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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사] 첫째 에피클레시스: 축성 에피클레시스(Epiclesis consecration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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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글 [미사] 제사적 기념(기념과 봉헌)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8-13 조회수2,672 추천수0

첫째 에피클레시스 : 축성 에피클레시스(Epiclesis consecrationis)

 

 

주례자는 이제 자신의 목소리와 동작으로 그리스도의 목소리와 동작을 지나가도록 사라진다. 이제 주례자는 모인 공동체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제이신 그리스도의 표지와 도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성령의 힘으로 당신 제사의 기념을 바치신다.

 

교회는 사람들이 바친 예물을 축성하시도록, 즉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도록 특별한 청원으로 하느님의 힘(virtus divina)을 기원하며, 영성체로 영하게 되는 이 깨끗한 제물이 거기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구원이 되도록 간구한다”(총지침 55c).

 

기도문은 아버지께 당신 영광을, 교회의 찬미 제사를 완성하시도록 청한다. 기도문은 그것을 축복하고 완전케 하고 이처럼 받을만하게 하여, 빵과 포도주로 상징화된 이 찬미의 제사가 지금 그리스도의 유일한 제사의 모상 (figura)으로 바뀐다. 교회의 예물은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완전한 제사 앞에서 사라진다.

 

이 변화는 성령의 힘, 곧 총지침이 말한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케 된다. 기도문은 이것을 위하여 감사드린 예물 위에 성령이 오시도록 부른다. 그러나 교회가 빵과 포도주의 표지 아래 제대 위에 성사적으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제사에 겸손히 통교하도록 하고 교회가 십자가 앞에 엎드리도록 교회 위에도 성령께서 내려오신다는 사실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현존하시는 성사인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도록 하신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시는 창조자 성령께서 성목요일 저녁에 “이는 내 몸... 이는 내 피이다”라고 선포하신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말씀을 살아있게 하고 현실화하고 완성하신다.

 

 

신학적 구조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사이의 논의 가운데,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를 너무 자주 성령의 행위와 반대로 두었다. 서방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변화가 일어난다고 본 반면, 동방교회 대부분에서는 성령의 힘으로 변화가 일어난다고 대립적으로 강조했다. 사실 예물 위에 하는 이 성령 청원 (에피클레시스)은 감사기도에서 전통적이지만, 로마 전례는 성령의 기능을 분명히 하는 어떠한 양식도 갖고 있지 못한 사실에서 보면, 오랜 세기 동안 이 간청을 알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감사기도 제1양식에서 Quam oblatinem 기도문은 성령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에피클레시스의 기능을 했다: “주 하느님, 이 예물을 너그러이 받아들이시고 강복하시어 참되고 완전한 제물 사랑하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

 

반면, 동방교회의 아나포라 대부분에서 예물 위에 성령의 부름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아남네시스 다음에 온다. 보기를 들어, 비잔틴 교회의 요한 크리소스토모 아나포라에서는 에피클레시스가 성찬제정 말씀과 아남네시스(기념)과 봉헌 다음에야 온다. 이때 성령을 청하여 예물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도록 기원한다. 이 아나포라의 에피클레시스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사제 (낮은 목소리로): 저희는 아버지 당신께 피 흘림 없는 이 영적인 예배를 다시 한번 더 바치나이다. 간청하며 빌며 당신께 의지하오니, 저희와 여기 봉헌한 예물들 위에 당신의 성령을 내려주시어 이 빵이 당신 그리스도의 존귀한 몸이 되게 하소서.

 

부제 (낮은 목소리로): 아멘.

사제 (낮은 목소리로): 그리고 이 잔에 있는 것이 당신 그리스도의 존귀한 피가 되게 하소서.

부제 (낮은 목소리로): 아멘.

사제 (낮은 목소리로): 당신 성령으로 이것들을 변화시켜주소서 (사제는 예물들을 축복한다).

부제 (낮은 목소리로): 아멘, 아멘, 아멘.

 

그런데 동방교회 전례 가운데 이집트 교회의 알렉산드리아 전례 (성 마르코 전례, Der-Balyze 본문)에 따르면, 에피클레시스는 그리스도의 성찬제정 말씀 뒤에 나오고 ,성찬례에서 성령의 일을 그리스도의 일에 일치시킨다. 그래서 성 마르코 전례 양식은 교회 일치에 아주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전례는 성찬례에서 성령의 일과 아드님의 일을 한 순간에 일치시킨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말씀은, 창조자이시며 축성자이신 영의 힘 안에서 효력 있게 된다.

 

새로 만든 감사기도들은 예물 위에 성령의 부름을 명료하게 하면서 로마 교회의 전통과 연결된다. 서방교회의 고유한 신학에 따라 동방 교회와 나란히 한다. 새 감사기도들은 성찬 제정 말씀 전, 감사드림의 순간에, 옛 기도문 Quam oblationem의 고유한 자리에 예물 위에 에피클레시스를 연결시킨다. 이것은 다시 발견한 고대 전통을 동방 교회에 일치하도록 열면서 서방의 성찬례 신학을 존중하는 태도에 함께하도록 하는 해결점이다. 이 해결책은 동방 전례들과의 관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서방교회의 교의와 성찬례 신학에 주류를 이루는 통합적인 신학에 매우 걸맞도록 하는 것 같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아남네시스 다음에 예물 위에 하는 에피클레시스로, 서방 전례 안에 동방 아나포라의 가능성을 제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따로 신학적 의미를 얻어야만 되리라. 새 감사기도 셋은 성령의 기능에 대한 서방 교회의 동일한 개념에 응답한다.

