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창세기(13) 심판(審判)과 은혜(恩惠) (창세6,1-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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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04-10 | 조회수226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창세기(13) 2023. 4. 10. 심판(審判)과 은혜(恩惠) (창세6,1-10) 1 땅 위에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2 하느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여자들을 골라 모두 아내로 삼았다. 3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살덩어리일 따름이니, 나의 영이 그들 안에 영원히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들은 백이십 년밖에 살지 못한다.” 4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한자리에 들어 그들에게서 자식이 태어나던 그때와 그 뒤에도 세상에는 나필족이 있었는데, 그들은 옛날의 용사들로서 이름난 장사들이었다. 5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6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7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 8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 9 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 노아는 당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갔다. 10 그리고 노아는 아들 셋, 곧 셈과 함과 야펫을 낳았다. 인간이 범죄 한 후에 인류를 두 갈래 길로 갈라졌습니다. 하나는 ①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카인의 후손의 길과 ②하느님과 동행하는 셋의 후손의 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4장에는 카인의 후손의 대표인 라멕이 나옵니다. 라멕은 자기 마음대로 두 아내를 둡니다. 그리고 자신의 개인적인 상처 때문에 사람들을 죽입니다. 또 하느님이 벌을 7배나 준다면 자신은 벌을 77배를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5장에는 셋의 후손이 나옵니다. 셋의 후손의 대표는 에녹입니다. 에녹은 카인의 후손과는 달리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에녹은 므투셀라를 낳으면서 이 아이가 죽으면 이 세상에 심판이 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죽으면 이 세상에 심판이 온다는 뜻에서 므투셀라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에녹은 매일 이 땅의 종말과 심판을 생각하면서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 에녹은 하느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음으로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 에녹은 삶의 모든 순간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에게 모세를 통해서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너희들은 카인의 길을 가지 말고, 에녹의 길을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도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카인의 길이고, 또 하나는 에녹의 길입니다.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백성들이 카인의 길이 아니라 에녹의 길을 걷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느님의 백성들이 카인의 길을 따라서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세6,1-2) 1 땅 위에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그들에게서 딸들이 태어났다. 2 하느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여자들을 골라 모두 아내로 삼았다. 사람들의 딸들과 하느님의 아들들이 나옵니다. 여기서 사람의 딸들은 카인의 후손들을 가리킵니다. 또 하느님의 아들들은 셋의 후손들인 하느님의 백성들입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 하느님의 아들들 즉 하느님의 백성들이 이 카인의 후손인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카인의 후손의 대표인 라멕의 모습이었습니다. (창세4,19) 19 라멕은 아내를 둘 얻었는데, 한 아내의 이름은 아다이고 다른 아내의 이름은 칠라였다. 여기서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했는데, 하나는 아다라고 하는데, 아다는 아름답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라멕은 단순히 외모의 아름다움 때문에 아내를 취합니다. 또 칠라라는 뜻은 “딸랑거리는 자, 아부하는 자, 악기다루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 둘이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라멕은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두 아내를 취합니다. 또 그 아내를 취하는 기준도 단순히 외적인 아름다움입니다. 또 인간이 귀를 즐겁게 하는 악기를 다루거나 인간적으로 아부하는 자를 아내로 취하였습니다. 창세기 5장까지는 그래도 카인의 후손과 하느님의 백성들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6장에 와서 이제 하느님의 백성들이 카인의 후손과 같이 단순히 외적인 아름다움만으로 아내를 취합니다. 또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습니다. 그 여자가 결혼을 한 여자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무조건 내가 좋으면 무조건 아내로 삼습니다. 또 아내로 삼으면 이미 있는 아내가 어떻게 생각할까 상관하지도 않습니다. 또 그 자녀들 간에 어떤 문제가 있을지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조건 내가 좋아하는 대로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카인의 후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는 하느님의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창세6,3) 3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살덩어리일 따름이니, 나의 영이 그들 안에 영원히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들은 백이십(120) 년밖에 살지 못한다.” 