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미사] 전례와 미사의 영성29-30: 예물 봉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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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22-10-03 | 조회수2,337 | 추천수0 | |
전례와 미사의 영성 (29) 예물 봉헌 I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어르신들께서 가끔 이런 말씀을 하실 때가 있었습니다. “이 돈은 깨끗한 새 돈이니까 잘 뒀다가 주일 미사 때 봉헌해야지.” 이런 말씀을 들을 때면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가(루카 21,1-4 참조) 문득 떠오릅니다. 복음 속 그 가난한 과부가 봉헌의 순간에 가졌던 마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이 어르신들처럼 모든 순간 속에서 하느님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마음 말입니다. 그렇게 삶의 작은 일상 속에서 하느님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마음들이 모여 마침내 삶의 전부를 기쁘게 봉헌할 수 있는 것은 아닐는지….
이러한 삶의 봉헌을 우리가 구체적으로 행할 때가 있는데 바로 미사 중에 이루어지는 예물 봉헌입니다. 특별히 주일 미사나 대축일 미사 중에 봉헌 행렬을 통해 신자들은 예물 봉헌이라는 이름으로 주님께 가진 것을 감사와 찬미의 예물로 드립니다. 이는 사실 초기 교회 때부터 이어진 모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처음에는 빵이나 포도주를 비롯하여 식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봉헌하였습니다. 성찬례를 준비하기 위해 봉헌하는 빵과 포도주는 당시 유다인들의 삶에 있어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양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빵과 포도주의 봉헌은 자신들 삶 속에 없으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것을 봉헌한다는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11세기경부터는 이러한 예물 봉헌이 헌금의 형태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니 사실 봉헌금은 단순한 헌금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주님께 드릴 빵과 포도주를 의미하고,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을 나타내게 됩니다. 즉 성찬 전례를 시작하면서 신자 대표자 두 분을 통해 빵과 포도주가 예물로 봉헌되고, 이어서 우리가 봉헌 행렬 안에서 봉헌금을 낼 때 그 예물과 함께 우리 각자의 삶을 하느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사라졌던 예물 봉헌을 위한 행렬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되살린 것입니다.
이러한 봉헌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사실 우리의 삶이 어떠한가요? 때로는 슬픔 속에서 절망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남모르게 상처받아 홀로 눈물 흘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부조리에 속상함을 느끼며 자신의 삶에 대해 불평하기도 합니다. 이제 그런 우리의 삶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상처받고, 아파하며, 때로는 눈물 흘리는 그런 우리의 삶을 봉헌하며 정성스럽게 간구합니다. 빵이 예수님의 몸으로, 포도주가 예수님의 피로 변화되듯, 우리의 나약하고 부족한 삶도 이제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통해 기쁨과 생명이 넘치는 삶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기도하며 봉헌합니다. 그래서 봉헌은 하느님께 단지 자신이 가진 무언가를 바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모든 것들이 주님 안에서 변화되는 치유와 새로 남의 과정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 봉헌을 통해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2022년 10월 2일(다해)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춘천주보 2면, 김혜종 요한 세례자 신부]
전례와 미사의 영성 (30) 예물 봉헌 II
주위를 둘러보면 정말 드러나지 않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는 분들을 종종 만날 때가 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어려운 삶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은 그 힘겨움의 시간을 신앙 안에서 향기롭게 가꾸어 냅니다. 그리고 본인도 넉넉하지 않지만, 주위의 다른 어려운 이웃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가진 것을 남몰래 나누곤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정말 대단하시다’라는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이렇게 믿음과 사랑을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로 만들어 가는 분들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어떤 처지에 있든, 어떤 상황이든 항상 ‘감사함’을 지니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 감사함이 삶의 모든 순간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만들고, 그 안에서 기쁘게 자신을 봉헌하게 만듭니다.
감사함은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속하게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며 하느님께 완전히 속하게 하는 것이 바로 ‘봉헌’입니다. 그래서 봉헌은 ‘자신에게서 하느님께로 건너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속하던 것들이 하느님의 영역으로 들어가 그 의미가 변화되고, 또한 하느님의 거룩함에 참여함으로써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빵과 포도주의 봉헌 행렬 때 사제가 제단을 벗어나지 않는 이유에 주목해야 합니다. 제단은 거룩한 곳으로서 세상과 구별됩니다. 그리고 성당이라는 공간 안에서도 특별히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하는 성변화의 장소이며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가 재현되는 제대가 놓인 공간입니다. 세상에 속해 있던 빵과 포도주는 이제 봉헌을 통해 거룩한 공간, 즉 제단으로 건너옵니다. 또 다른 의미의 건너감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모든 봉헌은 자신을 내어놓는 것 같지만, 사실은 참된 자신을 하느님 안에서 다시 찾는 모습이 됩니다. 그래서 봉헌은 은총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봤을 때 ‘내어놓음’이지만 신앙의 눈으로 봤을 때는 ‘다시 찾음’입니다. 버림으로써 얻고, 비움으로써 다시 채우는 은총의 시간이 바로 봉헌인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봉헌의 대상이 항상 ‘하느님’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이 오직 하느님께로 향하고 그분께 드려질 수 있을 때 그 시간은 새롭게 변화되고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혹시 삶의 무게가 감당하기 힘들다고 느껴질 때, 그리고 내 삶의 의미를 잃어 간다고 느끼신다면 그 시간을 하느님께 봉헌해 보시길 바랍니다. 분명 우리의 인간적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기쁨과 평화를 그분께서 우리에게 다시 주실 것입니다. 또한 그럴 수 있을 때 예물을 봉헌하며 바치는 사제의 기도가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온 누리의 주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주님의 너그러우신 은혜로 저희가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주님께 바치오니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2022년 10월 9일(다해) 연중 제28주일 춘천주보 2면, 김혜종 요한 세례자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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