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9) 카인과 아벨 (창세4,1-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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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4-06 | 조회수354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창세기(9) 카인과 아벨 2023. 4. 6. (창세4,1-10) 1 사람이 자기 아내 하와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 아이를 얻었다.” 2 그 여자는 다시 카인의 동생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기가 되고 카인은 땅을 부치는 농부가 되었다. 3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4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5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6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7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8 카인이 아우 아벨에게 “들에 나가자.”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9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10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이후에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놀라운 복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께서 뱀의 후손인 사탄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지만,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탄의 머리를 이미 부수시고 이기셨다는 이 복음말씀은 단순히 예수님에 관한 말씀만 아니라고 했습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여자의 후손은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이고, 뱀의 후손은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대적하는 사탄의 무리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뱀의 후손인 카인이 여자의 후손인 아벨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셋이 나오게 하심으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또 노아 홍수 이후에는 셈의 자손인 이스라엘백성들이 여자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함의 자손들이 뱀의 후손들입니다. 그래서 뱀의 후손으로 함의 자손인 애굽 왕 파라오가 이스라엘백성들을 억압하고 압제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해주셨습니다. 또 이스라엘백성들은 뱀의 후손으로 함의 자손인 가나안족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은 다윗 왕의 시대에 가나안의 모든 대적을 다 물리치고 승리하였습니다. 이것은 장차 다윗 왕의 후손으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탄을 이기고 승리하실 것에 대한 예표(豫表)입니다. 이렇게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백성들이 여자의 후손으로 하느님의 택하신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뱀의 후손으로 사탄의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와서는 이스라엘백성들 중에서 남은 자라고 했던 유대인들이 뱀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 44절에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가리켜 너희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 마귀의 자녀이며, 마귀에서 나왔다고 하셨습니다. 또 마태복음에 보면 유대인들 중에서 가장 하느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예수님은 뱀의 후손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23,33) 33 너희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지옥형 판결을 어떻게 피하려느냐? 여기서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그들에게 욕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그 뱀의 후손인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 가장 하느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뱀의 후손들이 되었습니까? (마태23,34) 34 그러므로 이제 내가 예언자들과 현인들과 율법 학자들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면 너희는 그들을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또 이 고을 저 고을 쫓아다니며 박해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예언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3장에 나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바른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또 이들은 끊임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채찍질하고 박해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와 같이 왜 하느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뱀의 후손이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사탄의 모습과 같습니다. 사탄은 항상 하느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결국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게 만듭니다. 일주일에 단식을 두 번씩이나 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하고, 안식일을 지키기 위한 수많은 규칙들을 만들어서 지켰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도리어 하느님이 보내신 참 예언자를 죽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가장 잘 섬긴다고 하면서, 겉으로 가장 거룩하게 보였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뱀의 후손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태23,35) 35 그리하여 의인 아벨의 피부터, 너희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한 베레크야의 아들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 쏟아진 무죄한 피의 값이 모두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 예수님께서 왜 의인(義人) 아벨의 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이 뱀의 후손들이 구약시대 때부터 하느님의 백성들의 피를 흘리게 한 것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뱀의 후손들은 한 시대도 끊임없이 한 순간도 끊임없 하느님의 백성들의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뱀의 후손들은 아벨을 죽였고, 또 구약시대는 참 예언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다 결국 하느님이 보내주신 하느님의 아들조차도 죽였습니다. 가장 하느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느님이 보내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는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여자의 후손으로 하느님의 백성이 가야할 길입니다. 또 하나는 뱀의 후손으로 사탄의 무리들이 가는 길입니다. 우리가 뱀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이 길을 걷기 위해서 누가 여자의 후손이고 누가 뱀의 후손인지를 잘 알아야합니다. (창세4,1) 1 사람이 자기 아내 하와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 아이를 얻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同寢)하여 하와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았습니다. 여기서 아담이 하와를 통해서 낳은 카인이 몇 번째 아들이겠습니까? 