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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례] 인간의 시간, 하느님의 시간: 전례적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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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12-11 조회수6,103 추천수0

[경향 돋보기 – 인간의 시간, 하느님의 시간] 전례적 시간

 

 

시간은 인간 생활과 삶의 단순한 물리적 측정 수단이나 단위만은 아닐 것이다. 모든 인간적 시간 속에는 체험과 사건, 그리고 무수한 만남이 녹아들어 있다. 수많은 사건의 단편 속에서, 그리고 삶의 체험들이라는 배경과 맥락 속에서 시간은 자신만의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된다.

 

특별히 신앙인의 시간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세사라는 맥락 속에서 더욱 가치 있고 소중한 의미를 지니게 되며, 이를 통해 인간의 시간은 또 다른 차원의 시간인 하느님의 ‘영원함’으로 인도된다. 그 과정에 ‘전례’는 인간의 유한한 시간을 하느님의 영원함으로 인도하는 탁월한 통로가 된다. 그렇다면 전례는 어떻게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일까?

 

 

인간의 유한함에서

 

인간 창조와 구원의 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하느님 은총의 우선성과 인간의 유한함이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먼저 우리에게 건네시고 우리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존재하게 하고 살아가게 한다.

 

반면 창조된 존재로서 인간은 그 자체로 유한함을 지닌다. 특히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라는 한계성을 지니고 살아간다. 이러한 한계성 속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하느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그리고 인간을 ‘먼저 사랑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느님 은총의 우선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로 대표되는 구원의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먼저 우리에게 주어진다. 구세주의 탄생이라는 성탄의 신비 안에서도,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이라는 파스카 신비를 통해서도, 그리고 성령의 강림과 교회의 성사 안에서도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말을 건네신다. 그리고 인간은 ‘지금 여기’라는 유한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그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초대된다.

 

이처럼 은총의 다가옴, 곧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인간의 유한함 속에 다가온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은 유한한 인간의 시간을 질적(質的)으로 바꿔 놓는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이러한 시간의 질적 변화를 체험하게 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성령의 임하심과 더불어 이뤄지는 ‘전례’ 거행의 순간이다.

 

 

하느님의 영원함을 향하여

 

“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전례 헌장, 10항)인 전례를 통해 “교회는 … 구속의 신비들을 기억하며, 자기 주님의 풍요로운 힘과 공로가 모든 시기에 어떻게든 현존하도록 그 보고를 신자들에게 열어, 신자들이 거기에 다가가 구원의 은총으로 충만해지도록 한다”(102항).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는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해 가고 있으며, 이 목표를 향한 신앙인의 모든 시간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구원의 충만을 이루고자 한다.

 

신앙 공동체의 모든 시간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충만해질 수 있기에 교회는 구원을 위한 시간의 성화를 전례, 특별히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시간 전례와 전례 주년의 모습을 통해 이룬다.

 

교회는 시간 전례를 통해 낮과 밤의 모든 흐름이 하느님 찬미를 통해 성화되도록 이끈다. 아침에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요한 1,9)이시며, “의로움의 태양”(말라 3,20)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하고, 낮에는 주님의 수난 사건들과 최초의 복음 선포에 대한 기념을 상기하며, 저녁에는 하루 동안 우리가 받은 은총에 대해 감사드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종말론적 희망을 간직한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신비가 모든 시간의 중심을 이루게 된다.

 

아울러 전례 주년은 한 해의 흐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고 그 탄생을 기뻐하는 대림과 성탄, 우리의 구원을 위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성령 강림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를 펼쳐 낸다. 그리스도의 신비가 한 해의 주기를 통해 이뤄지면서 교회의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과 풀릴 수 없는 연대로 맺어진다.

 

시간 전례와 전례 주년이 마치 씨줄처럼 수평적으로 시간의 성화를 이룬다면, 교회의 ‘성사’(聖事)들은 날줄처럼 수직적으로 신앙인의 ‘오늘’을 관통하며 시간을 성화시킨다.

 

성사 안에서, 특별히 성체성사 안에서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그 무엇으로 사라지지 않고, 미래는 막연히 멀리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모두가 ‘오늘’ 안에서 융화된다.

