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전례] 성모동산의 꽃과 풀들: 이름에 십자가를 품은 식물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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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9-09-10 | 조회수7,431 | 추천수0 | |
[성모동산의 꽃과 풀들] 이름에 ‘십자가’를 품은 식물들
4세기 초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탄압의 대상이던 그리스도교를 공인했다. 그리고 이 황제의 어머니인 성녀 헬레나는 만년에 황후의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궁궐을 나와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했고, 한동안 성지에서 기도하며 지냈다. 교회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때 성녀 헬레나가 예수님께서 못 박히셨던 십자가를 발견했다고 한다. 이를 기려서 가톨릭교회는 9월14일에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낸다. 그리고 십자가의 의미와 중요성을 잘 알고 소중히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몇몇 식물들에 특별히 십자가와 관련된 이름을 붙여 주었다.
크로스바인, ‘십자가덩굴’
미국 남동부 일대에는 큰 나무든 작은 덤불이든 또는 담장이든 줄기를 붙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라붙어서 감아 오르며 15미터 이상 자라는 덩굴식물이 널리 분포한다. 크로스바인(Cross Vine)이라는 덩굴식물이다. 이 식물은 생장하는 동안에는 잎이 밝은 녹색을 띠다가 겨울에는 붉은 빛이 도는 자주색을 띠는데, 그렇다고 낙엽이 지지는 않아서 상록성 식물로 분류된다.
그리고 봄 중반부터 여름의 끝 무렵까지 잎겨드랑이에서 2~5송이씩 나팔 모양의 통꽃을 피운다. 안쪽은 대체로 노란색이고 바깥쪽은 주황에서 적갈색에 이르기까지 색깔이 다양한 꽃에서는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는데, 카레 냄새가 난다고 말하는 사람도 한다.
이 식물은 능소화과로 분류된다. 능소화과 식물임이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이 식물의 꽃이 요즘 우리나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능소화를 빼어 닮았다. 최근에는 능소화 꽃이 우리 주변에서 쉽게 눈에 띄지만, 본래 능소화는 양반집 마당에만 심을 수 있는 식물이었다. 그래서 이름마저도 ‘양반꽃’이라 불리던 때가 있었다. 능소화가 이렇듯 소위 ‘지체 높은’ 식물이었다면, 그에 못지않게 크로스바인은 이름만으로도 교회에서 지체 높은 식물에 속한다고 하겠다. 크로스바인을 우리말로 새기자면 ‘십자가덩굴’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 크로스바인의 횡단면.
이 식물의 특징들 중 한 가지는 줄기를 자르면 그 횡단면에 십자가 모양이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 점 때문에 이 식물은 크로스바인이라는 과분한(?)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런 이름을 붙이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지역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을 테지만,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표현이 마뜩하지 않아서였는지 달리는 학명[Bignonia capreolata]에 근거해서 비그노니아라는 이름으로도 흔히 불린다.
그런데 얄궂게도 비그노니아라는 이름 또한 한 사제의 이름에서 유래한다는 점에서 교회와 무관하지는 않다. 조제프 피통(Joseph Pitton de Tournefort)이라는 프랑스의 식물학자가 이 식물의 이름을 지을 때 자기 친구인 장-폴 비뇽(Jean-Paul Bignon) 신부를 기리는 마음으로 비그노니아라고 정했다고 한다.
플록스, ‘그리스도의 십자가 꽃’
플록스(Summer Phlox)는 북아메리카 원산인 여러해살이풀이다. 우리말로는 풀협죽도라고 불리는데, ‘협죽도 같은 꽃이 달리는 풀’이라는 뜻으로 생긴 이름이다. 한때 세계적으로 관상용 원예식물로 널리 사랑받던 플록스는 내한성이 강하고, 무더기로 싹이 나서 크게 포기를 이루며 높이 60∼120cm 정도로 자란다. 잎이 마주나는 종류도 있고 3개씩 돌려나는 종류도 있다. 대개는 여름에 지름 2,5cm 크기의 홍자색, 분홍, 흰색 꽃을 피우는데, 그밖에 여러 가지 다른 색의 꽃을 피우는 변이종들도 많이 개발되어 있다.
플록스 꽃의 아랫부분은 통 모양으로 길쭉하고, 윗부분은 꽃잎이 5갈래로 갈라지며 수평으로 퍼진다. 그러나 꽃잎들이 각기 떨어져 있지는 않으며 마치 지붕의 기와들이 겹쳐지며 맞물리는 것처럼 조금씩 겹쳐져 있다. 그리고 꽃이 한꺼번에 활짝 피었다가 한꺼번에 지고 마는 여느 꽃들과는 다르게 번갈아가며 피고 지는 가운데 개화 기간이 제법 길다.
플록스는 그리스어로 ‘불꽃, 빛’을 뜻한다. 아마도 이 식물의 꽃이며 잎의 생김새가 그리고 꽃의 색깔이 불[火]이 지닌 몇몇 요소들을 생생하게 연상시켰기 때문에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 듯하다. 한편, 그리스도인들은 이 식물을 일컬어 ‘그리스도의 십자가 꽃(Christ’s-Cross Flower)’이라고 불렀다.
스위트알리섬, ‘성모님의 작은 십자가’ 또는 ‘십자가의 꽃’
지중해 원산으로 스위트알리섬 또는 향기알리섬(Sweet Alyssum)라고 불리는 우리말로는 생김새가 냉이와 비슷하다 해서 돌냉이, 애기냉이, 해변냉이라고도 불리는 식물이 있다. 이 식물은 10∼20cm 정도 높이로 땅 위를 기어가듯이 퍼진다. 잎은 폭이 좁고, 회색을 띤 녹색이며, 대개는 은색의 털이 나 있고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꽃은 흰색, 자주색, 보라색, 분홍색 등 크기가 작은 송이들이 무리를 지어서 피는데, 각 송이마다 4개의 꽃잎이 십자 형태를 이룬다. 그리고 은은한 향기를 풍긴다. 이 식물은 영하에 가까운 낮은 온도에도 무난하게 견디기 때문에 겨울에도 비교적 쉽게 기를 수 있는데다 꽃이 3월부터 가을까지 오래 피는 까닭에 꽃을 보기 위해서 화단이나 화분에 많이 재배된다.
스위트알리섬은 원산지 지중해에서는 여러해살이풀이지만 한국에서는 가을에 파종하는 한해살이풀로 취급된다. 스위트알리섬의 학명은 로불라리아 마르티마(Lobularia Maritima)인데, 여기서 로불라리아는 그리스어로 ‘작은 꼬투리’라는 뜻이다. 아마도 씨앗을 담는 깍지를 보고서 지은 이름인 듯하다.
일찍이 사람들은 스위트알리섬을 ‘빼어난 미모, 뛰어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꽃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식물을 ‘당신이 손수 축복하신 성모님의 작은 십자가(Blessed by Mary, Mary’s Little Cross)’ 또는 ’십자가의 꽃(Flower of the Cross)‘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9월호,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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