이제 하느님께서 나의 영(성령)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살덩어리(肉)이 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래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의 영(靈)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생령(生靈)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원래부터 영적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느님의 백성들조차도 이 세상 사람들을 따라서 갈 때 하느님의 영(성령)이 떠났습니다. 그래서 이제 노아시대 때에는 카인의 후손만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들조차도 육신의 정욕(情慾)만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날이 백이십년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120년 뒤에 이들을 홍수로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에 근거해서 노아가 방주를 만든 기간이 120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육신의 정욕만을 따르는 사람들을 당장 심판하시면 되는데, 왜 120년을 유보하시는 이유는 120년의 기간 동안 회개(悔改)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2베드3,9) 9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120년 동안 하느님은 참고,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느님께 회개할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백성들은 계속해서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여 자녀들을 낳습니다. (창세6,4) 4 하느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한자리에 들어 그들에게서 자식이 태어나던 그때와 그 뒤에도 세상에는 나필족이 있었는데, 그들은 옛날의 용사들로서 이름난 장사들이었다. 하느님께서 120년 후에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한 그 후에도 하느님의 백성들은 믿지 않는 사람의 딸들과 결혼해서 계속해서 자식을 낳습니다. 그런데 그 낳은 자녀들이 “용사(勇士), 장사(壯士)”라고 합니다. 또 고대에 “명성(名聲)”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고 합니다. 또 이들을 “네피림”이라고 합니다. 공동번역에서는 “4. 그 때 그리고 그 뒤에도 세상에는 느빌림(내피림)이라는 거인족이 있었는데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들로서 옛날부터 이름난 장사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네피림과 용사와 명성이 있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백성들이 믿지 않는 사람의 딸들에게서 낳은 자녀들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여자와 결혼을 해서 자녀를 낳았는데, 이들이 싸움을 잘하는 용사이고, 또 명성이 있다고 하면 이것이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낳은 자녀에 대해서 먼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네피림이라고 합니다. 네피림이란 거인(巨人)으로 타락한 사람, 혹은 폭군(暴君)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타락하고 폭군과 같은 사람들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창세6,5) 5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6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여기 보면 하느님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惡)할 뿐임을 보시고’ 라고 합니다. 죄가 세상에 모든 곳에 퍼져있다는 말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죄가 정치계에도 언론계에도 사법계에도 교육계에도 종교계에도 모든 곳에 죄가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가 온 세상의 모든 영역에 퍼지게 된 것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죄가 단순히 사회구조적인 문제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사회구조가 바뀌면 세상은 좋아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가 구조적으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세상에 죄가 없어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죄는 우리의 마음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생각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죄가 우리 마음에 들어오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야 합니다. 하느님이 태초(太初)에 세상을 만드실 때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느님께서는 죄가 세상에 가득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이 악함을 보셨습니다. (창세6,6) 6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을 때는 좋아하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십니다. 그리고 마음에 근심하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죄에 대해서 분노하셨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아파(근심)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분노와 근심(謹審)의 차이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아이가 성적이 떨어지면 교사는 분노합니다. 왜냐하면 아이가 점수가 떨어지면 선생도 교사 점수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사는 자신의 교사점수가 떨어진 것 때문에 아이에게 분노합니다. 그런데 엄마는 근심합니다. 성적이 떨어진 것 때문에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 때문에 근심합니다. 그래서 분노와 근심의 차이는 분노는 사랑이 없는 것이고, 근심은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땅의 죄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으시고 근심하셨습니다. 한탄하셨습니다. 비록 이 땅이 죄로 인해서 완전히 쓸어버릴 세상이지만 하느님은 여전히 이 세상을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창세6,7) 7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 여기서 쓸어버린다는 말은 기억도 못하도록 완전히 없앤다는 말씀입니다(탈출17,14)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이 왜 이 세상을 무슨 자격으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가?