우리는 보통 첫 번째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4장14절을 봅시다. (창세4,14) 14 당신께서 오늘 저를 이 땅에서 쫓아내시니, 저는 당신 앞에서 몸을 숨겨야 하고,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되어, 만나는 자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카인은 죄를 지은 후 하느님에게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카인이 만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 사람들은 아담의 자손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도 모두 아담의 자손들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아담이 카인을 낳았다는 이 말씀은 카인이 무조건 첫 번째 아들이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담은 카인 이전에 다른 자녀들을 낳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아담이 카인과 아벨을 낳았다는 이야기를 맨 먼저 하는 이유는 성경은 아담의 모든 자손들의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성경(聖經)은 아담의 자손 중에서 누가 여자의 후손으로 하느님의 자녀이며, 누가 뱀의 후손으로 사탄의 무리가 되는지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통해서 누가 여자의 후손으로 하느님의 백성인지, 누가 뱀의 후손으로 사탄의 무리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와는 카인을 낳았을 때 내가 야훼로 말미암아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야훼로 말미암아는 ‘야훼와 함께’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아들은 나나 아담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야훼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얻은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카인이라는 말의 뜻도 하느님으로부터 얻었다는 뜻입니다. 하와는 카인을 낳았을 때, 혹시 하느님께로부터 얻은 이 아이가 창세기 3장 15절에서 말씀하는 여자의 후손으로 뱀의 머리를 부술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겠는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으로부터 나서 여자의 후손으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느님의 자녀라고 생각했는데, 반대로 뱀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왜 여자의 후손이라고 생각했던 카인이 왜 뱀의 후손이 되었습니까?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 먼저 하느님께서 왜 카인의 제사를 받지 아니하시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는가를 생각해야합니다. (히브11,4) 4 믿음으로써, 아벨은 카인보다 나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믿음 덕분에 아벨은 의인으로 인정받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예물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믿음 덕분에 여전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벨이 카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린 이유는 하느님이 아벨이 드린 그 예물에 대해서 증언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벨은 장차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표(豫表)하는 양을 제물로 드렸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더 자세히 보면 이것만이 아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2절을 보면 아벨은 양을 치고, 카인은 농사를 지었습니다. (창세4,2-) 2 그 여자는 다시 카인의 동생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기가 되고 카인은 땅을 부치는 농부가 되었다. 3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4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5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우리는 단순히 카인이 어린양을 제물로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는 것은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구약의 제사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피 흘리는 제사만 받지 않으셨습니다. 소제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단순히 카인이 곡식을 하느님께 드렸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제사를 받지 아니하셨다는 것은 완전한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왜 하느님께서 카인의 제사를 받지 아니하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에 대해서 4절과 5절을 보면 하느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을 받으셨으나 카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보신 것은 단순히 제물만 보신 것이 아니라 제물을 드린 이들의 삶을 보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느님께 아름다운 예물을 드린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그것만 보시지 않습니다. 그 예물과 함께 그 예물을 드리는 우리를 지금도 보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느님께서 보실 때 예물만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예물을 드리는 카인의 삶이 문제였습니다. (1요한3,12) 12 악마에게 속한 사람으로서 자기 동생을 죽인 카인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무슨 까닭으로 동생을 죽였습니까? 자기가 한 일은 악하고 동생이 한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카인이 그 아우를 죽인 이유가 카인이 악한 자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카인이 아벨을 죽였기 때문에 악인이 아니라 카인이 악인이기 때문에 아우를 죽이는 악한 행동을 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으로부터 태어났다고 하는 카인은 하느님께 제사의 열심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벨보다 먼저 제사를 드렸습니다. 또 그는 농부로서 최선을 다해서 예물도 드렸습니다. 그런데 카인은 아담으로부터 내려왔던 그 원죄의 사슬을 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카인은 아무리 열심히 제사를 드리고 예물을 드렸지만 죄악의 모습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하느님께서 그의 제사를 받지 아니하셨고, 또 아우를 죽이는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벨은 어린양을 제물로 드릴 때 그 어린양과 함께 그 자신도 죽었음을 믿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제사를 드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제물을 드리는 자가 그 제물의 머리에 안수를 합니다. (레위1,4) 4 번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다(안수). 그러면 그 제물이 그를 위해 호의로 받아들여져, 그의 속죄가 이루어진다. 안수(按手)란 그 제물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물을 드릴 때 제물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제물과 함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물이 죽을 때 그 제물과 함께 내가 죽었음을 믿음으로 드립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그와 함께 내가 죽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아벨처럼 믿음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아담의 원죄를 가지고 있는 나의 옛 자아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음을 믿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란 내가 죽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옛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믿음으로 예배를 드릴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여인의 후손이라고 생각했던 카인이 도리어 뱀의 후손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신약성경에서는 하느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했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뱀의 후손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주여! 