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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론] <부활성야 해설+묵상>-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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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연 쪽지 캡슐 작성일2010-03-29 조회수2,313 추천수0
 

제1독서(창세 1,1―2,2. 또는 1,26-31ㄱ) 해설

<창조 이야기.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근원과 목적을 하느님께 두고 있다>


이 창조 이야기는 제관계(祭官系) 전승에 속한다. 이 이야기는 세상의 기원에 대한 바빌론의 사고와 대립하여 히브리인들의 믿음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바빌론 전승에 따르면 선신과 악신 사이에 원초적인 패권다툼이 있었다고 하는데 반하여, 히브리인들은 하느님의 유일성을 주장했고, 태양도 다만 하느님이 창조해 내신 발광체에 지나지 않고 사람도 창조자가 아니라 땅을 조화롭게 일구어야 하는 임무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창조 이야기는 이집트 종살이에서 벗어난 탈출 신학의 연장으로 보인다. 사실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이집트에서 건져 내어 당신께 제사를 바칠 수 있게 하셨다(참조. 탈출 5,2). 그래서 창조는 주님께 바쳐진 일곱째 날, 즉 주님께서 복을 내려 주시는 날에 끝났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억압과 압제로부터 구출해 내신 것처럼, ‘코스모스’(우주, 질서 있고 아름다운 세상)를 ‘카오스’(원초적인 무질서와 혼돈)로부터 빠져나오게 하셨다. 첫째 삼일 동안 하느님은 ‘갈라놓으시는’ 일만 하신다. 즉, 원초적인 무질서를 바로잡아 질서 있게 만드신다.

날(日字)에 대한 히브리인들의 개념은 밤으로부터 시작하여(‘밤이 되고 아침이 되었다.’), 날(日)을 창조에 대한 기억과 기념으로 여긴다. 특히 첫째 날(‘한 날’, ‘유일한 날’)을 빛이 어둠을 비춘 사실에 대한 기억과 기념으로 여긴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께 당신의 부활로써 죄악의 어둠을 비춘 날의 사건을 이야기할 때도 그 같은 히브리인들의 날(日)에 대한 개념에 따른 것이다.


화답송(시편 104[103],1-2ㄱ.5-6.10과 12.13-14ㄴ.24와 35ㄷ[◎ 30 참조]) 해설

<주님, 보내시는 당신 얼에

누리의 모습은 새롭게 되나이다>


이 시편은 창조 사업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한다. 더 나아가 새로운 창조를 염원하고 있다. 새로운 창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이루어진다. 새롭게 창조된 그 세계에서는 범죄도 슬픔도 전쟁도 없을 것이다.


제2독서(창세 22,1-18 또는 1-2.9ㄱ.10-13.15-18) 해설

<아브라함의 제사는

순수한 신앙과 희망을 지닌 순종의 제사이다>


제2 독서에서 구조적인 골격을 형성해 주고 있는 ‘보다.’라는 동사의 용법을 강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4절에서는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하느님이 말씀하신 그 장소를 본다.

8절에서 번제물로 드릴 어린 양은 하느님이 몸소 마련하신다(보아 놓으신다.).

13절에서는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덤불을 본다. 14절에서 아브라함은 그 곳을 ‘야훼이레’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주님께서 이 산에서 마련해 주신다.”(보이신다.)고들 한다. 이사악을 바치는 제사 이야기는 주님께서 나타나시는 제사가 된다.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외아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느님이 ‘보이는’ 장소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제자들에게 하느님을 ‘보이게’ 한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그리스도처럼 그 하느님께만 우리의 신뢰와 희망을 둘 때 ‘하느님을 뵈올’ 수 있게 될 것이다.


화답송(시편 16[15],5와 8.9-10.11[◎ 1]) 해설

<하느님, 저를 지켜주소서.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이 시편을 노래함으로써 전례에 모인 회중은 주님께 봉사하기 위해 성별(聖別: 갈라놓음)되고 땅을 소유하지 않은 레위 사람들과 동일시된다. 주님께서 몸소 ‘그들의 유산이 되고 그들이 차지할 몫’이 되어 주신다. 주님께서 몸소 그들의 존재와 생활의 샘이 되어 주신다.

