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미사] 전례 탐구 생활30-32: 신경 - 그리스도인의 쉐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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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0-11-13 | 조회수5,852 | 추천수1 | |
전례 탐구 생활 (30) 신경 : 그리스도인의 ‘쉐마’ ①
신경은 초기 교회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규칙 또는 표준으로 사용했던 신앙의 요약 진술입니다. 원래 세례 예식 때 예비 신자들이 교회의 신앙을 고백하는 용도였는데, 나중에 올바른 교리를 보장하고 이설(異說)을 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신경이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왜 성경 본문이 아닌 전례문이 말씀 전례 안에 있는지” 의문을 가질 법도 합니다. 여기에는 신경이 성경의 이야기 전체를 요약한다는 말로 대답할 수 있겠습니다. 창조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강생, 죽음, 부활, 성령 강림, 교회의 시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이르기까지 신경은 구원 역사의 이야기 전체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이 짧은 신앙 진술 안에서 우리는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관통하는 이야기(창조, 타락, 구속)와 이 드라마의 주연인 하느님의 세 위격 성부, 성자, 성령을 알아봅니다. 한마디로, ‘성경이 길게 말한 것을 신경이 짧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경을 기도하듯 낭송하는 관습은 성경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쉐마’라고 알려진 신앙 진술로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 말로 “들어라”라는 뜻으로, 신명기 6장 4-5절에 나오는 말씀의 첫 단어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이 거룩한 말씀을 계속 마음에 담고,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기 전에, 집에 있을 때, 거리로 나갈 때 등 하루 동안에도 규칙적으로 바쳐야 했습니다(신명 6,6-9).
‘쉐마’는 세상에 관해 이스라엘 주변 민족들이 일반적으로 알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말합니다. 대부분의 고대 근동 민족들은 다신교 세계관을 유지했습니다. 그들은 많은 신들이 있다고 믿었고, 각 부족 또는 민족은 그중에 자신만의 신들을 섬기면서 평안을 유지해 나갔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종교란 원칙적으로 부족적, 인종적, 민족적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다신교적 환경 속에서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유일신 신앙을 아주 대담하게 드러내는 표현이었고, 다른 민족들에게는 매우 과격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그저 세상의 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모든 민족들 가운데 유일하게 계신 진짜 하느님이라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다교 유일신론은 이집트, 가나안,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모시는 신들의 가면을 벗기고, 그들의 진짜 모습을 폭로해 버립니다. 그것들은 한낱 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우상에 불과할 뿐 전혀 신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야말로 유일한 하느님이다! 더군다나 ‘쉐마’는 세상에 그냥 한 분 하느님이 계심을 선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한 분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특별한 계약을 맺으셨음을 알렸습니다. 유다인들의 유일신관에는 실로 세상의 지배적인 가치관을 뒤집어엎는 날카로움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미사 때 낭송하는 신경은 ‘그리스도인의 쉐마’입니다. 구약의 ‘쉐마’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의 신경은 오늘날의 지배적인 문화와 가치관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메시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2020년 11월 8일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가톨릭제주 3면, 김경민 판크라시오 신부(성소위원장)]
전례 탐구 생활 (31) 신경 : 그리스도인의 ‘쉐마’ ②
신경은 우리 삶에 대하여 세속화된 현대 세계가 상식으로 여기는 것과는 아주 다른 이야기를 말해 줍니다. 도덕적, 종교적 진리란 없고, 옳고 그름에 대한 절대 기준도 없다는 상대주의가 공기처럼 떠도는 시대, 남에게 피해만 끼치지 않으면 자기 삶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엄청난 허용의 시대에 신경은 우리를 올바른 현실 위에 서게 하고, 우리의 믿음과 선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신경은 창조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활동, 오늘날 교회의 희생하는 사명으로 나아가는 흐름 속에서 인류 역사의 전체 틀이 되는 이야기를 제시합니다. 신경은, 삶에는 기본 바탕이 있고 우리가 여기 있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다고 전제합니다. 신경은 우주가 무작위적 우연으로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진짜 하느님, 하늘과 땅의 창조주께서 현실로 불러내시고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특정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선포합니다. 또한 신경은 이 거룩한 섭리가 하느님의 아들, 우리에게 행복과 영원한 생명의 길을 보여주려고 “사람이 되신”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드러났다고 여깁니다.
신경은 또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 구원을 위하여” 사람이 되셨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용서받아야 한다는 고백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우리가 처해 있던 상황이 뭔가 끔찍하게 잘못됐음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곧 사탄과 그의 무리가 하느님을 거슬러 일으킨 최초의 불순종과 그들이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를 바로 그 불순종으로 끌어들였다는 것, 또 이후의 인류 가족 전체가 죄에 떨어지면서 그 불순종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경의 이야기는 태초부터 이어져 온 강렬한 투쟁에 관한 이야기를 암묵적으로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과 악, 하느님과 뱀(창세 3,15; 묵시 12,1-9),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한 “하느님의 도성”과 “인간의 도성”, 요한 바오로 2세가 말한 “사랑의 문명”과 “죽음의 문화” 사이의 싸움입니다.
