들은 ‘이사악의 제사’를 가리키기 위해 이렇게 표현했다.)을 효과적으로 최후까지 몸소 생활하고 실천하는 그 ‘종’만이 죄악을 제거할 수 있고, 인류를 하느님과 화해시킬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화답송(시편 31[30],2와 6.12-13.15-16.17과 25[◎ 루카 23,46]) 해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이 시편은 ‘하느님이 주인이시라는 사실’에 관한 시편 가운데 하나다. 이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참혹한 시련을 받으면서 살고 있지만, 그 사실 자체가 하느님 선택의 표시가 되고, 하느님이 선택된 사람에게 당신의 친밀함을 드러내시는 증거가 된다는 확신을 말해 준다. 이 시편을 루카 23,46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그리스도께서 읊으신다. 이 절규는 전례적으로 종의 노래 다음에 위치함으로써 십자가에 못 박힌 분의 기도가 되고, 당신 아버지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위탁하심을 나타낸다. 이 시편으로써 전례 모임의 회중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처할지라도 자기의 신뢰를 거침없이 외칠 수 있다. 하느님의 능하신 팔은 드러나고야 말 것이다.
제2독서(히브 4,14-16; 5,7-9) 해설 <예수께서는 순종을 배움으로써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첫째 독서에서 교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수난하는 종으로 제시한다. 그 종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모든 사람을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셨음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러나 둘째 독서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최고 사제(司祭)로서 우리에게 제시한다. 두 가지 점이 그분을 비길 데 없는 최고 사제로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의 지성소(至聖所)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지 않은’(9,11) 천상적인 지성소라는 점이고, 한편으로 ‘황소나 암송아지 피’를 바치지 않고, 당신 자신과 당신의 피를 바치신다는 점이다(참조. 9,13-14). 이상에 말한 두 가지 점은 이 최고 사제의 온전한 인간성(人間性)을 강조하고 있다. 그분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 해서 당신의 인간성을 조금도 줄어들게 하지 않으신다. 사실 그분은 우리와 아주 똑같은 사람으로서 고통을 받으셨다. 그 수난은 가장 비참한 사람의 조건을 당신 것으로 삼는 수난이었다. 또한 그분이 죄 없으신 분이라 해서(4,15) 인간성에 초연하지 않고, 사람으로서 고뇌와 유혹을 견디고 결단을 내리셔야 했다. 그런 결단으로써 죄악은 선택을 잘못하여 타락한 사람의 것임을 입증하셨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기보다는 처음으로 ‘유일한 참된 사람’이 되신 분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류를 괴롭히는 유혹자의 손을 과감히 뿌리치고 벗어난 첫 사람이셨다. 예수께서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왔기 때문에 유혹과 수난을 겪어야 할 줄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우리는 충만한 신뢰심으로 그분께 가까이 갈 수 있고(4,16), 그분의 죽음(그분은 죄가 없었으므로 ‘죄의 대가’일 수는 없었다.)은 우리 죄의 대가가 되었고,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5,9). 끝으로, 사제이신 그리스도의 마지막 모습이 남아 있다. 그분의 생애는 하느님께 올라가는 길고 고뇌에 찬 기도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5,7). 그리고 하느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신 것은 단지 그분이 하느님에 의하여 부활하셨다는 사실에서뿐 아니라, 먼저 당신의 죽음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 의해 그분께 대한 우리의 신뢰가 다져지는 것이다.
복음(요한 18,1-19,42) 해설 <네 번째 복음서인 요한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고통보다도 그분의 신성(神性)을 강조한다>
요한의 수난 이야기에는 요한의 전언(傳言) 전체가 함축되어 있다. 실상 복음서 전체가 집중하는 시간이 수난이다. 첫째 부분(18,1-27)에서는 두 부분이 하나의 중심을 놓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18,1-11(체포)은 예수님의 세 번에 걸친 고백에 집중되어 있다. “바로 내가 그 사람이다.”(5.6.8절)라는 문장은 단순히 그들이 찾고 있는 자가 바로 당신이라는 말이 아니다. “바로 내가 그 사람이다.”라는 명제 또한 신학의 특징을 가리킨다. 이 단언은 그를 잡으러 온 자들을 땅에 쓰러지게 하는 위력이 있었다(6절). 그 맞은편에는 베드로의 세 번에 걸친 부인(15-27절)이 나온다. “나는 그 사람이 아니다.”(17.25절) 그리고 중심에서는(12-14절) 최고 사제에 관한 예언을 상기시키고 있다. 대사제는 한 사람이 온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고 말한다. 여기에 수난의 극적인 사건이 성립되고 있다. 예수님의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를 유다가 배반하고, 베드로가 부인하고, 모두가 부인했다. 모두 그분을 죽였다. 그러나 바로 죽어가는 그분 안에서 모든 사람은 생명을 받게 된다. 둘째 부분(18,28-19,16)은 정치권력을 쥔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을 보여 준다. 이 부분에서도 구조를 유심히 살펴보면 의미가 매우 깊다. 1. (28절):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이송된다. 2. (29-32절. 법정 밖에서):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심판해 주라고 청한다. 3. (33-38ㄱ절. 법정 안에서): 예수께 대한 심문: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4. (38ㄴ-40절. 법정 밖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단언한다. 5. (19,1-3): 예수께서 유다인의 왕으로서 가시관을 쓰신다. 6. (4-7절. 