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님 부활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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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3-04-10 | 조회수520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예수님 부활 -사실인가 유언비어인가?-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참으로 믿는 우리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주님 부활대축일입니다. 하루하루 살아있는 그날까지 늘 새롭게 폈다지는 “주님 파스카의 꽃” 같은 우리의 신원입니다. 다시 나누고 싶은 주님의 파스카의 꽃이란 자작 고백시입니다.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새롭게 폈다지는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
부활시기를 맞이하여 모든 분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시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주님 부활을 자명한 사실로 믿지만 오늘 마태복음의 상황은 두 견해가 팽배한 듯 보입니다. 예수님 부활은 사실인가 또는 유언비어인가 두 가능성입니다.
복음 전반부에 등장하는 주님의 여제자들은 너무 생생한 주님 부활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천사들로부터 주님 부활 소식을 듣고 큰 기쁨중에 제자들에게 전하려 달려가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평안하냐?” 인사와 더불어 당부를 듣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갈릴래아! 바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처음으로 만났던 아름다운 체험의 기억들로 가득했던 자리아닙니까? 바로 그곳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새롭게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어제 부활 성야 교황님의 강론중 인상적인 대목은 ‘기억’이었습니다. 좋은 기억이, 좋은 추억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좋은 기억은, 좋은 추억은 미래의 희망을 향해가는 추진력이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억하라 그리고 계속 희망과 기쁨을 지니고 앞으로 나아가라." (Rember and keep moving forward with hope and joy.)
얼마나 멋진 통찰입니까? 참으로 힘들 때 주님과의 첫사랑의 추억인 각자 삶의 자리 갈릴래아를 상기한다면 계속 희망을 지니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좋은 추억을 쌓아감이 미래를 향해 가는 힘을 축적해 가는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자녀들에게, 후배들에게 좋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추억을 선물하는 일이 실질적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좋은 추억이 축적이 없으면 한결같이 힘차게 나아가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강조하는 좋은 선택과 훈련. 그리고 습관화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첫사랑의 자리 갈릴래아로 초대하시며 초발심의 자세로 다시 새롭게 출발하도록 합니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믿음의 용사로 돌변하여 복음 선포의 일꾼이 되었고, 그 놀라운 활약상이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의 오순절 설교를 통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는 예수님 부활의 유언비어의 소재를 밝히고 있습니다.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경비병들에게 많은 돈으로 매수하며 은밀히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갔다 말하라고 지시합니다. 경비병들는 그대로 하였고, 그리하여 이 유언비어가 사실처럼 유다인들 사이에 펴저 나갔다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 부활을 체험하지 못한 상식적 사람들에게 충분히 먹힐수 있는 유언비어입니다.
바로 이에 대한 결정적 답이 오늘 사도행전의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입니다. 앞으로 부활시기 계속될 제1독서 사도행전은 예수님 부활에 대한 증언과 선포로 가득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주님 부활의 증거라기 보다는 강력한 주님 부활의 선포입니다. 예수님 부활은 결코 유언비어가 아닌 생생한 체험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열한사도와 함께 오순절에 유다인들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을 대상으로 예수님 부활이 하느님의 놀라운 위업임을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 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문장을 보십시오! 주어는 온통 하느님입니다. 바로 렉시오 디비나는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주어를 “나”로 놓지 않고 “하느님”을 주어로 하여 성서뿐 아니라 내 삶의 성경책도 렉시오디비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연히 여기 수도원에 와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 여정중에 있음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오늘 화답송 시편(16장1-11절)을 그리스도화하여 읽는 렉시오 디비나의 수준이 완전히 대가급입니다. 다윗은 그 예전에 이미 부활하신 주님을 앞서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물론 사도행전 교회의 신도들은 다윗의 시편 고백을 완전히 그리스도화하여 렉시오디비나 한 결과를 자기 고백으로 하고 있음을 봅니다. 내용이 깊고 아름다워 각자 내 고백으로 바쳐도 좋겠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다윗의 고백이자 베드로의 고백이요 우리의 고백도 됩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저에게 가르쳐 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워 주실 것입니다.”
바로 이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깊은 친교를 나누는 복된 미사시간입니다. 날마다의 미사가 부활하신 주님을 힘차게 선포하고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복음 선포자로 내 삶의 자리 갈릴래아 세상에 파견됩니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아름답고 좋은 사랑의 추억들로 가득한 하루를 만드시기 바랍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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