이렇게 신경은 우리의 작은 일상이 창조와 타락, 구원이라는 더 큰 이야기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 각자는 이 드라마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던져진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내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할 수 있을까?” 신경은 우리가 세상에 옳고 그른 선택이란 없다는 신화, 우리 삶에서 무엇을 믿고 무엇을 하든 중요하지 않다는 현대의 상대주의적 신화 속에서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신경은 우리에게 우리 삶이 끝나는 날 우리가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되리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그리고 그날 우리 삶의 모든 선택들이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서 저울에 달릴 것이고,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 우리에게 알맞은 보상 또는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신경은 이 우주적 전투에서 우리가 미지근한 구경꾼으로 남아 있도록 놔두지 않습니다. 신경은 우리가 어느 편에 서서 싸울지 선택하도록 재촉합니다. 진정한 옳고 그름이란 없다고 생각하길 바라는 세상의 군주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영원한 나라에서 누리게 될 행복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하늘과 땅의 임금님을 따를 것인가? 우리가 미사 때 신경을 통해 우리 신앙을 고백할 때 우리는 공개적으로 온 교회와 하느님 앞에 서서 예수님의 깃발을 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방식대로 살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따를 것이라고 장엄하게 선언합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2020년 12월 20일 대림 제4주일 가톨릭제주 3면, 김경민 판크라시오 신부(성소위원장)]
전례 탐구 생활 (32) 신경 : 그리스도인의 ‘쉐마’ ③
우리는 왜 같은 신앙 고백을 매주 반복해야 할까요? 세례 때 한 번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왜 우리는 매 주일마다 성당에 와서 “예, 저는 이 모든 것을 계속 믿습니다.” 하고 말해야 합니까? 신경을 시작하는 첫 단어는 이어서 나오는 여러 신앙 진술을 하나로 묶어주는 핵심 단어인데, 이 단어가 매 주일 미사 중에 신경을 반복해서 낭송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빛을 비춰줍니다. 그 단어는 바로 “믿나이다”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150항에 따르면 신앙에는 두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의 지성적 차원입니다. 신앙이란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 전체에 대하여 자유로이 동의하는 것입니다. 이 측면은 신경에서 가장 뚜렷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한 분 하느님”이 계시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믿음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우리는 또 “성령”과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공적으로 가르치는 모든 것에 우리의 정신은 “오케이!”라고 동의를 표합니다.
다른 하나는, 신앙의 더 근본적인 차원으로, 신앙이 “인격적으로 하느님께 귀의(歸依)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동의를 표할 때 많이 사용하는 “아멘”(진실로 그러하다)의 어원이 되는 히브리어 아만(aman)에는 머리에서 오는 지성적 동의 말고도 ‘믿어 의지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 존재에 대한 지성적 확신을 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인격적으로 의탁하는 것을 뜻합니다. 신앙은 하느님이 내 삶의 진짜 근본 바탕이 되어 주신다는 확신을 드러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은 “제가 무서워 떠는 날 저는 당신께 의지합니다. 하느님께서 제 편이심을 저는 압니다.”라고 외치는 시편 저자의 마음과 같습니다(시편 56,4.10).
신앙의 두 측면 - 인격적 측면과 지성적 측면 -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수학 등식과 혼인의 차이와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2 더하기 2가 4라는 것을 믿는다.”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이 진술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아내에게 “여보, 나는 당신을 믿어.”라고 한다면 그는 아내가 내 앞에 존재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은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믿어. 나는 나 자신을 당신에게 맡기고 있어. 나는 내 삶을 당신에게 주고 있어!”
이와 마찬가지로 신경에서 우리가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라고 할 때 우리는 어떤 ‘팩트’를 넘어 우리 마음을 표현합니다. 하느님께서 계신다는 단순한 확신을 넘어 - 물론 이것도 확실히 드러내고 있긴 하지만 - 우리는 한 분 하느님께 우리의 모든 삶을 맡겨 드린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매 주일 미사에서 신경 낭송을 반복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결혼한 부부가 서로 “사랑해”라고 말하며 자주 자신들의 신뢰와 서약을 재확인하는 것처럼, 우리도 신경을 통해서 매주 주님에 대한 서약을 새롭게 합니다. 하느님께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당신께 드린다고 거듭거듭 말하며 우리의 삶 전부를 그분께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는 말의 깊은 속뜻입니다. 신경이 우리 마음에 와닿을 때 우리 영혼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공명합니다. “내 삶의 진짜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 내가 진짜 신뢰하는 이는 누구인가?”, “나는 진정으로 내 삶과 내 모든 관심사를 하느님 섭리에 맡겨 드리고 있는가?” 누구도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나, 신경을 낭송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우리 안에서 더 커지길 바라는 - 우리 삶의 더 많은 부분을 하느님께 의탁할 수 있길 바라는 - 소망을 표현합니다. [2021년 1월 3일 주님 공현 대축일 가톨릭제주 3면, 김경민 판크라시오 신부(성소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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