자기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면서 오로지 하느님께만 희망을 걸었던 아브라함과 더불어, 주님이 몸소 그들의 유산이 되어 주시는 사제들인 레위 사람들과 더불어,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고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리도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 드리고 맡겨 드려야 한다. 하느님은 당신의 거룩한 사람을 썩게 버려두지 않으신 까닭에 우리도 무덤에 썩어 없어지게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제3독서(탈출 14,15―15,17) 해설

<하느님의 섭리적인 개입으로 인하여 히브리인들은

홍해를 건너 자유로운 백성으로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 대목에는 두 가지 전승이 섞여 있다. 야훼계 전승(18,21ㄴ. 24-25.27ㄴㄷ.31)은 강풍이 불어와 바다를 갈라놓아 히브리인들이 무사히 홍해를 건널 수 있었다고 말하고, 이집트 기병과 마차들은 바닷물 속에 묻혔다고 말한다. 제관계 전승은 그 사건의 기적적인 성격을 더 강조하여 물이 갈라져서 좌우 양편으로 벽을 이루었다고 말하고, 물이 기병과 마차를 집어삼켰다고 말한다.

이 두 전승의 의도는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위력과 영광을 목격했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중요한 점은 기적에 있지 않고 그 사건으로 인하여 백성이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홍해를 건너게 하여 당신 백성을 이집트의 압제에서 결정적으로 벗어나게 해 준 분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셨다.

이 첫 파스카(건너감)와 새로운 파스카 사이의 연관성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신 사실은 이스라엘이 종살이에서 자유로운 삶으로 건너간 사실을 새롭게 거듭 실현한다. 세례의 물에 잠김으로써 사람들은 죽음(죄악의 덫)에서 생명(하느님의 생명)으로 건너간다.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로마 8,29)가 되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한 맏이’(콜로 1,18 묵시 1,15)가 되셨다.


화답송(탈출 15,1ㄴ-2.3-4.5-6.17-18[◎ 1ㄴㄷ]) 해설

<나는 주님께 노래하리라.

주님께서는 영광스럽게 승리하셨나이다>

 

모세의 이 찬미가는 엘로힘계 전승에 속한다. 하느님이 일으키신 사건은 백성이 입을 모아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업적을 찬양하기까지는 결코 종결되었다고 볼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이 의도하신 업적을 이루고 당신께 다시 돌아오는 것은 백성의 찬미를 통해서다(참조. 이사 55,11).

교회는 이스라엘 백성의 찬미와 신앙 고백을 기억하면서, 바다에 묻힌 것이 이제는 이집트인들이 아니라 우리 죄임을 알고 있다. 즉, 우리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우리를 올바르게 해 주려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가 씻어지고 없어졌음을 잘 알고 있다.


제4독서(이사 54,5-14) 해설

<이사야 예언자는 당신 백성을 위하는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을 노래한다>


제2이사야가 쓴 이 대목은 ‘종’에 대한 마지막 노래에 바로 이어서 나온다. 이 양자 사이의 유사성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54,11.15.17; 53,4;  53,3; 54,1-3; 53,10-12.54; 53,5 등). 예언자에 의하면 예루살렘이 ‘종’과 동일시된다고 할 수 있다. 비참하게 된 시온도 주님의 ‘종들’의 도시인 까닭에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제2이사야의 예언이 시작되는 40절에서처럼 여기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바빌론으로부터 광야를 거쳐 자기 땅(하느님이 당신 백성과 함께 거처하시는 장소) 안으로 데려가시는 새로운 탈출과 위로에 대한 말씀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도 새로운 탈출과 위로의 말씀이 계약의 선포로 이어진다(10절). 이 계약은 시나이 산의 계약과 비슷한 계약이 아니라, 노아와 맺어 주신 계약, 즉 온 인류와 맺어 주신 계약과 비슷한 계약이다(9절). 선포된 이 계약의 특징은,