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왜 이 죄악 된 세상을 심판하시며 완전히 기억도 하지 못할 정도로 쓸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까? 그 이유는 이 세상을 하느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이 세상이 하느님이 계시는 에덴성전을 만드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죄가 가득해서 더 이상 하느님이 계시는 세상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또 사람의 마음의 생각의 계획이 항상 악하기 때문에 더 이상 하느님께서 계시는 사람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아홍수는 지금 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본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본심은 죄로 가득 찬 세상에 대하여는 완전히 쓸어버리려 하시고 또 죄로 가득 찬 인간에 대해서도 완전히 심판하시려 합니다. 그래서 노아의홍수는 장차 이 최후심판의 예표(豫表)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창조목적에 맞지 않은 이 세상은 노아홍수 때와 같이 완전히 심판하십니다. 노아 홍수 때는 물로 심판하시지만 최후의 심판 때는 불로 심판하십니다. 에녹이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은 그의 아들을 통해서 이 세상이 하느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 이 땅에 임할 하느님의 심판과 우리 인간에 임할 하느님의 심판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매일을 지구 종말의 날로 여기며, 내 인생 최후의 날로 여기며 살아서 에녹과 같이 매일을 종말의 날로 여기며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이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노아시대에 이 땅에 임할 하느님의 심판을 믿음으로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노아입니다. (창세6,9-10) 9 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 노아는 당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갔다. 10 그리고 노아는 아들 셋, 곧 셈과 함과 야펫을 낳았다. 여기서도 노아의 역사라는 말도 톨레도트라는 말입니다. 5장에서도 아담의 톨레도트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 말이 족보, 역사, 이야기로 번역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노아의 이야기라고 번역하고, 새번역 성경에서는 노아의 역사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라고 합니다.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합니다. 노아가 의인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어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노아가 의인라는 말은 이런 시대 가운데서도 하느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며 살았다는 말입니다. 또 당대에 완전한 자도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완전한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노아가 이런 시대 가운데서도 하느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며 살았습니까? 그가 어떻게 해서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당대에 완전한 자로 살 수 있었습니까? 그가 어떻게 이런 시대 가운데서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창세6,7-8) 7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 8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 하느님의 백성들조차도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시대에도 노아가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은 노아가 하느님께 은혜(恩惠)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일방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노아가 이런 시대가운데서 하느님의 은혜를 입게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창세5,32) 32 노아의 나이 오백 세 되었을 때, 노아는 셈과 함과 야펫을 낳았다. 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 셈, 함, 야벳을 낳습니다. 5장에 아담의 족보를 보면 보통 육십 몇 세에 자녀를 낳았더라 하고, 늦어도 백여 세에 자녀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노아는 500살이 될 때 까지 자녀가 없었습니다. 당시에 자녀는 모든 복의 기준입니다. 자녀를 많이 낳았다고 하는 것이 성공의 기준이 되던 시대였습니다. 또 성경에서 자녀는 하느님께서 주신다고 했을 때 노아는 500년 동안을 하느님께서 태를 열어주시는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노아는 500년 동안을 철저한 실패자로 500년 동안을 하느님이 주시는 자녀의 복을 전혀 받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 완전한 실패자로 생각했던 사람에게 하느님은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이것은 성경전체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도 80세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때가 모세가 하느님의 일을 하려고 했지만 이스라엘백성에게 조차도 거절을 당하였을 때입니다. 그래서 그는 40년 동안 실패의 광야를 걸었을 때입니다. 그래서 육신적으로도 잘 걸을 수 없어서 지팡이를 짚고 다닐 수밖에 없을 때입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장인(丈人)의 집에서 양떼를 기르는 일밖에 할 수 없을 때였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불꽃가운데서 나타나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실패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내가 인간적으로 실패했다고 해서 절대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맙시다. 하느님의 백성조차도 인간적인 성공을 추구하던 시대에 하느님께서는 실패자인 노아에게 하느님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실패는 하느님의 은혜의 기회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①첫째, 번성하고 잘 될 때를 조심해야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절에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하느님의 아들들이 믿지 않는 사람의 딸들을 자기 마음대로 취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기 쉬운 것은 우리가 실패하고 낙심할 때도 되지만 번성하고 잘 될 때입니다. 