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리를 감동시키는 예수님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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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3-04-13 | 조회수497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우리를 감동시키는 예수님 -사랑과 회개-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118,1)
어제 저는 미사중 예물기도 내용에 감동했습니다. 바로 “인류를 위하여”라는 대목 때문입니다. “주님, 인류를 위하여 바치는 이 속량의 제물을 받아들이시어, 저희 영혼과 육신의 구원을 이루어 주소서.” 가톨릭 신자들뿐 아니라 종파를 초월하여 온 인류와 피조물을 대상으로 날마다 바치는 거룩한 사랑의 미사봉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귀한 사랑의 선물이 미사전례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북풍과 태양”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북측에 대한 전임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 정책도 여기에 근거합니다. 오늘 말씀 묵상중 생각난 예화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북풍과 태양의 우화 줄거리를 간략히 소개해 드립니다.
‘어느날 거리를 지나가는 나그네의 상의를 벗길 수 있을지를 놓고 북풍과 태양이 힘겨루기 승부를 벌입니다. 먼저 북풍이 바람을 힘껏 불면서 상의를 벗기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추위를 싫어했던 나그네는 자신이 입고 있던 상의를 힘껏 잡고 있었기에 북풍은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데 실패합니다. 다음에는 태양이 햇볕을 서서히 따뜻이 내리쬐니 나그네는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이 입고 있던 상의를 벗습니다. 이렇게 해서 태양이 힘겨루기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참으로 평범한 우화지만 깊은 깨우침을 줍니다. 결국 사랑밖엔 길이, 답이 없음을 보여주는 우화입니다. 끝까지 ‘인내하는 사랑’, ‘기다리는 사랑’만이 사람을 회개에로 이끈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우화입니다. 루가복음 15장에서 집을 떠난 탕자를 회개에로 이끈 것은 예전 아버지의 집에 있을 때의 사랑의 추억이었습니다.
우리의 경우만 봐도 회개하라 하지 않아도 사랑을 체험하면 저절로 감동하여 자신을 바라보며 회개하게 됩니다. 사람을 감동시켜 회개에로 이끄는 햇볕같은 사랑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 장면이 그러합니다. 흡사 사랑했던 제자들이 보고 싶어 친히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보입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자 마자 우선 사랑의 선물인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얼마나 필요로하는 평화의 선물인지요!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똑같은 파스카의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에게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문득 우리말 속담으로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있어도 자식의 부모 사랑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간혹 효성孝誠 깊은 사람들을 만나면 감동하게 됩니다.
그대로 하느님과 사람의 경우에도 해당되는 진리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처럼 부활하셔서 우리를 늘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의 사랑을 까맣게 잊고 불효의 삶을 살고 있는지요. 효성하니 십자가의 길 제13처 아름다운 기도문이 생각납니다.
“구세주 예수님! 주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품에 안으신 성모님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성모님 품 안에서 효성스러운 자녀로 살다가 마침내 그 품 안에서 죽게 하소서.”
끊임없는 사랑과 회개의 삶으로 효성스러운 자녀로 살다가 성모님 품 안에서 죽는 것보다 행복한 죽음은 없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의 출현에 유령이 아닌가 놀라는 제자들에게 온전한 부활임을 깨우쳐 주기 위해 제자들에게 당신을 만져보라 하신후 제자들이 구운 몰고기 한토막을 드리자 그들 앞에서 잡수십니다. 영혼만이 아니라 진짜 온전한 영육의 부활임을 상징적으로 일깨워주시는 장면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절정이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이요 이보다 더 큰 사랑의 선물은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신후,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선포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일의 증인이다.”
가톨릭 신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 온인류가 선포의 대상입니다. 이래서 가톨릭을 말뜻 그대로 보편적 교회라 일컫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 자체가 하느님 사랑의 절정의 표현이요 끊임없이 우리를 회개에로 이끕니다. 바로 제자들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선포는 오늘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를 통해 유감없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사랑에 감복하여 온전히 회개한 베드로의 감동에 넘치는 회개를 촉구하는 솔로몬 주랑에서의 설교입니다. 그대로 오늘의 우리를 향한, 너무 실감나는 설교 내용이라 그 일부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이사악의 하느님과 야곱의 하느님, 곧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이제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일으키시고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그대로 오늘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을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예나 이제나 인간의 본질을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회개를 통해 하느님께 돌아오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모두가 은총이듯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끊임없이 우리를 회개에로 이끕니다.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복입니다.
사랑과 회개와 복은 함께 갑니다. 사랑을 체험하면 할수록 회개하게 되고 하느님께 날로 가까이 이르게되니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이니 바로 이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여정은 죽는 그날까지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임을, 하느님의 사랑을 배워 가는 배움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의 여정에, 배움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지칠줄 모르는 열정과 힘을 주십니다.
“주여, 우리를 살려주소서, 아아 주여, 우리를 잘 살게 해 주소서.”(시편118,25).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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