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전례]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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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7-11-19 | 조회수8,316 | 추천수0 | |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
새 「로마 미사 경본」의 각 모국어 번역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부분 가운데 하나는 감사 기도의 축성문에 나오는 라틴어 원문의 “pro multis”의 번역과 관련된 문제였다. 우리말 새 「로마 미사 경본」 안에 있는 “모든 이를 위하여”는 “많은 이를 위하여”로 바뀔 것이다. 이 표현은 사실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잔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하신 성찬 제정 말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8; 마르 14,24 참조).
한편 루카 복음에서는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루카 22,20)라고 말한다. 일찍이 교회는 예수님의 성찬례 제정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두 성경 문구를 결합시켜서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란 형태로 오늘날의 감사 기도 제1양식인 로마 전문 안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을 통해 다른 모든 감사 기도에도 반영되었다. 따라서 “많은 이를 위하여”란 표현은 앞서 보았던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전례문을 변형 없이 원문에 충실하며 정확하게 옮기고자 한 결과로 우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의문은 여전히 는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물음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아닌가? “많은 이를 위하여”라는 번역은 예수님의 죽음이 지닌 구원의 보편적 가치를 축소시키는 것이 아닌가? 사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여러 나라의 미사 경본에서 ‘많은 이’가 ‘모든 이’로 번역된 데에는 이와 같은 물음들이 주된 동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곧 ‘많은 이’를 ‘모든 이’로 해석함으로써 주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의 보편성을 모호함 없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12년 독일 주교 회의의 의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 점을 깊이 인식하면서 “많은 이를 위하여”에 대한 더 정확한 번역을 제시하셨다. 그리고 그 의미를 설명해 줄 세심한 교리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셨는데, 여기서 표명된 교황의 관점들은 ‘pro multis’의 번역에 관한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한 2006년 경신성사성의 회람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해 주었다. 이 관점들을 종합하여 “많은 이를 위하여”란 표현이 지닌 의미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의 성찬 제정 말씀에서 비롯한 “많은 이를 위하여”란 말은 전례문 안에서도 하나의 해석 형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정확히 번역함으로써 예수님 말씀 자체에 대한 교회의 특별한 존중을 드러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과 함께 이사야 53장에서 주님의 종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셨고 예언자들의 말씀이 당신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드러내셨다(예레 31,31-34 참조).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이사 53,11). 곧 예수님 말씀에 대한 교회의 존중과 성경 말씀에 대한 예수님의 충실성은 “많은 이들을 위하여”란 표현의 사용을 선택하도록 이끄는 구체적 이유이다.
둘째, 이 표현으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를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죽으셨다는 신앙의 가르침이 변경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찬례란 구체적인 맥락 안에서 사용된 “많은 이를 위하여”란 표현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구원의 효과가 인간의 의지나 참여 없이 기계적인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특히 “너희를 위하여”란 말과 결합된 이 표현은 성찬례를 거행하기 위해 모인 우리와 모든 공동체에게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해준다. 무엇보다 우리가 주님의 식탁에 초대받아 그 신비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요 은총의 선물임을 알려준다. 또한 ‘많은 이’로 이루어진 우리가 ‘모든 이’를 위한 세상의 누룩으로서 수행해야 할 막중한 책임과 사명이 있음을 깨닫도록 해 준다.
[2017년 11월 19일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인천주보 4면, 김기태 사도요한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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