 

감사 행위에서 성령과 아드님의 이러한 일치와 그리스도의 말씀 위에 성령께서 미리 활동하시는 것은, 성찬제정 말씀에 연결되어 그 말씀에 선행하는 첫째 에피클레시스로 새 감사기도에서 표현된다. 이러한 성령의 부름은 감사드리는 운동에 연결된다. 이 운동은 당신 약속에 항상 신실하신 주님의 놀라운 업적에 대한 선포 안에서 이 부름에 그 근본을 제공한다. 이 에피클레시스는 주님을 향한 교회의 전적인 의탁을 강조한다: 교회는 빈손으로 그리고 기도의 자세인 손을 들어올리면서 자기 자신을 주님 앞에 드린다. 성령의 힘과 그리스도의 말씀의 효력으로 교회의 가난함을 채우시도록 주님께 간청하기 위해 주님의 창조와 구속의 놀라운 업적들을 말한다. 교회는 감사기도로 주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와 구속의 놀라운 업적을 선포하면서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면서 (감사드림), 성화하시는 성령을 부름으로써 (에피클레시스) 그리스도의 말씀을 완성한다 (제정).

 

 

비교

 

빵과 포도주 예물 위에 성령의 청원은 세 아나포라에서 매우 훌륭히 명료화되어 있다. 세 양식은 거의 동일하다. 아버지께 성령의 활동으로 빵과 포도주의 선물을 거룩하게 하도록 청하거나 (제2양식, 제3양식), 성령이 이 선물들을 거룩하게 하도록 청하여 (제4양식), 이 예물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도록 한다.

 

아나포라 제2양식 내용은 명료해야 하는데, 이유는 잘못된 해석의 자리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 본문은 실제로 말하기를: “저희에게 (nobis) 우리말에는 “저희에게”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으나, 라틴말 원문에는 “저희에게” (nobis)라는 말이 들어있다: “ut nobis Corpus et Sanguis fiant Domini nostri Iesu Christi (저희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

 

마치 성사 안에 그리스도의 현존이 객관성을 갖지 않고, 순수한 상징이 아니라면 전개되지 않는 오직 주관적인 확신처럼, “저희에게”라는 표현을 주관적인 의미로 알아들어서는 안된다. 동사 “되다” (fiant)는 이러한 해석을 배제시키는데 충분히 분명하다. “우리에게”라는 표현은 제사적 기념과 성찬례적 영성체에 교회가 효과적으로 참여한다는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봉헌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공동체에 관한 외적인 연극이 아니라, 교회가 전적으로 의무를 지니고 있는 행동을 뜻하며, 신비 또는 하나의 의무인 성사를 말한다.

 

아나포라 제3양식과 제4양식은 정확히 나머지 부분에서 성사에서 의무의 이러한 의미를 강조한다. 즉, 이 아나포라들은 덧붙이기를, 우리에게 영원한 계약으로 이 성사를 남겨주신 (quod ipse nobis reliquit in foedus aeternum, 제4양식) 주님의 명령에 따라 (cuius mandato, 제3양식)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신비의 거행이라는 시각으로 제시한다.

 

감사기도 제2양식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 양식은 “주님, 당신은 참으로 거룩하시며” (Vere Sanctus es, Domine)라는 말로 시작된다. 기도문은 하느님께서 “모든 거룩함의 샘 (fons omnis sanctitatis)”, 다시 말해서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를 통교하시면서 거룩하게 하신다고 확언하면서 이어진다. 거룩하게 하는 것이 자기 통교화의 전개이라면, 거룩하게 하는 것과 하느님과의 통교는 동일한 것이다. 접속사 “ergo” (그러므로)는, 지금 당신 본성 자체, 다시 말해서 봉헌된 선물들을 거룩하게 하는 행위를 하시라고 하느님께 기원한다. 성령께서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당신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모든 거룩하게 하는 행위를 하신다.

 

성령을 부어주심은 마지막 때의 특징적인 실재이다 (말라기아 예언서). 에피클레시스에서 요구되는 거룩한 선물들의 축성은 종말론적인 방식으로 돋보인다. 축성을 통하여 거룩한 선물들은 종말론적인 실재로 변하고 우리의 시간은 주님의 날이 된다.

 

우리 기도의 에피클레시스의 원천을 찾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야고버 아나포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우리말 (이태리말) 본문이 “성령의 힘으로” (부어주시어)인 반면, 라틴말 본문은 “Spiritus tui rore” (당신 영의 이슬로써)로 성령을 이슬에 견준다.

 

팔레스티나에 사는 주민들에게 이슬은 매우 좋은 존귀한 것을 말한다: 이슬은 일년 중 반 이상 내리지 않는 비를 간청하는 것이다. 이슬의 탈취는 하나의 침체와 저주로 변한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이슬과 물기는 긍정적인 수락과 부정적인 수락으로 사물의 질서를 이루게 한다. 이슬은 대지에 소출을 보증하는 것이기 때문에 번영의 이미지이다. 호세아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한 이슬, 다시 말해서 모든 발전과 성장을 싹뜨게 되는 은총의 원천이 되실 것이다고 보증을 한다 (호세 14,5). 이슬은 또한 깨어남과 생명을 표상한다. 신명 32,2에서 모세는 말하기를 “나의 말은 함초롬히 내리는 이슬이다.” 특히 물기와의 관계를 통해서 이슬은 효력있는 하느님 말씀의 표상이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 하늘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흠뻑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며 씨뿌린 사람에게 먹을 양식을 내주듯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이사 55,10-11).

 

감사의 아나포라가 거행될 때 아버지께서 파견하실 힘있는 이 이슬은 성령이시다. 이 이슬은 거룩한 선물들을 꿰뚫을 것이고 그것들을 주님의 몸과 피의 성사로 변화시킬 것이다. 이처럼 라틴말 감사기도문이 우리말 기도문보다 더 깊은 풍부한 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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