이것은 구약시대 이스라엘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호세아 4장 7절에 보면 “그들이 많아질수록 이렇듯 나에게 죄를 지었으니 나도 그들의 영광을 수치로 바꾸어 버리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번성할수록 죄를 짓기 더 쉽습니까? “그들은 포도주와 햇 포도주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호세4,1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번성하면 우리의 마음이 다른 곳에 빼앗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신명8,12-14) 12 너희가 배불리 먹으며 좋은 집들을 짓고 살게 될 때, 13 또 너희 소 떼와 양 떼가 불어나고 너희에게 은과 금이 많이 생기며, 너희가 가진 모든 것이 불어날 때, 14 너희 마음이 교만해져,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 너희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이 말씀에 보면 번성하면 우리 마음이 교만하여 하느님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가 다른 곳에 우리의 마음이 한 순간도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신 것이 고난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 고난은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한 하느님의 백신입니다. 고난(苦難)은 우리로 하여금 한 순간도 하느님만을 바라보지 못하면 살수 없도록 합니다. 고난은 우리로 예수님이 아니면 한 순간도 살 수 없도록 합니다. 고난은 우리도 하여금 더 이상 사람이나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합니다. 고난은 우리로 우리 마음에 하느님 한 분만을 바라보도록 하는 하느님의 백신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고난가운데서 위축되지 말고, 오히려 고난 가운데서 더욱더 하느님만 바라보며 예수님만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②둘째. 또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이 세상의 심판의 원인은 이 세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시대에 세상에 죄가 가득하여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원인은 단순하게 카인의 후손 즉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때문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세상에 죄가 가득하게 된 원인은 하느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 사람들을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래서 노아시대 하느님의 백성들의 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루가17,27)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노아시대 때 사람들이 더 특별한 죄를 지었다기 보다는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다가 홍수가 나서 더 멸망하였다고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드는 일이 잘못된 일입니까?. 우리는 그런 일을 하지 말아야합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상적인 삶 가운데 단순히 일상적인 일에 빠져서 살아가는 것을 문제를 삼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상적인 일에 빠져서 살아가다보면 노아시대 하느님의 백성들처럼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일상적인 일에 빠져서 살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매일 일상적인 일을 하더라도 매일 그 날이 주님이 오시는 날인 것처럼 하고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내가 장가를 가도 오늘 밤에 주님이 오신다고 생각하고 장가가는 일을 생각해야합니다. 내가 시집가는 일을 생각해도 오늘 밤에 주님이 오신다고 생각하고 시집가는 일을 생각해야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매일 일상적인 일을 하더라도 오늘 밤에 주님이 오신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1코린7,29-31) 29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30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31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상성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오늘 밤에 주님이 오신다고 생각함으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상대화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집가는 일이 중요한 일이지만 그 일을 절대적인 일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내가 장사하는 일이 정말 중요한 일이지만 그 일이 하느님과 같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기쁜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습니까? 그 일도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가 일상적인 일에 빠지면 그것이 절대화 되어 그것이 마치 하느님과 같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이 하느님 중심이 되지 않고 세상의 일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노아시대 하느님의 백성들처럼 일상적인 일에 빠져서 살아가지 말고, 매일 종말(終末)을 의식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분요(紛擾)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며 살아갑시다. ③셋째, 이렇게 살기 위해서 우리도 노아처럼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야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동행하는 은혜입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게 하는 은혜입니다. 무엇보다 다르게 살 수 있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노아처럼 심판의 세상가운데서 하느님의 구원을 전파하면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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