법정 밖에서): 빌라도가 재차 예수님의 무죄를 단언한다. 그러나 그 역시 나약한 사람이었다. 7. (8-11절. 법정 안에서): 다시 심문한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8. (12-15절. 법정 밖에서): 예수께서 선고를 받으신다. 오히려 예수께서 선고를 내리신다. 실상 ‘누가 재판관인지’ 애매하고 알기가 힘들다(13절). 빌라도가 재판관인지 예수님이 재판관인지 구별이 힘들다. 빌라도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를 스스로 단죄하고 있었다. “우리의 임금은 황제뿐이오.” 예수께서 당신 입으로 심판을 내리지 않지만, 그분의 현존(現存)만으로 심판이 내려지기에 충분했다. 9. (16절).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놓는다.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와 카이사르를 놓고 카이사르를 선택하는 역설적인 범죄를 저지른다. 유다인들은 카이사르밖에는 자기네 왕이 없다고 단언한다. 카이사르를 유다인의 왕으로 받아들여 모신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끝으로 셋째 부분(19,17-42)도 중심(中心)을 향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1. (17-18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세운다. 2. (19-22절). 빌라도가 ‘유다인의 임금’이란 명패를 3개 국어로 써서 붙인다. 3. (23-24절). 예수께서는 참된 사제이시다. 사제들이 입는 옷을 입으셨다.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4. (25-27절). 어머니와 제자: 예수님의 시간은 교회가 탄생하는 시간이고, 인류 안에 새로운 가족 관계를 창조하신 시간이다. 5. (28-31절). 예수님의 죽음 안에서 구약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그분이 속죄의 제물이 되신 까닭이다. 파스카의 어린양처럼 희생되셨다. 6. (32-37절). 예수님은 왕이시다. 그렇지만 즈카 12,10에서 예고된 대로 고뇌와 고난을 거친 왕이시다. 또한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샘물이 솟아나오는 성전이시다(에제 47,1-2).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쏟아 부으셨다.’ 창에 찔린 그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쏟아져 나온다. 아담의 늑골에서 하와가 만들어졌듯이 새 아담이신 예수님의 늑골에서 교회가 탄생한다. 7. (38-42절). 예수께서 무덤에 묻히신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요한 1,10)
묵상 <그분의 십자가가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을 구원한다 우리가 괴롭히던 그분을 바라보자>
의미심장하고 많은 감동을 주는 오늘의 독서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격정적으로 관조하게 한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고뇌에 빠진 슬픈 사람으로 우리 앞에 서신다. ‘얼굴을 외면하지 않고서는’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이 처참한 모습이다. ‘형편없이’, ‘볼품없이’ 되셨다. 우리 범죄의 흉측한 몰골을 뒤집어쓴 그분에게서는 당신의 영광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지만 바로 그 지경에서 가장 기적적으로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이 빛나고 있다. 우리를 위하시는 그분의 지극한 사랑이 빛나고 있다. 그분은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고 말씀하셨다(요한 12,32). 보라, 십자가의 나무를, 여기에 세상의 구원이 달렸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괴롭히던 그분을 바라보도록 하자. 바라본다는 것은 마음을 기울인다는 뜻이다. 우리의 사랑을 송두리째 그리스도께로 쏟아 붓자.
<기쁨의 날이 밝아온다>
성 금요일은 이미 투쟁과 보속의 날이 아니라, ‘주님의 복되고 영광스러운 수난’을 사랑을 기울여 관조하는 날이다. 주님의 수난이라는 극적인 사건을 생생히 상기하고, 깊은 애착을 가지고 그 사건에 참여하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는 그 사건의 복된 결론을 이미 알고 있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이미 누리고 있다.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을 기억하면서 죄악과 죽음에 대한 승리를 선언한다. 자기의 탄생일과 결혼과 초자연적 모성(母性)을 기념한다. 교회의 기쁨은 감동에 넘치고 감사하는 정에 넘친다. 그리고 인간과 인류 실존의 근원이요, 중심이요, 종착지인 사랑의 신비를 침묵 중에 관조하고 흠숭한다. 교회와 인류의 생명은 온전히 이 사랑의 신비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아담으로부터 새로운 하와가 태어나고 새로운 인류가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려면 그분의 죽음에 동참해야 한다. 성 금요일에 전례는 흠숭과 찬미로만 끝나지 않는다. 관조(觀照)는 자연히 더 내밀한 친교(親交)로 연결된다. 십자가의 신비는 그대로 우리 안에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우리 실존의 온갖 갈피에서 살아 움직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의 수난이 되어야 하고, 그분이 수난하고 죽었듯이 우리도 수난하고 죽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제사에 합일하여 우리의 생애와 일상생활이 아버지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고 몸 바치는 제사가 되지 못한다면, 어떠한 구실로도 우리의 종교적 신심이나 외부 실천은 단순히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의 제단이다. 그 제단에 우리의 제사가 그리스도의 제사를 뒤따르고 합해져서 하느님께 바쳐지고, 그 제사로 인하여 인류는 일치와 단합과 친교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위해 주고 단합된 인류가 새로운 인류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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