 

전례 안에서 과거는 ‘기억’(anamnesis)을 통해 현재 속에 실질적 현존을 이루며, 미래는 기도와 희망 안에서 현재의 시간 속에 녹아든다. 시간은 ‘이미’와 ‘아직 아니’라는 경계선 안에서 긴장감을 이루며 구원의 실제적 장(場)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성령의 오심’(epiclesis)을 통해 우리의 구원이 현재화된다. 인간의 유한한 시간이 하느님의 영원함 속에 초대된다. 이를 통해 인간의 유한한 시간은 이제 거룩한 시간으로 변화되고 은총의 시간이 된다.

 

이처럼 시간 전례와 전례 주년이 시간의 ‘씨줄’처럼 펼쳐지고, ‘성사’라는 ‘날줄’이 신앙인 삶의 ‘오늘’을 관통하며 서로 어우러짐을 통해 교회는 구원의 ‘현재’를 살아간다.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인 성찬의 희생 제사”(교회 헌장, 11항)를 중심으로 우리 구원의 현재는 ‘오늘’ 속에 시간 전례를 통해 연장된다.

 

시간 전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전례 생활의 중심이요 주축인 미사 성제의 신비에서 나오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 구원 신비들의 기념, 청원 및 천상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하며, 이를 하루의 여러 시간에까지 두루 퍼지게 한다”(성무일도 총지침, 12항). 그리고 신앙인의 ‘오늘’은 이제 전례 주년이라는 한 해의 흐름 안에서 확장되고, 우리가 성사를 통해 체험한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가 신앙의 여정 속에 지속되도록 한다.

 

 

다시 인간의 유한함으로 돌아가서

 

그리스도의 신비는 전례의 순간 속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가 전례 안에서 체험한 은총의 ‘오늘’을 날마다 삶 속에서 살아가도록 재촉한다. 그래서 전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신비를 접한 우리의 시간은 이전의 단지 유한한 인간적인 시간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전례 안에서 하느님의 영원함에 초대되었고, 그 영원한 구원의 시간에 참여하였던 체험이 이제 우리 일상의 유한한 시간 속에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체험은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늘 지향하도록 이끈다. 따라서 이제 신앙인의 시간은 단지 이 세상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특징도 지니게 된다.

 

신앙인의 시간은 구원의 완성을 향해 가는 종말론적 시간이며, 다시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창조의 순간에, 그리고 구세주의 오심과 파스카 신비를 통해 다가온 하느님의 은총은 이제 우리의 응답을 요청하며 우리를 ‘기다림의 시간’으로 초대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신앙인의 시간은 단순히 하루나 한 해의 맹목적이고 반복적인 순환이 아니라, 구원의 완성, 하느님의 영원한 시간에 완전히 참여한다는 목적을 지향한다.

 

창조 때 시작된 인간의 유한한 시간이 이제 종말론적인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구세사적인 시간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전례적 시간 안에서 하느님의 영원함에 초대된 신앙인들은 이제 구원의 ‘이미’와 ‘아직’ 사이를 일상 안에서 체험하며 구세주의 다시 오심을 종말론적 ‘기다림’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구원 역사의 시간으로

 

이미 단 한 번 영원히 성취된 그리스도의 파스카와,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이 파스카의 완성 사이에 위치한 교회의 시대에 행해지는 전례에서 그리스도의 신비가 늘 새롭게 현재화되고 시간 속에 드러난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164항 참조).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비로 인도하는 전례적 시간은 유한한 인간의 시간을 ‘거룩한 시간’으로 만들어, 우리를 하느님의 ‘영원함’으로 인도한다.

 

이렇게 전례를 통해 인간의 유한함은 하느님의 영원함에 참여하고, 그 안에서 힘을 얻어 다시 자신의 유한한 시간으로 돌아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감으로써 구원의 완성을 위한 순례의 길을 걸어간다. 곧 ‘인간의 유한함’과 ‘하느님의 영원함’이 전례적 시간을 통해 서로 해석학적 순환의 모습을 보이며 구세사의 지속이라는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모든 시간은 하느님의 시간이다. 그 어떤 시간도 하느님을 벗어나서 존재할 수도, 의미를 찾을 수도 없다. 인간의 모든 시간이 단순히 여러 순간의 모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구원적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맥락과 배경은 바로 하느님이다. 오직 하느님 안에서 모든 시간은 참된 의미를 지닌다.

 

전례 안에서든, 삶에서든 시간의 의미가 사라져 간다면 사랑으로 먼저 다가오시는 하느님 앞에 아직 내 자신이 참된 기다림의 모습으로 서 있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 김혜종 세례자 요한 - 춘천교구 사제. 춘천교구 사목국장을 맡고 있으며, 교황청립 성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9년 12월호, 김혜종 세례자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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