- ‘평화의 계약’이고(10절),

- ‘영원한 계약’이며(55,3),

- 이스라엘이 ‘민족들을 위한 증인’으로 세워지는 계약이라는 데 있다(55,4).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 계약을 실현한다. ‘종’이신 그리스도께서 먼저 비천하게 되셨다(그분과 더불어 하느님의 백성도 날마다 십자가의 비천함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들어 높여져 부활하셨다. 그리하여 하느님 백성도 영광을 받게 되리라는 보증이 되셨다. 하느님의 백성은 창조 때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당신 아들 안에서 하느님이 맺어 주신 평화의 영원한 계약에 대한 증인이 된다.

이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 안에는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이 모두 포함된다.


화답송(시편 30[29],2와 4.5-6.11-12ㄱ과 13ㄴ[◎ 2ㄱ]) 해설

<주님, 제가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당신께서는 제 목숨을 살리셨나이다>


바빌론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의 이 찬미가를 우리도 똑같이 부를 수 있다. 사실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부활에 감사를 드리는 우리는 외교인이었을 때 ‘우리의 잘못과 죄 때문에 죽은 자들’(에페 2,1)이었지만 그리스도로 인해서 지옥에서 구출되었다. 바오로의 말대로 하느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늘에 앉히셨다.”(에페 2,6)


제5독서(이사 55,1-11) 해설

<하느님을 찾는 목마른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 구원을 찾아 얻는다>


제5독서는 제4독서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들에게 메시아의 식탁에 참여하도록 초대하는 말씀이다. “맛좋은 음식을 먹으리라.”(2절) 그 식탁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한 가지다. “나의 말을 들어라!”,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하느님이 마련하신 잔치는 일상적인 음식을 가지고 준비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 참된 음식으로 준비한 지혜의 잔치이다(참조. 신명 8,3; 요한 4,34).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부활한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에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다. 이 잔치는 우리를 위한 지혜의 잔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참으로 먹고 마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생명의 빵을 먹는다함은 “하느님의 아들을 보고 믿는 것”(존재 전체로써 아들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 요한 6,40)을 의미한다고 선언하신다.

성체성사는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의 잔치이다. 그렇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 음식이 단죄하는 음식이 된다(1코린 11,29). 그렇다고 성체성사가 완전한 사람들의 잔치는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들으려 노력하고 역경을 무릅쓰고서 실천에 옮기려 노력하는 사람들의 잔치이다.

성체성사는 우리로 하여금 메시아 잔치를 미리 맛보게 한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와서 우리와 함께 하느님의 나라의 새 술을 마실 그 날까지 메시아 잔치에 대한 보증이 된다. 이사야가 선포한 이 하느님의 나라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네의 항구함, 깨어 있음,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생명까지 바치는 사랑을 보여 줌으로써 증표가 되고 증인이 되어야 한다.

 

화답송(이사 12,2-3.4ㄴㄷㄹ.5-6[◎ 3]) 해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탈출기 15장이 하느님의 해방 업적에 백성이 응답하는 감사의 노래였듯이, 이사 12는 귀양살이에서 풀려 돌아온 백성이 하느님께 외치는 환호이다(11,10-16).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라는 3절의 후렴은 예루살렘의 유일한 샘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샘물은 광야의 호렙에서 흘러나온 물, 즉 토라(백성에게 생명을 가져다줄 하느님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이 찬미가로써 우리는 하느님께 당신 말씀을 듣고 따르겠다는 우리의 의지를 드러낸다. 그리스도의 부활 자체가 증명하는 것처럼 하느님은 우리 가운데 계시는 위대하고 거룩하신 분이시다.


제6독서(바룩 3.9-15.32-4.4) 해설

<주님의 법은 백성의 힘든 행로를 인도하는 빛이다>


바룩서는 구약성경 가운데 그리스어로 된 경전으로서 아마 주전 2세기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의 박해 시대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서론(1,1-14)과 그 다음 세 부분(아마 원래는 별개의 문헌들이었으리라.)으로 되어 있다.