주여!’ 하고 “하느님! 하느님!”이라고 하지만 우리도 얼마든지 카인과 같은 뱀의 후손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1요한4,1)1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 영이나 다 믿지 말고 그 영이 하느님께 속한 것인지 시험해 보십시오.” 오늘날에 사탄은 공동묘지에 피를 흘리는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하지 않습니다. 광명한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보다 주님을 더 잘 섬기고 있다고 하면서도 우리가 사탄의 길을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무엇이 여자의 후손의 길인지, 뱀의 후손의 길인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①첫째, 십자가가 있는 것이 여자의 후손의 길이고, 십자가가 없는 것이 뱀의 후손의 길입니다. 마태복음16장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고 “스승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내가 너희들의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 절대 십자가를 지시지 마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보고 십자가를 지지 마시라고 했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도 모두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간다고 말을 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주님의 영광이 아닌 주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사탄의 종노릇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모든 것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데, 그것이 진정으로 주님께 영광이 되지 않은 이유는 베드로가 주님을 위하겠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지 못하게 된 원인은 그가 자기를 부인(否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아무리 주님을 위해, 그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하지만 우리가 자아(自我)를 부정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최대의 원수와 적을 외부에서 찾으려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 때문이라 합니다. 또 환경 때문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나를 넘어지게 하는 사탄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보면 우리가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지 못하는 최대의 원수는 바로 우리 "자아" 라는 사실을 발견해야합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외부적인 유혹과 극심한 고난이 있어도 우리 자아가 그것에 끌리지 않으면 됩니다. 나의 자아가 죽고 없어지면 나의 모든 문제는 해결되어지고, 교회 안에 모든 문제도 사라지고, 우리는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정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온전히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내가 죽어야합니다. 어떻게 우리 가정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정이 될 수 있습니까? 내가 죽어야합니다. 우리나라가 어떻게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나라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죽어야합니다. 우리 교회가 어떻게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그것도 우리 모두가 죽어야합니다. 그런데 또 여기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모든 문제가 내 속에 있으며, "자아(自我)"라는 것이 사라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데, 자아가 쉽게 죽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나의 자아가 죽어질 수 있습니까? 우리는 많은 경우 나의 자아가 죽어지기 위해서 내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생각을 합니다. (2코린5,14)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예수)께서 모든 사람(성도)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자아)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5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를 믿는 우리 자아도 그와 함께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과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옛 자아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예수님만 십자가에 죽이시고, 나의 옛 자아가 더 고집스럽게 살아있게 하기 위함이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그와 함께 우리 모두를 죽이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벨과 같이 여자의 후손의 길을 걸을 수 있음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음을 믿어야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을 믿고 날마다 죽은 자로 여기고 살아가야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가 사탄을 이기는 삶을 살게 됩니다. ②둘째, 미움은 뱀의 후손의 길이고 사랑은 여자의 후손의 길입니다. (1요한3,10-12. 15) 10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는 이렇게 뚜렷이 드러납니다.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도 그렇습니다. 11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 악마에게 속한 사람으로서 자기 동생을 죽인 카인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무슨 까닭으로 동생을 죽였습니까? 자기가 한 일은 악하고 동생이 한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15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알다시피, 살인자는 아무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카인이 자기 형제 아벨을 미워하는 것 때문에 아벨을 살인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미움은 뱀의 후손의 길이고, 사랑은 여자의 후손의 길입니다. 입으로만 ‘주님! 주님!’ 한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자라면 반드시 삶의 열매로 나타나야합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1요한3,14) 14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③셋째,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없는 것이 뱀의 길이고,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는 것이 여자의 후손의 길입니다. 하느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뱀의 후손이 된 것은 그들 마음가운데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 말이 너희 마음가운데 들어갈 곳이 없음으로 너희가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2티모3,16-17) 16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17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찌르기도 합니다. 또 본성에 거스르기도 합니다. 내 생각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때 유대인들처럼 내게 그 말씀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말씀을 죽이면 뱀의 후손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느님의 백성은 그 말씀이 나를 찌를 때 말씀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죽이며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말씀 앞에서 날마다 나를 죽이고 그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 하며 살아가는 모든 성도가 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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