1) 백성이 추방당한 사실(즉, 안티오쿠스의 박해)을 자기들이 지은 죄의 결과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참회의 기도(1,15-3,8).

2) 지혜에 관한 묵상(3,9-4,4).

3) 귀양살이하던 히브리인들에게처럼 예루살렘에 위로를 가져다주어야 한다는 권고가 그것이다(4.5-5,9).

첫째 부분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자기의 죄를 깨달으라고 한다. “네가 지혜의 샘을 버린 탓이다.”(12절) 이 지혜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하느님에게서 찾을 수 있다(32-37ㄱ절). 당신의 종 야곱과 당신의 사랑을 받는 이스라엘에게 지혜를 주신 하느님에게서 찾을 수 있다(37ㄴ절). 이 지혜가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진 이유는 “땅 위에 슬기가 나타나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기” 위해서다(38절). 그렇다면 이 지혜란 무엇인가? 토라(하느님의 계명)와 성경과 율법이다(4,1).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기뻐하고 그리스의 지혜 앞에 열등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어떤 사람들은 그리스의 지혜를 이스라엘 안에 도입하려 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 주신 하느님의 지혜는 생명을 주는 샘이다!

토라(하느님의 가르침과 계명)라고 하는 이 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완성을 본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목적이시다. 그리스도께서 “땅에 나타나시어 사람들 사이에서 사셨다.”(참조. 3.38; 요한 1.14) 그리스도의 부활은 ‘지혜(=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살 것이라고(4,1) 증언한다. 회개하라는 초대(4.2)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하게 율법으로 돌아오라는 초대가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토라이신 분을 발견하라는 초대이며, 생명이요 부활이신 주님께 온 마음을 바쳐 돌아오라는 초대이다.


화답송(시편 19(18),8.9.10.11[◎ 요한 6,68ㄷ]) 해설

<주님, 생명의 말씀이 당신께 있나이다>


회중은 바룩의 권고에 따라 토라(즉, 그리스도 계명, 참조. 시편 45,3)의 아름다움을 밝히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겠다는 결의를 밝힌다.


제7독서(에제 36,16-17ㄱ.18-28) 해설

<생명수와 새로운 마음>


하느님이 뭇 백성 안에서 당신 거룩한 이름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귀양살이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팔레스타인으로 다시 데려오고 당신의 성령을 보내어 깨끗하게 하고 새롭게 하신다.

이 마지막 예언은 바로 이어지는 바오로의 편지와 함께 파스카(건너감)의 신비가 무엇인가를 매우 깊이 있게 밝히고 있다. 파스카의 신비는 지나간 사건을 그냥 기억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고, 그 사건을 우리의 시대와 장소에서 현실화하는 것이다. “너희를 정결하게 하겠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25-27절)

에제키엘은 그 같은 작업이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하느님 혼자서 이루어 내시는 작업이라고 강력히 주장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 스스로 자기의 힘에만 의지하여 무엇을 하게 될 때 그것은 재난만을 초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사람의 마음을 바꿔 놓는 작업을 당신 혼자서 행하신다. 하느님은 우리에게서 자기만족만을 취하려 하는 마음을 없애고 순종하려는 마음으로 바꿔 주신다. 사람의 처신을 이기적인 방향으로 결정하려는 속된 정신을 없애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를 행하려는 성령으로 그 정신을 채워 주신다.

이 때 하느님이 폭력을 사용하시는가? 분명히 그렇다! 폭력을 행사해야만 죄의 종노릇과 죽음으로 한사코 기울어지고 치닫는 속성을 가진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음을 하느님이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각성하라고 하느님의 매질을 당했고, 빗나가는 우리도 따끔한 매질을 받아야만 정신을 차리고 주님의 법도에 다시 들어서게 될 것이다.


화답송(시편 42[41],3.5ㄱㄴㄷㄹ; 43[42],3.4[◎ 42[41],2]) 해설

<주님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하나이다>


귀양살이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염원은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과 특히 성전을 다시 보는 것이었다(하느님을 목말라하고 하느님의 얼굴을 보기를 갈망하는 것은 성전 안에서 하느님의 법도를 묵상하여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 열망을 뜻한다.).

이 염원은 동시에 파스카 전례의 제1부를 거행하는 마지막 염원이기도 하다. 우리는 죽음을 거쳐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대면하고 그분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서간(로마 6,3-11) 해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다시는 죽지 않으시리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죄에 죽은 사람이다. 죄악으로 기울어지려 하는 경향을 극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골고타의 무덤에 묻히는 사람이다.

바오로는 말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장 웅변적으로 표현한 말씀이다. 이제 우리의 생활은 ‘나’를 내세우고 자랑하려는 생활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나를 통해서 사람들을(온 인류를) 사랑하시는 생활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을 하나 되게 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목숨까지 바치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같은 신앙생활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차지가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끊임없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생명의 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주고, 그런 생활 끝에 우리도 부활하게 해 주시도록 도움을 간청해야 한다.


화답송(시편 118[117],1-2.16-17.22-23) 해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이 시편은 ‘할렐’(찬미 시편. 시편 112-117) 시편 중 마지막 시편이다. 히브리인들은 ‘할렐’ 시편을 큰 축제들과 특히 파스카 축제 때 노래 불렀다. 첫 두 구절은 찬미하도록 초대하는 구절로서 승리를 거두어 주신 왕께 감사드리는 찬미 앞에 나와  있다(5-7.10-14.17-18절). 백성은 찬미하는 가운데 기쁨을 표시한다(15-16절). 이 시편은 왕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끝난다(19-20절). 사제들이 환호하는 군중에게 축복한다(26ㄴ-29절).

이 시편으로써 전례에 모인 회중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파스카(건너감) 사건을 환호로 노래하는 동시에 우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났음을 노래한다.


복음(루카 24,1-12) 해설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신앙의 눈이 필요하다>


다른 복음서들과 비교해 볼 때, 루카 복음서는 세 가지 독특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이 눈부신 옷을 입은 ‘두 사람’을 보게 된다. 그 두 사람은 천사들이었다. 두 사람이라는 숫자는 증인으로 필요한 숫자다(참조. 민수 35,30; 신명 17,6;19,15 이하). 그러나 이 본문에서 ‘두 사람’은 더욱 더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는 것 같다. ‘두 사람’이라는 표현은 루카 9,30에서 예수께서 당신 모습을 변형시키신 동안 나타났던 ‘두 사람’을 상기시킨다. 그 때 나타났던 두 사람은 모세와 엘리야 예언자로서 구약성경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증언은 성경의 증언이다. 루카 복음서의 다른 발현 이야기들에서도 그 점을 강조한다(참조. 24,27과 44).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과 합치되는 사건’이었다.

 - 두 번째 독특한 요소는 그 두 사람이 여인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tu야 한다고 말씀하셨다.”(5-7절; 참조. 9,22) 하고 말해 준 사실이다. 루카 복음서는 분명히 마르코 복음서를 손질했다. 그 이유는 자기가 갈릴래아에서 일어난 발현을 보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손질한 이유는 단지 그것뿐이 아니다. 세 가지 의도에서 그렇게 손질했던 것이다. 첫째, 예루살렘의 중심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루카 복음서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끝마친다(참조. 1,5 이하; 24,53). 사도행전에서도 예루살렘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거기에서 교회가 탄생하고(사도 1-7), 바오로는 자기 사명을 수행하고 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참조. 사도 11,30; 15,4; 18,22; 21,17 이하). 둘째 의도는,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을 선포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저 단순히 살아계실 뿐 아니라, 생명 자체이고, 생명을 가지고 계시고, 생명을 주는 분이시다. 그분은 생명의 샘이시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도록 초대한다(6절). 이는 마치 히브리인들이 율법과 모세오경을 기억하도록 초대받은 것과 같다(참조. 신명 6,4-13 등). 따라서 구약성경은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의 샘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비추어서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다.

 - 루카 복음서의 세 번째 독특한 요소는 사도들이 믿으려하지 않았다고 언급한 점이다(11절).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은 당장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소식이 결코 아니다. 부활 사건은 우선 불신과 혼란을 가져오지 않을 수 없다. 루카 복음서는 신앙은 지적인 차원에 속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 같다. 신앙은 죽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으로 만날 때에야 비로소 생겨난다. 신앙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목숨을 내걸고 뒤따르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될 때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묵상

<그리스도의 빛을 향한 여정

기다림으로 가득 찬 빈 공간>


“주님의 구원을 잠자코 기다림이 좋겠네.”(애가 3,26)

부활성야는 조용히 기다리는 밤이다. 커다란 사건이 마침내 이루어지고 말리라는 예감에 떨림을 느낀다.

맨 처음 세상이 창조될 적에 혼돈의 밤이었듯이, 지금도 창조하시는 말씀이 울려 나오는 곳은 고요함이다. 항상 고요함의 깊은 데서 - 마치 자녀를 잉태하는 모태에서처럼 -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오늘 전례는 우리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와 우리의 근본적인 가난(무소유)을 가르치려 한다.

부활성야의 영적인 차원은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을 다 채우고 차지하실 수 있도록 마음을 깨끗이 비울 것, 내 이름을 내세우거나 내 욕심을 채우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속에 살고 계시면서 나를 통하여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주는 데 몸 바치시게 할 것을 지시한다.


<오늘 밤은 기묘한 밤이다

깨어 있는 밤이고 출발하는 밤이다>


인류는 지금 역사의 대 전환기에 처해 있다. 오늘 밤의 심연으로부터 하느님이 당신 빛의 말씀으로 혼돈의 어둠을 흩으신다. 하느님의 말씀은 어둠과 죄악과 죽음의 뿌리를 뽑으신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행진을 계속했듯이, 새로운 인류의 첫 사람이, 하느님을 복된 땅을 향한 여행의 인도자와 동반자로 모시고, 행진을 시작하신 것이다.

광야의 목마름, 배고픔, 지침, 외로움도 새로운 인류의 행진을 좌절시키지 못한다. 그 행진을 앞장서 가시는 하느님이 하늘로부터 식량을 내려 주고 바위에서 물을 솟아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신 까닭이다. 하느님이 쉬어 갈 그늘이 되어 주시는 분, 어린 자식을 품에 껴안아 주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기쁜 마음에 생기가 돋아나고 활력을 주시는 성령을 통하여 젊음이 되살아난다.

이 밤은 하느님이 만들어 내신 기묘한 밤이다. 역사의 온갖 사건은 오늘 밤의 사건으로부터 의미와 가치를 부여 받는다.

이 밤은 또한 마지막 날에 오실 ‘주님의 날’의 전날 밤, 위대한 마지막 밤의 서곡이기도 하다. 그 날은 일몰이 없는 새로운 날이요, 정의의 태양이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께서 비추는 날이다. 그러나 그 태양은 이미 우리 위에 떠올랐고, 그 태양의 빛이 이미 우리 마음속에 햇살처럼 퍼졌다.

그러나 지상을 여행하는 과정에서는 날마다 수난과 희생과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생명과 빛으로 건너갈 수가 있는 것이다.


<물과 성령의 신비>


“형제들이여,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는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습니다.”고 바오로는 말한다. 이것은 세례라는 외적 예식에 국한된 말씀이 아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끊임없는 ‘건너감’을 말한다. 그 ‘건너감’은 죽을 때까지 매일 매 순간 우리의 선택과 결단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어둠에서 빛으로 ‘건너감’을 말하고, 십자가를 거쳐서 부활에 이르는 과정을 말한다. 신앙의 이 여정은 결코 구약의 성조들과 히브리인들이 겪는 여로 못지않게 험난한 여로이다.

‘맨 처음’ 하느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 적에, 생명이 하느님의 입김을 받은 물의 결실이었듯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이신 성령의 힘으로 새로운 생명이 인류 안에 부어지고 들어왔다. 그 생명으로 인류는 사랑의 사슬로 한 마음이 되어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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